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교
정난교(
정난교 ( | |
별명 | 다른 이름은 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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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충청남도 목천군 남면 신촌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복무 | 조선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
복무기간 | 1884년 8월 ~ 1884년 12월 12일 1894년 8월 ~ 1907년 9월 19일 |
근무 |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
최종계급 | 오위장 조선 조련국 교관 대한제국 육군 부령 |
지휘 |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포공국장 |
주요 참전 |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
기타 이력 | 육군참령, 군무아문참의, 군부대신실 관방장, 중추원 부찬의, 충청남도참여관, 중추원참의·중추원 칙임참의 |
1882년(고종 19년) 3월에 일본에 건너가 견문을 익힌 뒤 1883년 5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이 도착하자 도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84년 5월 박영효의 명으로 귀국, 조련국의 교관이 되었다가 남행부장(
유혁로, 신응희(
일본식 이름은 나카하라 유조(
생애
편집초기 활동
편집생애 초반
편집1863년(철종 14년) 1월 23일 충청남도 목천군 남면 신촌(현재 천안시 성남면 신촌)에서 정광렴(
어려서 시절 고향 천안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소년기 무렵 한성으로 상경, 관직에 종사하던 형 정윤교(
1882년(고종 19년) 3월에 일본에 건너가 견문을 익힌 뒤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였다. 1883년 5월 서재필, 이규완, 서재창, 정행징, 임은명, 신응희, 유혁로 등 일본 유학생들이 도착하자 함께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
일본 유학
편집1882년(고종 19년) 3월에 일본에 건너가 견문을 익힌 뒤 1883년 5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이 도착하자 도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후에 개설된 조선 병조 조련국의 사관생도는 이때 일본의 호산(
1883년(고종 20년) 5월 그는 서재창, 신응희, 정행징, 임은명, 신중모, 윤영관, 하응선 등과 함께 일본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
그가 도야마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김옥균이 개화파의 영향 아래 있는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4] 김옥균은 개화파 청년들의 한 부류를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시켜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은 전공 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세, 재정제도와 관련된 실무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군 계통의 유학은 1883년 정난교 등이 도야마 학교에 입학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이들 유학생들은 학자금이 점차 바닥이 나 1년 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4]
갑신정변 가담
편집1884년(고종 20년) 5월 박영효의 명으로 귀국, 조련국의 교관이 되었다가 육군의 부장(
최초 거사는 1885년으로 잡혔으나 일행의 거사 계획이 서재필의 양이모부인 윤태준에게 발각되면서 서둘러 날짜를 정했고, 날짜는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날로 정해졌다. 정변 거사 직전 정난교는 정보 수집 임무를 맡았으며,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사전 모임이 있을 때, 다시 한번 그는 경우궁 내부경호와 행동대 1개 부대 지휘 임무를 부여받았다. 급진 개화파는 평소부터 양성, 규합해둔 이규완, 임은명, 정난교, 이인종, 윤경순 등의 사관생도와 그밖의 장사패 수십 명을 지휘하여 연일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 구입 등에 착수하여 제반 준비를 서둘렀다.[5]
갑신정변
편집갑신정변 전야
편집1884년(고종 20년)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을 방문하였다. 일행은 박영효의 집에 모여 갑신정변 직전 사전 준비를 하였다. 4일 거사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최종 결정되었다. 그는 1개의 행동대를 지휘하여 움직였다. 12월 4일 오후 6시 우정국 낙성식 직후 갑신정변이 터지자 그는 대기하고 있다가 별궁 일대에 모인 장사들로 1개의 부대를 이끌고 궐내에 들어왔다.
김옥균의 친일 개화파들은 일본의 지원을 얻어 수구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사흘 동안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북관왕묘에서 옷을 갈아입고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주조선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정변 실패와 망명
편집12월 7일 청나라군이 한성부에 당도하여 국왕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홍영식은 박영교와 함께 사태가 어지러움을 알고 자신들이 국왕 내외를 인솔할테니 다른 동지들에게 피신을 권고하였다.
