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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양자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인수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교육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양아버지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요협]]의 아들이며, [[조선시대]] [[조선 중종|중종]] 때의 성리학자인 [[김인후]]의 12대손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이다. |
2024년 6월 19일 (수) 17:41 기준 최신판
김기중(
그는 양자 김성수의 중앙학교 인수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교육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의 양아버지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요협의 아들이며, 조선시대 중종 때의 성리학자인 김인후의 12대손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이다.
생애
[편집]아버지 김요협이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다.
1888년 식년과[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2][3] 이후 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의령원 참봉을 지냈다.[3] 아버지가 외가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았고, 사업수완은 부족하여 2천 석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나 재산은 넉넉하였다. 늦도록 아들이 없어 동생 김경중의 넷째 아들 김성수를 양자로 들였다. 그 뒤 소실 공주김씨 김영희로부터 서자 김재수를 얻었다.
1904년 용담(
한일합방 이후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투자하여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1908년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茁浦)에 영신학교(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주는 한편 사회에 기부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동생 김경중과 함께 보성전문학교(
가족
[편집]- 할아버지 : 김명환(
金 命 煥)- 아버지 : 김요협(
金 堯莢, 1833 ~ 1909) - 어머니 : 영일정씨(
迎 日 鄭 氏 , 1831 ~ 1911)
- 아버지 : 김요협(
- 외조부 : 정계량(
鄭 季 良 )
각주
[편집]같이 보기
[편집]참고 문헌
[편집]- 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 (인촌기념회, 1976)
- 김중순,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 (김중순, 류석춘 역, 일조각, 1998)
- 최시중, 《인촌 김성수:겨레의 길잡이 시대의 선각자》 (동아일보사, 1986)
-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평전》(인촌기념회, 동아일보사, 1991)
-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88)
-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7)
- 신일철 외, 《평전 인촌 김성수》(신일철 외 지음, 동아일보사, 1991)
- 동아일보사 편집부, 《한국의 선택(2천년대를향한)》 (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91)
- 황명수, 《한국기업경영의 역사적 성격》 (황명수, 신양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