분야 | 역사/전통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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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출처 | 디지털천안문화대전-이괄의 난 |
정의
조선 후기 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이 내란을 일으키자 인조의 피난 행렬이 천안을 지난 사건.
개설
1623년(인조 1) 서인 세력은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33인을 등위로 나누어 책록하였다. 그중 2등에 녹훈된 이괄(李适)[1587~1624]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에 1624년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어 직산과 천안을 거쳐 공주에 이르렀으며, 다시 환궁할 때에는 직산에 머물렀다. 이괄의 군대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영변에서 남하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장만(
역사적 배경
1623년(인조 1) 서인 세력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33인은 정사공신에 녹훈되고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이때 이괄은 반정 계획에 늦게 참여하였다 하여 2등에 책록되고 아들과 아우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좌천되어 영변에 머물게 되자 구체적인 반란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는 관군의 병력이 대단치 않고 전면적인 동원도 어려우리라는 점을 계산해 도사를 죽이고 순변사 한명련과 함께 1624년(인조 2) 1월 24일에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1만여 명의 반군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고 형조 판서 이시발과 대사간 정엽을 부사, 이수일을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삼아 반군을 토벌하였다.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서흥(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는 길은 천안 지역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2월 11일에 대가가 직산(
결과
반란군은 장만 휘하의 관군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이천으로 도망하였고 결국 1624년 2월 15일 아침 반란군 기익헌·이수백 등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면서 난은 진압되고 말았다.
천안 출신의 지계최(
의의와 평가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서인 정권은 호위청 군관의 수를 배로 늘리고, 어영청과 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군사력의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도성 부근에 피신처가 없어 공주까지 피난해야 했던 사실을 들어 남한산성의 축조를 신속하게 진행하기도 하였다. 천안 지역은 서울에서 호남으로 가는 대로(
이괄의 난 이후 기내(畿內) 군사력의 정비가 일부 이루어졌지만, 서북로를 비롯한 지방군의 정비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 『천안시지』(천안시지 편찬 위원회, 1997)
- 『충청남도지』 6권(충청남도지 편찬 위원회, 2008)
- 김경수, 「국가 변란기의 충청 사람들」(『충남 역사의 이해』, 충청남도 역사 문화 연구원, 2010)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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