국왕을 보낸 후 무라카미 중대장은 퇴거의 대형을 편성했다. 일개 소대를 전위로 하여 다케조에 신이치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변수 등을 중앙에 세우고 행진하기 시작하였다.[6] 유혁로는 일행과 함께 창덕궁 북관왕묘를 거쳐 북문에서 변장하고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으로 간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5주역 가운데 4명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 5명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이날 오후 9시경 일본 공사관에 들어갔다.[7] 피신해 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등과 몇몇 개화파는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을 걸쳤다.[8]
1884년 12월 12일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주선으로 유혁로는 일행과 함께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12월 12일 인천으로 피신했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등 생존자는 천신만고 끝에 인천에서 일본 상선 치도세마루(
망명 과정
편집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도움을 받아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쓰기무라의 집에 은신해 있던 유혁로는 정난교, 이규완, 서재필, 신응희 등과 함께 인천에서 쓰지 가쓰자부로(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그곳에서 모두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서전에서 배의 선원 쓰지 도주로(
“ | 당신들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 조선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기념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1] | ” |
그리고는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
일본 망명 생활
편집1차 망명
편집여흥 민씨 측에서 보낸 자객 이일직 등이 여러 차례 박영효의 목숨을 노렸으나 정난교와 이규완의 활약으로 살아남게 된다. 일본으로 피신 이후 박영효, 이규완, 신응희, 유혁로 등과 함께 오랜 세월을 망명객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난교는 일본에서 ‘나카하라 유조’(
일본 망명 생활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이며 게이오 의숙 출신인 스나가(1868~1942)의 후원을 받았다. 게이오 의숙을 졸업한 스나가는 낭인 조직 현양사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신응희, 정난교, 유혁로, 우범선, 이두황 등 조선인 망명객들과 두터운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11] 사노에 있는 그의 대저택에는 조선에서 온 망명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11]
김옥균 주변에는 갑신정변 이후 같이 망명 온 정난교 등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박영효도 도쿄에서 친린의숙이라는 서당을 운영하고 있어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상태였다.[12] 일본 체류 중 그는 노동으로 생계를 조달하는 것 외에 체력 단련으로 소일하였다. 일본에 있으면서 그는 유혁로, 신응희(
일본 체류 중 그는 이규완과 박영효의 토론 상대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 1월 귀환한 박영효는 이후 건백서를 작성하여 고종에게 보낸다. 일설에는 그가 단순한 박영효의 경호만을 담당한게 아니라, 박영효의 정치담론 토론 상대였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박영효는 일본에서 영어 학습을 시작으로 서양의 철학과 기독교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이런 배경이 건백서의 내용에 반영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글을 남기기 위해서 박영효의 주위에는 그의 수하였던 정난교, 이규완을 비롯한 이른바 토론 그룹이 있었을 것이다.[13]"라는 것이다.
김옥균 암살 계획 탐지
편집1885년 6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일명 장갑복)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다. 장은규가 장귀인의 오라비라는 것을 안 유혁로는 그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고, 김옥균은 장은규를 피함으로써 1차 암살 기도는 미수로 돌아갔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인 지운영을 자객으로 파견하였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한다.[14] 그러나 김옥균은 지운영도 자객임을 간파하였다. 김옥균은 당시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
“ |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17] | ” |
김옥균은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이 가져온 거사금 5만 엔을 갈취할 것을 제안한다. 김옥균은 함께 있는 동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비로 가져온 5만 엔의 돈을 빼앗자고 제안한다.[17] 세 사람은 지운영을 만나 불평을 늘어놓았다.[17]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동지들로 일본에 같이 망명해 있던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등을 지운영에게 접근시켜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잡도록 했다.[15]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만나 이국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김옥균을 비난하는 등 김옥균에게 큰 불만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15]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과 2,3개월 이상 만나면서 신뢰하게 되었다.
