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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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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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
임기 | 1948년 9월 9일 ~ 1953년 9월 9일 |
주석 | 김두봉 북조선 국가원수 |
총리 | 김일성 북조선 총리 |
이름 | |
별명 | 호( 필명 홍가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8년 5월 23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괴산군 |
사망일 | 1968년 3월 5일 | (79세)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노환으로 병사 |
경력 | 소설가 출신 정치인 조선로동당 명예대표고문위원 |
정당 | 조선로동당 |
부모 | 홍범식(부) 은진 송씨 부인(모) 조경식(계모) |
배우자 | 여흥 민씨 부인 |
자녀 | 3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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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 |
종교 | 없음(무신론) |
홍명희(
생애
[편집]생애 초반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홍명희는 충청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괴산 홍범식 고가)에서 출생하였으며[3],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으며 지난날 한때 충청도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3]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로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
홍명희의 증조부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
1900년에 참판 민영만(閔泳
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편집]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함. (부친은 법학을 하길 바랬으나 문학을 더 좋아함.)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
1910년 8월 29일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10] 그가 부친상 중인 1911년 4월에 일본 문예지에 게재한 일본어 단편 소설 "유서"가 근래 발굴되었다.[11]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12]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13]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14]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15]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등의 업적도 남겼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의하면 맑스주의를 공부한다며 원서를 읽고, 가와카미 하지메(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었는데, 임꺽정 저자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 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 은둔생활을 지냈다.
1941년에 임전대책협의회(
광복 이후
[편집]사회운동
[편집]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21]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개선환영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22] 또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23]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23]
1945년 12월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월 29일 서울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역설했다.[24] 김구와 임시정부 측이 신탁통치안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면서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29]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이후로도 민주통일당(
단정수립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
[편집]1947년 11월 총선 실시 및 감시를 위해 입국하는 UN위원단 환영대회에 명예회장 이승만, 회장 조소앙에 이어 부회장으로 참여하였다.[31]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32]
그는 1945년 12월 김일성(
홍명희는 김구 등의 방북 직전인 1948년 2월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왔다고 하는데,[37][38] 소련군의 군사위원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혀졌다.[39]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은 때 방북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눌러 앉았다.[40][41]
북한에 남은 홍명희는 몇달 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남한과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는 대남방송을 하였다.[4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정치활동
[편집]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44],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조소(
김일성이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러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그도 부수상 자격으로 동행하였고, 당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46][47][48] 스탈린은 당시에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군이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그후로 김일성은 무려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49] 번번이 거절하던 스탈린은 중국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는 등 상황이 유리하게 변하자 마지 못해 1950년 1월 30일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런 일들은 부수상이었던 홍명희도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고 이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6.25 남침 개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으므로[50][51] 그도 주요 6.25 전범 중의 한 명이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발표했다. 이미 그 이전인 1949년 5월 13일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가 조직되어 남한 토지개혁 준비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는데, 홍명희가 그 위원장을 맡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의 토지개혁 법령안을 만들었다.[52] 이런 것들은 그가 일찍부터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 9월 김정숙이 죽자 김일성(
