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동 (柳 やなぎ 辰 たつ 仝, 1497년 11월 23일 ~ 1561년 3월 11일 [ 1] )은 조선 중의 문신·서화가로, 본관은 진주 (晉 すすむ 州 しゅう ), 자는 숙춘(叔春), 호는 죽당(竹 たけ 堂 どう )이다. 류자문 (柳子 りゅうこ 文 ぶん )의 손자이자 류도 (柳 やなぎ 濤)의 아버지이다.
1531년 (중종 26) 문과에 병과(丙 へい 科 か )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 うけたまわ 文 ぶん 院 いん 正字 せいじ )가 되었으며[ 1] , 1543년 (중종 38) 특지(特旨 とくし )로 홍문관부제학(弘文 こうぶん 館 かん 副 ふく 提 ひさげ 學 がく )에 임명되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2]
1549년 (명종 3)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 ぜんらどう 都 と 觀察 かんさつ 使 し ), 1551년 (명종 5) 경기도 관찰사(京畿 けいき 都 と 觀察 かんさつ 使 し ), 1556년 (명종 11) 함경도 도관찰사(咸鏡道 どう 都 と 觀察 かんさつ 使 し ) 등의 외직을 거쳐 1558년 (명종 13) 공조판서(工 こう 曹判書 しょ )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도총관(都 と 摠管)을 겸했으나, 같은 해 병으로 사직을 청해 지중추부사(知 ち 中樞 ちゅうすう 府 ふ 事 ごと )로 체직되었다.
1561년 (명종 15) 졸했다. 향년 65세.[ 3] [ 1]
1799년 (정조 23) 정민(貞敏 さだとし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이 있기 전의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3자를 썼다는 설이 있다.
《류진동 선생 묘 및 신도비 》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에 있다. 1991년 6월 25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증조 - 류열(柳 やなぎ 悅 えつ )[ 1] : 북부령(北部 ほくぶ 令 れい ), 증(贈 おく ) 좌승지(左 ひだり 承 うけたまわ 旨 むね ), 류겸 (柳 やなぎ 謙 けん )의 아들
조부 - 류자문 (柳子 りゅうこ 文 ぶん ) : 숙천도호부사(肅川都 みやこ 護 まもる 府 ふ 使 し ), 증 예조참판(禮 れい 曹參判 ばん )
아버지 - 류한평(柳 やなぎ 漢 かん 平 たいら )[ 1] : 진사(進士 しんし ), 증 우참찬(右 みぎ 參 さん 贊 さん )
어머니 -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 けい 尙左道 どう 水軍 すいぐん 節度 せつど 使 し ) 홍귀해(洪 ひろし 貴 き 海 うみ )의 딸[ 1]
전처 - 별제(別 べつ 提 ひさげ ) 김흥문(金 きむ 興 きょう 門 もん )의 딸[ 1]
장남 - 류도 (柳 やなぎ 濤, 1520년 ~ 1573년 ) : 동부승지(同 どう 副 ふく 承 うけたまわ 旨 むね )
차남 - 류용(柳 やなぎ 溶)[ 1] : 경원도호부사(慶 けい 源 げん 都 みやこ 護 まもる 府 ふ 使 し ), 증 병조판서(兵曹 へいそう 判 ばん 書 しょ ), 류형 (柳 やなぎ 珩, 1566년 ~ 1615년 )의 아버지
3남 - 류회(柳 やなぎ 淮)[ 1] : 청하현감(淸河 きよかわ 縣 けん 監 かん ), 증 이조참판(吏曹參 さん 判 ばん ), 류림 (柳 やなぎ 琳, 1581년 ~ 1643년 )의 아버지
첫째 사위 - 정척 (鄭 てい 惕, 1517년 ~ 1596년 )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 ちゅうすう 府 ふ 事 ごと )
후처 - 판결사(判決 はんけつ 事 ごと ) 윤형 (尹 いん 衡)의 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