2차 김옥균 암살 미수범 격퇴
편집그러던 어느날 지운영은 그들에게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국왕의 밀지를 받들어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제군은 자신을 도우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지운영은 그 증거로 고종의 칙서를 보여주었다.[18]
“ | 명여로 특차도해포적사( 이 사람은 명을 받은 특차도해포적사이니 임시계획은 편의로 일임하며 나라를 위하는 일 역시 전권을 위임하니, 조선의 신민이라면 핍박하지 않고 거행하도록 하라. |
” |
— 대군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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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일자는 1885년 5월로 되어 있고 국왕의 옥쇄(대군주모)까지 찍힌 이 칙서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18] 게다가 김옥균 살해에 성공한 자에게는 5천 엔을 지불한다는 지불보증서도 가지고 있었다. 지운영은 한성에서 품고 온 비수도 보여주었다.[18]
정난교 등 3인은 지운영을 포박한 뒤 구타, 위협해 가지고 있던 칙서와 비수 등을 빼앗았다.[18]
지운영이 체포되자 함께 동행한 자객은 이를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 조선 정부가 지운영의 귀국을 요청하자, 일본 경찰은 정난교에 의하여 요꼬하마 여관에 감금되어 있던 지운영을 구출하여 1896년 6월 23일 기선편으로 인천으로 보냈다.[19] 한편 정난교 등은 지운영이 고종의 밀서로 일행을 암살하려 했음을 설명했고, 일본 경찰은 정난교 일파에게 위협이 가해지면 경시청에 보고하고, 사적인 제재는 가하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1891년 김옥균이 흥선대원군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해 12월 11일 그는 이규완, 박영효와 함께 김옥균과의 절교를 선언하였다. 이는 1891년 12월 11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일직 일파 탐지
편집1892년 4월 민씨 일파인 민영소(閔泳韶)의 밀명을 받은 이일직은 무역상으로 가장해 일본에 들어왔다. 이일직은 김옥균, 박영효, 정난교, 이규완, 유혁로 등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인사들에게 접근하였다.[20] 고종과 민영소의 밀명을 받고 박영효, 김옥균 암살을 위해 파견된 자객 이일직(
이일직은 김옥균과 그의 일행이 고베를 떠나는 것을 본 후, 오사카로 돌아가서 소네자키 무라에 있는 그의 애인의 집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외국인 옷을 입었다.[21]1894년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암살대원 중 한 사람인 홍종우가 김옥균의 암살에 성공한 뒤, 홍종우의 일행이었던 이일직은 무사 권동수, 권재수 형제와 일본인 가와쿠보 즈네기치(
1894년 3월 25일 이일직은 다시 도쿄에 와서, 사쿠라다, 혼고 지역에 있는 호텔 무라이 칸에서 가와구보를 만났고, 이때 양인은 당분간 하숙하였다. 이일직과 가와쿠보는 이때 박영효, 정난교 그리고 이규완을 이 호텔로 유인해서 그들을 없애는 절차를 수행하자는 것은 이일직의 계획이었다.[21] 그러나 그들을 그 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거듭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21] 이일직은 그를 의심한 이규완과 정난교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경솔하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였고, 실행 직전 사전에 발각된다.[20]
박영효 암살 미수 분쇄
편집홍종우가 김옥균과 함께 상해로 출발하자 이일직은 시바쿠라다(
이일직 등은 박영효가 서예를 잘 하고, 서화와 서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 박영효의 별실에서 휘호를 쓴 뒤 박영효가 품평을 하게 하는 사이에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일직 등은 가와쿠보를 매수하여 박영효가 투숙하고 있는 친린의숙(
이일직이 박영효 쪽에 심어놓은 김태원으로부터 이미 암살 계획을 들은 박영효의 측근들은 역으로 김태원에게 이일직 앞으로 편지를 보내 친린의숙으로 오도록 권했다.[22] 이규완은 박영효가 3월 29일에 다른 곳으로 간다는 소문을 내고, 이일직에게도 3월 29일에 박영효가 떠나니 그 전날 초등학교에서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3월 28일 새벽, 이일직은 도쿄 쓰키지의 박영효 거처로 찾아갔으나 박영효는 이미 몸을 피해버려 집에 없었다. 이일직은 곧바로 그리 멀지 않은 친린의숙으로 갔다.[22] 그곳에서 이일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규완과 정난교는 이일직을 붙잡았다. 정난교는 이일직을 보고 바로 그를 잡아 기둥에다 묶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칼끝을 대고는 "네놈이 민(閔) 일파가 보낸 자객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면서 실토를 강요하였다. 이일직은 곧 이규완에 의해 친린의숙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일직을 심문하였다.