대부분의 월북 문인들이 숙청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만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이러한 김일성과의 유착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여러 문인들의 숙청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적극적으로 변호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근로자"지에 《김일성 장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며 조직자이다》라는 글을 써서 전범 김일성을 찬양한 바도 있다.[57]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는 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44]
1961년 5월 13일 부수상 홍명희가 위원장이 되어 북한의 각 정당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대남 정치공세를 펼쳤다.[58]
올림픽 위원장(
대남 적대 활동에 간여
[편집]북한에 아무 기반도 없었고, 공산주의 활동을 맹렬히 한 전력도 없던 홍명희가 1948년 4월 월북 직후 부수상이라는 최고위직에 발탁된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인사로 보인다. 하지만 이면에는 그가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북한에 포섭되어[34] 남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활동을 주로 했고,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을 성사시키고, 동행한 400여명의 인사중 70여명이 북한에 눌러앉게 하여[61] 아직 정부 출범도 못한 남한의 우파 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남북협상 찬반으로 남한내 갈등을 조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로 보인다. 당시 남으로 귀환하지 않은 70여명은 방북후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처음부터 북한을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62]
홍명희의 아들과 비서가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남 공작에도 적극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남 홍기무(
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
爲 堂 鄭 寅 普 ) 선생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 良 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64][65]
홍기무는 6.25 당시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당 연락부장 이주상(
위당의 셋째 아들이자 홍기무의 처남 정흥모(
홍명희의 차석 비서 김원철(
6.25 와중에 그의 고모부 조완구(
6.25 전후로는 전쟁 준비와 수행에 적극 협력하여 전쟁에 대한 책임이 상당하다. 휴전 이후로는 1961년 5월 13일 부수상이었던 그가 위원장이 되어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그가 간여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의 제자로 알려진 이구영(
사후
[편집]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60]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기념문학비 건립
[편집]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가계
[편집]- 증조부 : 홍우길(
洪 祐吉 , 1809~1890), 이조판서 역임
- 처 : 여흥 민씨(驪興 閔氏, 1885~1953) : 민영만(閔泳
晩 , 1863~1916)[6]의 딸[1][72][73]- 장남 : 홍기문(
洪 起 文 , 1903~1992) :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부원장 - 장자부 : 덕수 이씨
- 차남 : 홍기무(
洪 起 武 , 1910~?) : 초명 기은(起 殷 )[1].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피체 투옥되었다 6.25때 탈출하여 월북함.[64][63] - 차자부 : 정경완(
鄭 庚 婉 1920~?), 정인보의 둘째 딸[54][64]- 손자 : 홍석우
- 손자 : 홍석주
- 손녀 : 홍석매(1957~)[75]
- 3남 : 홍기하(
洪 起 夏 , 1919~1920)[76][77] - 장녀 : 홍주경(
洪 姝瓊, 1921~?) - 차녀 : 홍무경(
洪 茂 瓊, 1921~?) - 3녀 : 홍계경(
洪 季 瓊, 1926~?)[78]
- 장남 : 홍기문(
1950년 1월 15일 그의 딸 홍영숙(
홍명희의 조부 홍승목(
참고 문헌
[편집]-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 박병엽(
朴 炳燁, 1922 ~ 1998)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제4장 홍명희의 월북" -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주간조선 2373호] 2015.09.07
- 강영주 : 자료정선. 홍명희,『학창산화(
學窓 散 話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pdf) - 홍주경(
洪 姝瓊); 홍무경(洪 茂 瓊) 공저(共著 ), 『조선 의복·혼인제도의 연구(朝鮮 衣服 ·婚姻 制度 의硏究 )』 서울: 을유문화사(乙 酉 文化 社 ), 1948년.
- 홍명희의 쌍둥이 딸이 1948년 월북 직전 서울에서 간행한 저서
홍명희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같이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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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풍산홍씨 대동보 문경공계 추만공파 (풍산홍씨대동보간행위원회, 1985) 3권 pp.593~594 (page597)
- ↑ ㄱ독립운동가강신욱 기자 (2009년 7월 25일). “<NEWSIS FOCUS>고향서 외면당하는 벽초 홍명희”. 뉴시스. 2009년 10월 19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신문로) 벽초 홍명희, 그 진실과 화해(신명식 2009.03.05)[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내일신문 2009-03-05일자
- ↑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
洪 和 輔)는 영안위 홍주원의 4촌 동생 홍주문(洪 柱 文 )의 증손이다. 풍산홍씨족보豊山 洪 氏 族 譜 , 1933, 권 1 p.74 - ↑ 가 나 송종면(
宋 鍾冕)|응옥(凝 玉 ) / 음관|왕대미상(未 詳 ) 년 문음진신보(文 蔭 縉紳 譜 ) Archived 2017년 4월 9일 - 웨이백 머신
송종면(宋 鍾冕) / 문과|고종(高 宗 ) 26년 (1889) 알성시(謁聖試 ) Archived 2017년 4월 9일 - 웨이백 머신 - ↑ 가 나 민영만(閔泳
晩 , 1863~1916) : 고종(高 宗 ) 28년(1891) 신묘(辛 卯 ) 증광시(增 廣 試 ) 병과(丙 科 ) 25위 Archived 2017년 4월 9일 - 웨이백 머신 문과방목 - ↑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30
- ↑ 여흥민씨파계보. 상-하 (서울, 여흥회, 1988) : 삼방파(
三 房 派 ) 하권 pp.311~312
항일(抗日 )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Archived 2017년 4월 15일 - 웨이백 머신 조선닷컴 2015-10-08 - ↑
