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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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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마씨
木川きがわうま
나라한국
관향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시조마려(うまはじむ)
중시조마경수(うま坰秀)
집성촌개성시
주요 인물마희상, 마희경, 마사종, 마상원, 마현겸, 마격, 마성하, 마맹하, 마지휘, 마사인, 마유, 마한량, 마해송, 마종기, 마광수
인구(2015년)2,586명

목천 마씨(木川きがわうま)는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마려(うまはじむ)는 백제의 개국공신이다. 중시조 마경수(うま坰秀)가 고려조에 평장사(たいらあきらごと)에 오르고 신정군(新定しんじょうくん)에 봉해졌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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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마려(うまはじむ)는 백제 개국공신이다.[1] 《삼국사기(さん國史こくし)》 제23권 백제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마려(うまあかざ), 오간(がらす) 등 10인이 고구려 동명왕(ひがし明王みょうおう)의 셋째 아들 온조(ゆたか祚)를 인도하여 졸본부여(そつほん扶餘)를 피해 남하해서 위례성을 도읍(都邑とゆう)으로 백제를 건국하고 온조(ゆたか祚)를 왕(おう)으로 받들었다.[2]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かいこく元勳げんくん) 마려(うまはじむ)에게 좌보(ひだり輔)의 벼슬을 내렸다.[3]

중시조 마경수(うま坰秀)는 고려조에 평장사(たいらあきらごと)에 오르고 신정군(新定しんじょうくん)에 봉군되었다.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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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때의 마점중(うまうらないちゅう)의 장남 마현(うま鉉)이 목천 마씨(木川きがわ うま), 차남 마혁인(うま爀仁)이 장흥 마씨(ちょうきょう )로 나누어졌다. 목천 마씨 과거 급제자들의 거주지가 대부분 개성(開城かいじょう)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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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은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일대이다.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たいぼくたけぐん)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록군(大麓だいろくぐん)으로 고쳐 금지현(金池かないけけん)과 순치현(馴雉けん)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목주(しゅう)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청주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하여 연기현(つばめ岐縣) 감무를 겸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목천현(木川きのかわけん)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별호(べつごう)는 신정(新定しんじょう)이다. 1895년(고종 32) 목천군으로 개편되었으나 1914년 목천면으로 축소되어 천안군에 편입되었다. 2002년 1월 1일 목천면이 목천읍으로 승격했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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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경수(うま坰秀) : 고려 평장사(たいらあきらごと) 신정군(新定しんじょうくん)
  • 마희원(うままれとお) : 마경수의 아들. 고려조에 목사(まき使)를 지냈다. 안동 김씨(安東あんどうきむ) 안렴사(按廉使) 김사렴(かねれん)의 사위.
  • 마희상(うま羲祥) : 마경수의 8대손. 호 괴당(えんじゅどう). 효심이 지극하고 성격이 결백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후릉참봉(あつりょうさんたてまつ)에 임명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이이(珥)가 가전효우학관천(家傳かでん孝友たかともがくぬきてん)이라는 시를 지어 그를 칭찬했다.
  • 마희경(うま羲慶, 1525년 ~ 1589년) : 자()는 중적(なかつもる), 호는 죽계(たけけい). 서경덕(じょはな潭)의 문하(門下もんか)에서 수학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581년(선조 14년) 율곡(栗谷くりや) 이이(珥)가 효렴(こうれん)으로 천거하여 북부 참봉(北部ほくぶさんたてまつ)에 임명되었으나, 사은(謝恩しゃおん)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양 유후(平壤ぴょんやんとめ)로 있던 월정(つきなぎさ) 윤근수(いんことぶき)가 마희경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말하기를, “그윽한 난(らん)이 골짜기에 있으니 향기는 절로 사람에게 다가든다.” 하여 그의 학문을 높이 칭송하였고, 이어 상종하며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로부터 이곳에 부임하는 여러 관원 및 동서로 가는 사대부는 너나없이 마희경의 집을 찾아 예(れい)를 하였다. 좌의정 박세채(ほおさい)가 그의 묘갈명을 작성하였다.[4]
  • 마사종(うま嗣宗) : 호는 낙포(らく圃). 조부는 마희경(うま羲慶)이고, 부는 마덕룡(うまいさおりゅう)이다. 오음(梧陰) 윤두수(いんことぶき)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つきなぎさ) 윤근수(いんことぶき)가 “문학으로는 세상에 마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にしぎょう)의 아유(みやび儒)다.”라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또 주자(朱子しゅし)의 가례(いえれい)가 현실에 맞지 않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조선 고유의 예법(禮法れいほう)을 정립하였다. 저서로 『오륜통의(五倫ごりん通義みちよし)』, 『사례비요(よんれい備要)』가 있다.
  • 마상원(うま尙遠, 1573년 ~ ?) : 자는 이중(而重). 호는 팔해(はち垓). 조부는 마희상(うま羲祥)이고, 아버지는 성균진사(なりひとし進士しんし) 마여룡(うまなんじりゅう)이다. 1606년(선조 39) 증광시 진사(進士しんし) 2등 1위로 합격하였다. 당시 문장이 뛰어나 동방문사(東方とうほう文士ぶんし)로 일컬어진 차천로(くるまてん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りょうくるまいちうま)’로 불렸다.
  • 마현겸(うまげんけん, 1631년 ~ ?) : 진사 마상원의 손자. 자는 천휘(てん撝). 1654년(효종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58년(효종 9) 교서관정자(こうしょかん正字せいじ)를 지냈고, 이후 성균관전적(なりひとしかん典籍てんせき)을 역임했다.
  • 마격(うまかく, 1647년 ~ ?) : 169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숙종 22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박사(こうしょ博士はかせ), 장수찰방(ちょうみず察訪), 성균관 전적(典籍てんせき), 개성교수(開城かいじょう敎授きょうじゅ)를 역임하였다.
  • 마성하(うまきよしかわ, 1686년 ~ ?) : 1714년(숙종 40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판관(くん鍊判かん), 도총도사(摠都ごと), 산산 첨사(蒜山ひるぜん僉使)를 지냈다.
  • 마맹하(うまはじめかわ, 1701년 ~ ?) : 자는 군범(きみはん). 증조부는 병자호란(へい胡亂うろん) 때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きゅうじゅ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ちゅうすうごと)에 오른 마인호(うまひとしひろし)이고, 조부는 마상달(うま尙達)이며, 부는 학생(學生がくせい) 마황(うま榥)이다. 외조부는 이덕형(いさおかおる)이고, 처부는 임전(はやし㙉)과 김리복(きむくつふく)이다. 1727년(영조 3) 증광시 진사(進士しんし)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권지(なりひとしかんけん)가 되고, 1747년(영조 23) 식년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학유(がくさとし)를 지냈다.[5]
  • 마지휘(うま徽, 1725년 ~ ?) : 마맹하의 아들. 1756년(영조 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じきこう)을 지냈다.
  • 마사인(うまおもえひとし, 1755년 ~ ?) : 아버지는 생원 마지락(うまらく)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생원 이호겸(こうけん)의 딸이다. 1780년(정조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 사변가주서(事變じへんかりちゅうしょ), 함경도사(咸鏡ごと)를 거쳐 1790년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796년 예조좌랑(れい曹佐ろう), 1797년 황해도사(黃海こうかいごと)를 역임하였다.
  • 마유(うまゆう, 1759년 ~ ?) : 1798년(정조 22년) 식년시(式年しきねんためし) 진사(進士しんし) 3등에 합격하여 분교관을 거쳐 중부령을 지냈다.
  • 마한량(うま翰良, 1793년 ~ ?) : 마지휘의 증손. 1836년(헌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てのひられい)을 역임하였다.
  • 마해송(うま海松みる, 1905년 ~ 1966년) : 아동문학가. 수필가.
  • 마웅호(うまつよしごう, 1920년 ~ ?) : 녹십자의료공업 회장
  • 마종기(うま鍾基, 1939년 ~ ) :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시인.
  • 마석일(うますずいち, 1939년 ~ ) : 인하대학교 섬유공학과 교수. 인하대학교 부총장.
  • 마광수(うまひかり洙, 1951년 ~ 2017년)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마상준(うましょうなずらえ, 1964년 ~ ) :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석연구
  • 마경섭(うまきょう燮, 1965년 ~ ) : (주) 한국항공우주산업 まえ 운영그룹장 (COO), まえ 경영전략부문장.