이일직 고문 사건과 체포
편집1894년 3월 28일 그는 포박, 감금한 이일직에게 일본에 온 목적과 배후를 캐물었다. 이규완과 정난교는 이일직이 박영효, 김옥균 및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려는 계획에 몰두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시인을 받아냈었다. 이규완은 이에 대해 박영효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들과 논의하는 즉시, 이일직을 반초에 있는 기숙학교로 소환해서 그 곳에서 심문하기로 결의했다.[23] 이 과정에서 그는 이일직의 손발을 건물 기둥에 포승줄로 묶고,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그는 친린의숙에 감금된 이일직을 고문하여 음모사실을 고백하게 했다. 이어 일본 경찰에 신고했지만 고문 행위가 드러나 박영효 일파와 이일직의 일파 모두 체포되어 재판소로 넘겨 공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정난교 역시 제거 대상이었다.[24] 도쿄지방재판소에 회부된 이일직은 검사와의 신문 조서에서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이선호(
재판과 석방
편집1894년 6월 27일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이일직은 다시 도쿄 지방법원에 살인 미수 혐의로 회부되었고, 정난교 역시 이규완 등과 함께 이일직 감금, 고문,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6월 28일 김옥균 살해 혐의와 박영효 등에 대한 살해미수 혐의 등으로 사형이 구형되었던 이일직과 무기 구형의 가와쿠보 쓰네키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26] 오히려 이규완, 정난교에게는 이일직을 불법 감금, 구타한 혐의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26] 권동수 형제와 김태원 등은 이에 앞서 무죄방면되어 조선으로 이미 송환된 상태였다.[26]
그는 항소하였다. 그러나 정난교는 이일직 고문 혐의로 도쿄 지방법원에서 검사로부터 1개월의 중금고(
대한제국기 활동
편집귀국 이후
편집1894년(고종 30년) 7월 친일 내각이 성립된 뒤 비밀리에 부산항을 통해 입국, 충청, 전라도를 시찰하고 민심을 살폈다. 1894년 11월 개화파가 갑신정변 죄인에서 사면 복권되면서 박영효가 귀국하자, 정난교는 관직에 복귀하였다. 11월 13일 고종은 금릉위 박영효의 직첩을 되돌려주고[27], 아울러 갑신정변에 관련되었던 대역죄인들도 모두 사면한다고 선언했다.[27] 이미 국내에 잠입해있던 서광범, 이규완, 정난교 등은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27] 그는 군사마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하였다.
1895년 초부터는 군대를 지휘하며 동학농민운동 토벌에 참여하였다. 그는 토벌대의 지휘관으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일을 맡았으며,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군대를 지휘하였다. 1895년 2월 군무아문 참의 서리에 임명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진압에 가담한 공으로 1895년 3월 1일 총리대신과 군무아문대신 서리의 주청으로 정삼품 통정대부(
그런데 이때 그는 양주목사(楊州
제1차 갑오개혁 당시 그는 박영효, 서광범 계열의 개혁 관료로서 활약하였다.[29] 1895년 군무아문의 참의와 군부대신 관방장 등을 맡으면서 친일 정권의 군부 장악을 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친일 인사 축출 시도에 대한 훈련대의 장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병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탈취할 역쿠데타를 계획했다가 실패하였다.
명성황후 암살 계획
편집1895년(고종 32년) 5월 그는 박영효, 이규완, 우범선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유길준의 폭로로 암살 미수는 실패로 돌아가고,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은신해 있던 그는 1895년 10월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그는 을미사변 당시 겐요샤 소속의 일본인 낭인들, 조선인 길 안내자들 외에 명성황후를 척살하기 위해 행동한 조선인 행동대의 한 사람이었다. 권동진에 의하면 자신과 자신의 형 권형진 외에도 정난교, 조희문, 이주회, 유혁로 등도 왕비 암살에 가담한 직접 행동파라고 증언하였다.[30]
“ | 이 음모에 간여한 사람은 일본 사람 강본류지조(오카모토 류노스케) 외 일본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우리 사람으로는 개혁파의 관계자는 무조건 참가하였지. 우리 정부 대신을 비롯하여 훈련대 제1대대 제2중대장 내 백형(맏형) 권형진(사변 후 경무사로 임명) 등도 획책에 가담하였으며, 직접파로는 훈련대 외에 일본사관학교생도이던 우리 여덟명이 활동하였는데 그 성명은 정난교, 조희문, 이주회, 유혁로, 구연수 외 김모였다.[30] | ” |
그러나 일본 낭인들이 먼저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사살한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화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31] 그러나 그는 곧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1895년 5월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과 8월의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로 그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탄핵 상소가 빗발쳤다. 그는 본래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을미사변에 가담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박영효의 암살 미수 계획과 대원군, 유길준 등의 을미사변에 대해 같은 세력이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였다.
