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릉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9월) |
신릉군(
생애와 업적
편집위무기는 위소왕의 아들이자 안희왕의 이복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자 무기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그는 어질고 선비를 존중했으며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기원전 257년, 앙숙사이인 조나라와 진나라는 다시 한번 결전을 하게 되었다. 진나라 군사들은 기원전 260년 장평(
위 안희왕은 장군 진비(
평원군은 연속 사절을 보내 구원을 독촉하는 한편, 위나라에서 대권을 잡고 있는 자기의 처남인 신릉군이 조나라와 자기의 친 누님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결국 급해난 것은 신릉군이었다. 당시 신의와 명사들에 대한 예우로 이름이 높았던 신릉군으로 놓고 말하면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선택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나라를 구원하지 않을 경우, 하나는 위나라에서 신릉군의 위망과 안리왕의 안목에 신릉군이 없다는 결론이 얻어지게 되어 그동안 쌓았던 위망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고 조나라를 구하려 할 경우 진을 치고 관망하라는 안희왕의 명을 거역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적게는 안희왕의 눈에 나게 되고 심하게 되면 생명위험까지 있게 된다. 안리왕은 강대한 진나라가 무서워 조나라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신릉군은 또 조나라가 망하는 걸 그대로 보고있을 처지만은 아니었다.
신릉군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포섭했던 문객(
원래 안리왕이 가장 총애하는 왕비 여희의 아버지가 원수에게 살해되었는데 여희가 그처럼 원수를 갚으려고 해도 갚지 못했다. 그런데 이일을 알게 된 신릉군이 자기의 문객을 시켜 여희의 아비죽인 원수를 갚아주었는데 그럼으로 여희는 신릉군의 청탁을 거절 할리가 없었다.
신릉군은 후영이 시키는 대로 여희에게 병부를 훔쳐 줄 것을 청탁했고 여희는 신릉군의 은혜를 갚으려고 위나라 안리왕의 침실에 있는 진비의 병부를 훔쳐 신릉군에게 주었다. 병부를 훔친 신릉군이 진비를 찾아 가려는 데 후영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가려면 당시 유명한 무사인 주해(
후영은 원래 비범한 모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집이 가난해 성문을 지킴으로 연명을 해가는 사람이었고 주해 역시 당시 유명한 무사였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저자거리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이인(
후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신릉군은 병부를 가지고 주해와 함께 진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진비는 병부를 보고도 군사권을 자기에게 넘기라는 신릉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상시 상식상 전쟁을 앞두고 대장군을 교체하는 일은 없었으며 교체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제3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신릉군이 혼자서 병부를 가지고 대장군의 지휘권을 받으려하지 진비는 지휘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주해는 그 자리에서 진비를 격살했다. 이렇게 신릉군 위무기는 군사권을 가질 수 있어 군사를 휘동하여 조나라 구원의 길에 나섰다.
신릉군 위무기가 조나라 지원에 나섰다는 소문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춘신군(
병부를 훔치고 진비를 살해해 군권을 잡아 조나라를 구한 신릉군은 위나라 안리왕이 자기를 미워할 줄을 알고 전쟁이 끝난 다음 귀국하지 않고 그냥 조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명사들을 자기의 수하에 포섭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기원전 247년, 원기를 회복한 진나라는 원수를 갚기 위한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이에 기겁한 위나라 안리왕은 수차 조나라로 사신을 보내 신릉군을 돌아오라고 했지만 신릉군은 이 핑계 저 핑계 지어 "이제 안리왕의 사신의 말을 전달하는 자는 목을 벤다"라고 하면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리왕이 모든 군권을 다 주겠다고 해서야 위나라로 돌아왔고 신릉군과는 이복형제간인 안리왕은 돌아온 신릉군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상장군으로 임명받아 위나라의 모든 군권을 쥐게 된 신릉군은 즉시 기타 제후국들에 구원을 청했고 신릉군이 상장군으로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후국들에서는 분분히 구원병을 보냈고 신릉군은 황하이남에서 진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함곡관까지 추격해갔다. 패전을 한 진나라에서는 황금 만량을 가지고 신릉군에게 살해된 진비의 부하들에게 가서 신릉군이 역모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으며 한편 신릉군에게 또 사람을 보내 이미 위나라 왕이 되었다면서 하고 축하를 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릉군을 많이 의심했던 안리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신릉군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안 신릉군은 병권을 내놓고 매일같이 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허송하다가 4년 만에 우울한 가운데서 자기의 생을 마감했으며 같은 해, 안리왕 역시 사망했다. 신릉군이 죽은 지 얼마안되어 진나라 군사들은 위나라의 도읍지를 함락했고 위나라는 결국 앞당겨 멸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