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는 그 가엾은 시절에, 즉 1170년경부터 1250년 사이에 약 20여 명의 문인이 제각기 쓴 이야기들을 그 상호 연관성에 따라 XXVI편(가지, branche)으로 묶은 방대한 작품이다. 그러나 총 3만여 수(
황제로부터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 사람들과 그들의 행태, 그리고 온갖 간계와 탐욕, 파렴치, 잔혹성, 음란성 등 인간의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수성(
옮긴이의 말
“내 여러분에게 차라리 우스개 이야기를 들려 드림이 나으리니, 제공(
여우의 꾀에 넘어가 수도원의 우물 속에 빠지게 된 늑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름 모를 문인이, 그 이야기의 허두에 쓴 말이다. 얼핏 보기에 가벼운 빈정거림이 감도는 이 말은, 작품의 태동 배경과 문학 일반의 본질, 그리고 특히 풍자 문학가들이 끊임없이 감수해야 했던 위험 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즉, 이 작품이 쓰여졌던 12~13세기 이전부터 쏟아져 나왔던 각종 성자 열전이나 포교용 종교극, 혹은 크레띠앵 드 트르와(1135~1183년경) 등과 같은 이들의 기사도 소설 혹은 ‘궁정 소설’ 등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말해 ‘설교나 성자의 전기’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식상해진 시절에 이 작품이 태동하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또한 지배층이건 피지배층이건, 모든 사람들이 당시의 문인들에게서 기대했던 것은 설교나 틀에 박힌 영웅담이 아니라, 그야말로 흔쾌히 웃을 수 있는 심심파적거리였음을 짐작케 해 준다. 들리느니 근엄한 성자들의 이야기, 마귀의 장난인지 하느님의 변덕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기적 이야기, 광신적인 제왕이나 허풍쟁이 무사들 이야기, 성지 순례자들이나 십자군들의 영웅담뿐이니, <여우 이야기>가 비록 제왕이나 승려들, 농민 등 사회의 모든 계층을 무차별하게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들, 그들이 어찌 자신들에 대한 풍자나 비아냥거림을 무작정 싫어만 하였겠는가.
그러나 스스로가 ‘미친 놈’ 취급 당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임을 구태여 내세우는 작가의 말 속에는 일종의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다. 작가의 그러한 강박 증세는, 삼십여 년 후, 즉 1205년 이후에 여우의 탄생과 유년 시절 이야기를 쓴 다른 문인들에게서도 여일하게 나타난다. 그는 우선 그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노라고 전제하면서도, 자신의 내적 태도, 다시 말해 모든 문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숙명적인 본능을 감추지 않고 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하여 구태여 입을 다물 이유가 없으리니, 오히려 용기를 내어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함이 마땅하리라.” (생략)
(생략) 이 작품에 펼쳐지는 중세의 파노라마는 대략 이상과 같거니와, 약 삼만여 행의 운문으로 쓰여졌고 총 ⅩⅩⅦ편(branches)에 이르는 작품 중에서, 중복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일화 스물하나를 선별하여 번역함에 있어, 비록 원문의 형태를 그대로 살릴 수는 없었으되, 각 어휘나 표현에 실린 이미지나 정서는 충실히 옮기려 노력하였다. 간혹 듣기에 민망스러운 어휘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무자비하게 핍박 받던 힘없는 중세 기층민들의 서글프고 기나긴 겨울밤을 위무해 주던 이야기, 그 기나긴 밤에 싸늘한 잠자리에 누워 전전반측하던 가엾은 사람들의 허기증을 달래 주던 이야기, 그리하여 입에서 입으로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복음처럼, 봄바람처럼, 위로의 손길처럼 혹은 혁명의 전조처럼 전해지던 그 소박한 이야기가 인멸치 않도록, 그 진솔한 정서와 꾸밈 없는 언사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그것들을 글자에 담아 놓은 중세의 이름 모를 문인들, 그들의 온정과 용기가 팔백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오히려 새롭게 느껴진다.
본문 중에서
"내 여러분에게 차라리 우스개 이야기를 들려드림이 나으리니,
제공께서 어떤 설교나 어느 성자의 전기에 귀를 기울일 분들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Or me convient tel chose dire
Dont je vos puisse fere rire.
Qar je sai bien, ce est la pure,
Que de sarmon n'avés vos cure
Ne de cors seint oïr la vie.
출판사 서평
12~13세기의 프랑스, 사람들이 차라리 무덤 속 안식을 갈망할 만큼 총체적 무질서와 집단적 광기가 지배하던 그 시절에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꾼들이 남긴 책. 인간의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수성(
역자 이형식 서울대 불어교육과
이형식은 1972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빠리4대학과 빠리8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르셀 프루스트−희열의 순간과 영원한 본질로의 회귀≫, ≪프루스트의 예술론≫, ≪작가와 신화≫, ≪감성과 문학≫, ≪정염의 맥박≫, ≪루시퍼의 항변≫,≪현대 문학 비평의 방법론≫(공저), ≪프루스트, 토마스 만, 조이스≫(공저), ≪프랑스 현대 소설 연구≫(공저), ≪그 먼 여름≫(장편소설) 등이 있고 역서로는 ≪외상 죽음≫(쎌린느), ≪밤 끝으로의 여행≫(쎌린느), ≪미덕의 불운≫(싸드), ≪사랑의 죄악≫(싸드), ≪철부지 시절≫(까바니), ≪미소 띤 부조리≫(사바띠에), ≪여우 이야기≫(이형식 편역), ≪트리스탄과 이즈≫(베디에), ≪중세 시인들의 객담≫(이형식 편역), ≪중세의 연가≫(이형식 편역), ≪농담≫(이형식 편역), ≪롤랑전≫, ≪웃는 남자≫(위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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