“ | 8월 사변(을미사변) 때 대궐 안에 뛰어들어 흉악한 반역행위를 마구 한 것은 바로 박영효와 생사를 같이 하는 무리인 이주회, 유혁로, 정난교였습니다. 더없이 흉악한 음모가 자라오다가 이에 이르러 터졌으니, 저들이 5월에 시행하려던 것(박영효 음모 사건)을 8월에 미루어 시행했다는 것을 정확히 말할 수 있습니다. (중략)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의 무리들은 박영효의 패거리와는 다르지만 그 흉악한 반역 심보는 박영효의 무리와 같습니다.[32] | ” |
1896년 6월 17일 4품 이승구(
2차 망명 생활
편집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에도 그는 박영효, 이규완, 유혁로, 유길준 등과 함께 고종 축출과 정부 타도를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명성황후 암살 동조 혐의 등도 추가되어 체포령이 떨어지자 바로 용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2차 망명 시 정난교는 이규완과 함께 박영효를 경호하면서 고베(
한편, 박영효, 정난교 등 이른바 '국사범'들은 환국공작에 열중하고 있었다.[33] 후일 권동진은 삼천리
“ | 청년시대의 제우( 먼저 청년시대의 나의 동무들을 말하면... 그때 동경에 망명하였든 인물들은 박영효, 조희연(군부대신 다니든 분), 장박(대신 지난이), 유길준(수상 지낸 이), 권영진(나의 중씨로 경무사), 유세남(내무차관 다니든 이), 김옥균, 그러고 우리 동렬로는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윤효정, 오세창 또 우리보담 조금 늦어 들어온 소장파에 이신( |
” |
고종은 일본 조정에 계속 사람을 보내 정난교와 이준용, 이규완, 유혁로, 유길준의 국내 송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조정은 송환 요구를 거절했다. 박영효와 정난교 등이 환국 공작을 추진할 무렵 고종은 이들을 합법적으로 넘겨받아 처리하려 했다.
고종은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1904년 3월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35] 고종이 지명한 요인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종에게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이행하지 않았다.[35]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일본에 있던 국사범들은 끊임없이 쿠데타 음모를 계속하였다.[33]
관료 생활
편집1904년(광무 7년) 3월 17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특파대사 자격으로 경성부에 방문했다. 이토 방한 중 고종은 일본 측과 내밀히 일본에 체류하는 망명자 처리 문제를 논의하여 이준용,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조희문, 권동진, 구연수, 정난교, 이규완, 신응희 등 14명은 중범으로 용서해주는 것이 어려우며 그 밖의 자들은 귀국하면 각기 그 죄에 따라 관대히 처분할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36]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정난교, 권동진,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그는 사농공상과 문존무비, 신분과 직업의 귀천을 가리고, 인품 보다는 직업,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인간을 차별대우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애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냉소하였다. 1906년 박영효와 함께 재차 귀국한 정난교는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게 되자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과 식민 통치를 도우며 원조 친일파로서 역할을 다했다. 1907년(광무 10년) 군부대신 겸 관방장(
생애 후반
편집한일 합방 직후
편집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어 충청남도 참여관(
1912년 8월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4년 12월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충청남도지역 사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겸임 충청남도 지방토지조사회 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지방 토지 조사 사업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관료 생활 활동
편집1915년 4월 14일 판임문관시험출제위원, 판임문관견습시험출제위원이 되고, 9월 30일 고등관 2등으로 승진하였다. 1915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에 서위되었다.
1920년 5월 28일 함경북도참여관 박영철, 전라북도참여관 김윤정 등 11인,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수 최재익(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문관분한령(
참정권 주장과 최후
편집그는 조선인도 역시 일본의 국민이라며 참정권 허용을 요구했다. 1938년 5월 제19회 중추원 회의 시 "내선일체 정신을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에서 구현하는 방책"에 대해 그는 "국민의 3대 의무인 병역과 교육, 중의원 의원 선거법을 조선에 시행하여 조선인에게도 진정한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촉구하여 충성으로서 군국에 보답하려는 관념을 환기"시키고, 유능한 조선인을 차별대우하지 말고 주요한 지위에 등용할 것과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장려할 것을 제안하였다.
1938년 11월 17일 장단방호단 고문에 임명되었다.[42]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인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었다.
1939년 11월 조선 유림의 모임인 조선유도연합회 중앙본부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2월 25일 장단군의 유림 모임인 장단유도회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43] 1940년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우미히라 란노리(
1944년 12월 28일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1943년에 종 4위 훈 6등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사후
편집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가족 관계
편집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뒤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 1명을 얻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29일자 기사에는 그가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보기 위해 출국했다가 삼작일(3일 전) 하오 8시에 귀국하였다[44]"는 기사가 있다.
같이 보기
편집참고 자료
편집-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정란교 :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김도형)〉.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친일거두로 변신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368.
- 법원도서관, 《국역 고등법원판결록 제2권:민사》 (법원도서관, 2009)
- 정난교
- 정난교 간찰
- 정난교:천안문화원
관련 서적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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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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