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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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 | 1895년 6월 25일 조선 경기도 고양군[1] |
사망 | 1941년 8월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대한제국 |
직업 | 독립운동가 |
활동 정보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주요 활동 | 다나카 암살 시도 |
상훈 | ![]() |
웹사이트 | 김익상 (독립유공자 공훈록) |
김익상(
생애
[편집]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편집]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의 심장 경복궁내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전기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되었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여 시설과 집기가 파손되었다. 총독은 암살하지 못했으나 삼엄한 경비 속에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에 잠입하여 실행한 폭탄 의거는 대단한 성과였다. 의거 후 조선총독부를 빠져 나온 김익상은 평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육군대장 암살 시도
[편집]이듬해인 1922년 3월 28일 오성륜(
재판과 순국
[편집]김익상은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 자리에서 김익상은 의열단 동지가 3백 50명 가량이며 한국 국민의 행복과 독립을 위해 일본의 대관과 군인 및 두목 가는 자를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이 일로 당하는 형벌은 사양치 않겠다고 했다. 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검사의 항소로 열린 나카사키 공소원의 공소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하고 얼마 후 일본인 고등경찰이 김익상을 연행해 간 이후 종적이 묘연해져 일제에 암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후
[편집]영화
[편집]- 2016: 영화 밀정에서 마지막 장면중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학생으로 나왔다.
같이 보기
[편집]참조
[편집]- 김익상 : 독립유공자 공훈록 - 국가보훈처
- “2010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익상”. 《독립유공자 공훈록》.
- “김익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익상”. 《네이버 캐스트(독립운동가)》.
각주
[편집]- ↑ “김익상”. 《네이버캐스트》.
- ↑ “김익상의사 의거 터”. 《문화콘텐츠닷컴》. 2021년9월9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