首席 占領 皇 城 新聞 1909년 6월 9일 ●首席 占領 :日本 留學生 洪 命 憙(年 二 十 二 )氏 去 光武 十 一 年 三 月 에東洋 商業 豫 科 第 二 學年 을終了 고私立 大成 學校 第 三 學年 에編入 야成績 이好 더니今 에五 年 級 首席 을占領 얏다고日本 某 報 에 該氏의寫眞 을添附 揭載 얏더라. - ↑ (단독)소설「임꺽정」홍명희 자필 편지 4통 경북 안동서 발견 중앙일보 2018.02.19
- ↑ 홍명희가 일본어로 쓴 단편소설 '유서' 발굴 연합뉴스 2016/08/03
벽초 홍명희의 일본어 단편소설 ‘유서’ 발굴 경향신문 2016.08.03 - ↑
騷擾 事件 의後 報 , 충청북도槐 山 , 자세한 후보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每日 申 報 1919-03-24 03면 02단
騷擾 事件 의後 報 , 충청북도槐 山 , 주모자 체포됨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每日 申 報 1919-03-25 03면 03단
學生 은放 還 , 주모자는 오인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每日 申 報 1919-03-26 03면 07단
槐 山 事件 首魁 , 공소하여 감형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每日 申 報 1919-05-28 03면 06단 - ↑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26페이지
- ↑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27페이지
- ↑ 동아일보, 임시주주 총회에서 사주 김성수는 동아기자단과 군소주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신간부 조직(제4대 사장 : 이승훈. 주필 겸 편집국장 : 홍명희) Archived 2017년 4월 21일 - 웨이백 머신 1924년 5월 14일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근대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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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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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 은常任 委員 ) ▲洪 命 憙 ..▲洪 南 杓 ▲朴 憲 永 등 포함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 1945년 12월 31일 동아일보 1946년 1월 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洪 命 憙, ...洪 南 杓 朴 憲 永 金 若水 ..南北朝鮮 ,左右 一致 ,行動 方針 을討議 決定 ,反 託 總動員 中央 委員 會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첫번째 홍명희 - ↑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 ↑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1945년 12월 31일)
- ↑ 기고문 "1947년의 조선 정국과 나의 지향" 중 "
五 年間 信託 못치르랴" /洪 命 熹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民主 衆 報 1947.01.01 - ↑ 여운형 장례식 거행 1947년 8월 3일 (조선일보 1947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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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 統一 黨 組織 ,洪 命 熹氏中心 으로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6.08.20
日 帝 惡法 과彷彿 ,立法 意圖 는 奈邊에,民主 統一 黨 洪 命 熹氏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朝鮮 中央日報 1947.09.21
民 獨 黨 中執 委員 洪 命 熹氏等 選定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獨立 新報 날짜 1947-10-22
黨 代表 洪 命 憙氏,民主 獨立 黨 部署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7.11.01
民 獨 黨 대표에洪 命 憙씨 1947년 11월 1일 - ↑ UN
委員 團 歡迎 大會 ,國 議 主催 로擧 族 的 으로開催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독립신문 1947.11.30 - ↑
單 政 은 抵死反對 , 차라리軍政 의賛成 할지언정,洪 命 熹氏의時局 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朝鮮 中央日報 1947.11.22
金 九 先生 에敬意 ,民 獨 黨首 洪 命 憙氏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朝鮮 中央日報 1948.01.31
洪 命 熹氏談 ,南北 統一 爲 하야 끝까지鬪爭 하겠다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朝鮮 中央日報 1948.03.04
洪 命 憙氏絶叫 ,可能 한地域 云云 의單 選 ,政權 慾 아니면欺瞞 策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獨立 新報 1948-03-23 - ↑
金 日成 武 丁 將軍 ,入國 歡迎 會 를準備 Archived 2017년 4월 10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5.12.18金 日成 ,武 丁 두 장군과獨立 同盟 入京 환영준비 자유신문 1945년 12월 21일 - ↑ 가 나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서울: 중앙일보사, 1993), 하권 pp.212~223. 해방 후 홍명희의 정치활동과 북한과의 연결에 대한 서용규(북한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 박병엽의 가명)의 증언이 자세히 나온다.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Archived 2018년 12월 14일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한국국가정보학회 2010-08-17)
양동안, 해방공간에서의 남북한 정보·정치공작 활동 2010-02-23 한국국가정보학회 학술세미나 발표문 - ↑ 홍남표(
洪 南 杓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61 중앙일보 1990.01.26 종합 3면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 ↑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한국국가정보학회 2010-08-17)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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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橋 莊 (경교장) 방문, 김구와 요담 1948.03.18 경향신문 1면 - ↑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 각본 -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1면
<평양의 4김회담>1. 레베데프 비망록 - 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2.金 九 올 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2. <해설>蘇 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3.蘇 ,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4.白 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5.蘇 朴 憲 永 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6.蘇 南 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 약속 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7. 끝 조만식南 行 白 凡 요구에金 日成 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손세일 전 국회의원, 김구는 북한 가서 대체 뭘 했나? Archived 2017년 4월 24일 - 웨이백 머신 조선 Pub 2014-11-07 - ↑