과거 급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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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마씨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33명을 배출하였다.[6]

문과

마격(うまかく) 마계변(うまつぎ卞) 마맹하(うまはじめかわ) 마사인(うまおもえひとし) 마지휘(うま徽) 마한량(うま翰良) 마현겸(うまげんけん)

무과

마성하(うまきよしかわ) 마지진(うますすむ)

생원시

마격(うまかく) 마계변(うまつぎ卞) 마지경(うま烱) 마지광(うまひかり) 마지락(うまらく) 마행규(うまこう逵) 마희경(うま羲慶)

진사시

마경하(うまけいかわ) 마맹하(うまはじめかわ) 마사의(うまおもえよし) 마상원(うま尙遠) 마속(うま涑) 마여룡(うまなんじりゅう) 마연(うま沇) 마용하(うまりゅうかわ) 마유(うまゆう) 마윤하(うまじゅんかわ) 마준근(うま駿しゅん) 마지량(うまりょう) 마지선(うまぜん) 마지임(うまにん) 마징하(うまちょうかわ) 마태하(うまやすしかわ)

음관

마한량(うま翰良)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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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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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1,225가구 5,234명
  • 2000년 941가구 2,982명
  • 2015년 2,586명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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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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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국사기(さん國史こくし)》 제23권 백제본기
  2. 백제 십제공신(じゅうすみ功臣こうしん)은 마려(うまあかざ), 오간(がらす), 전섭(ぜん), 을음(おつおん), 해루(かい婁), 흘간(屹干), 한세기(かん), 곽충(かくただし), 범창(笵昌), 조성(ちょうしげる)이다. 전섭(ぜん)은 전(あきら)씨의 시조, 조성(ちょうしげる)은 직산 조씨의 시조이다.
  3. ““목천 마씨·천안 전씨는 백제 위례성이 직산이라는 흔적””. 일요신문. 2018년 3월 28일. 
  4. 국조인물고 권49 마희경
  5. 마맹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6. 목천 마씨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