洪 命 憙氏北 行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민중일보 1948.04.21單 選 單 政 反對 가目標 ,民族 勝利 爲 하야鬪爭 ,金 九 ·洪 命 憙·趙 素 昻氏熱辯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獨立 新報 1948.04.24
洪 氏 等 諸 代表 黃海 製鐵 視察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獨立 新報 1948.04.28
燦爛 한北朝鮮 의發展 , 오직建設 이 있을 뿐,洪 命 憙氏等 北朝鮮 印象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獨立 新報 1948.05.05
洪 命 熹氏와李 克 魯氏殘留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민주중보(民主 衆 報 ) 1948-05-08 - ↑ 가 나 장세윤, 벽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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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李 仁 ), 「나의 교우 반세기(交友 半 世紀 )」, 『신동아(新 東亞 )』 1974년 7월호 (東亞日報 社 ) pp.283~284 - ↑
洪 命 熹氏放送 內容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朝鮮 中央日報 194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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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 Archived 2017년 3월 18일 - 웨이백 머신 우리 역사 넷 : 사진 설명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박헌영 옆에 있는 앞줄 맨 오른 쪽이 부수상 홍명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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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 (소)에借款 要求 (차관요구)北韓 代表 派遣 (북한대표파견) 1949.03.06. 동아일보 1면
北韓 代表 團 訪 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부산民主 衆 報 194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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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사 제1집 - 전쟁의 배경과 원인 Archived 2017년 3월 25일 - 웨이백 머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 編纂 委員 會 ) 2004 : p.607~608 군사위원회 조직 - ↑ 북한연표 해설목록 : 한국전쟁 발발 한국사데이타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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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 命 熹) 맏딸과 김일성(金 日成 ) 재혼(再婚 ) 연합신문(聯合 新聞 ) 1950.01.25
김일성(金 日成 )이 재혼(再婚 ), 홍명희(洪 命 熹) 맏딸 영숙(永 淑 )과 자유신문 1950년 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 日成 ) 재혼(再婚 ) 한성일보(漢 城 日報 )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 )의 백일몽(白日 夢 ) 치열화(熾烈 化 )한 반소반공운동(反 蘇 反共 運動 ) 1950.01.25. 경향신문 2면
김일성(金 日成 )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 玉 姬 ),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金昌順 著 ,歷史 의證人 (서울,韓國 亞細亞 反共 聯盟 ,檀 紀 4289 (1956) : 홍명희의 둘째딸이 김일성과 결혼했다고 함. - ↑ 가 나 다 김일성-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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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벽초 홍명희에 특별예우 / 중책 주고 세간살이 보내줘 며느리,北 통일신보에 소개 벽초,本紙 에 ‘임꺽정’ 연재 조선일보 2004.02.11 A26면 -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10 중앙일보 1990.05.28 종합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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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홍명희(洪 命 憙), 남북간 내왕 촉구 담화 발표 1964년 10월 30일 :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년 - ↑ 북한올림픽위원장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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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올림픽위원장 홍명희(洪 命 憙), 동경올림픽 불참 관련 담화 1964년 10월 10일 :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년 - ↑ 가 나 홍명희사망(
洪 命 熹死亡 ) 1968.03.06. 경향신문 2면
북괴인민부상위장(北 傀人民 副 常 委 長 ) 홍명희사망(洪 命 憙死亡 ) 1968.03.06. 동아일보 1면 - ↑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Archived 2018년 12월 14일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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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 金 氏 이미降服 』北朝鮮 의謀略 宣傳 Archived 2018년 6월 8일 - 웨이백 머신 현대일보 [現代 日報 ] 1948년 4월 15일 2면 : 김구와 김규식이 방북하기도 전에 북한에서는 이미 그들이 항복했다고 하고, 이승만도 머지않아 항복한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유어만(劉 馭萬) 중국 총영사의代 電 제119호 (1948년 4월 20일) : "2김과 가까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번 북상한 1-2백 명 가운데 대부분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나머지는 2주일 정도 뒤漢 城 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 ↑ 가 나 홍기무(
洪 起 武 ) 등 기소 자유신문 1949년 12월 25일
괴뢰(傀儡 ) 앞잡이 홍명희(洪 命 熹) 아들 등(等 ) 송청(送 廳 ) 1949.12.25 경향신문 2면 : 이북 괴뢰집단 부수상 홍명희(洪 命 熹)의 둘째아들 대의사 홍기무(洪 起 武 )와 번일병(憣一炳)외 3명
민국(民 國 )의 기밀(機密 )을 노리는 제오열(第 五 列 )에 주의(注意 )하자 1950.02.16 경향신문 2면 - ↑ 가 나 다 라 D-story 44 : 조선의 3대 천재와 동아일보-홍명희 편(3) 2010.08.09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 차남 홍기무(
洪 起 武 )는 위당 정인보의 사위인데,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6.25 때 장인 위당을 납북했다.
D-storyⅡ 100 : 납북된 동아일보 인사들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6월 - 19 - 2013 - ↑ 가 나 정양모(
鄭 良 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부친 정인보 납북 당시 일에 대한 증언 (동영상)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 게시일: 2013. 12. 11. - ↑ 한상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인사들의 북행길과 삶의 모습 Archived 2017년 4월 26일 - 웨이백 머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제32회 콜로키움 자료집 p.8" (2014년 5월 22일)
김효선,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한국논단 2009년 8월호
김효선, 국회 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의 운명 NewDaily 2012.06.25
이태호(李 泰 昊 ) 저 / 신경완 증언(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압록강변의 겨울』 (다섯수레, 1991) p.16 - ↑ 괴뢰(
傀儡 ) 부수상 홍명희(洪 命 희) 비서(秘 서) 김원철(金元 哲 )을 체포문초(逮捕 問 招) 1950.11.20 동아일보 2면死亡 者 (사망자)만十 (십)일만餘 名 (여명) : 홍명희의 비서 김(金元 哲 )을 체포 1950.11.16 동아일보 2면
합동수사본부, 홍명희 비서 김원철 체포 1950년 11월 20일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대한민국사연표 - ↑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 ↑
間諜 李 九 榮 死刑 求刑 국제신보 1958.12.03 (1판2면) - ↑ 간첩 이구영(
李 九 榮 )에도死刑 求刑 - 부산일보 1958-12-03 - ↑ 장세윤, 벽초(
碧 初 ) 홍명희(洪 命 熹)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5집 (독립기념관, 2000.12) p.348
김승환(金 昇 煥),「벽초 홍명희의 문학사상」,『민족문학사연구』, 제13호(1998년 12월) pp.295-296 - ↑ 가 나 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148
- ↑
北 김일성 - 홍명희家 에 얽힌 비화 연합뉴스 2004.02.10 : 둘째 며느리 정경완이 시모 민씨가 시부 홍명희보다 15년 먼저 졸했다고 함. - ↑ 홍석형 계획재정 부장이 중국 스파이? 자유 아시아 방송 (RFA) 2011-10-10
- ↑ “[CJ Kang 방북기54]우연히 만난 홍명희, 정인보 선생의 자손들”. 《NK투데이》. 2015년 10월 2일.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 ↑ “한국사 콘텐츠”. 2018년 4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 ↑ 홍원표. “민족의 비극과 저항에 관한 이야기: 홍명희의 삶과 『임꺽정』” (PDF).
- ↑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주간조선 >”.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 ↑ “6.25
北 (북)에서 본證言 (증언) <16> 제4부開戰 準備 (개전준비) 진행 (1949년)”.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 ↑ 김창순 (1956). 《
歷史 의證人 》. 한국아세아반공연맹. - ↑ 풍산홍씨직파연보도(
豐山 洪 氏 直 派 年譜 圖 )
외부 링크
[편집]- 옛 자료로 읽는 인물 근대사 〈2〉 홍명희(
洪 命 熹) : “〈임꺽정〉, 조선에서 옥중작의 첫 기록” 월간조선 2020년 4월호 - 홍명희(
洪 命 熹), "지조를 꺾지않은 조선의 ‘3대 천재’, 〈임꺽정〉을 연재하다" : 이송순 한국사 콘탠츠 - 홍명희(
洪 命 熹), 일괴열혈(一塊 熱血 ) 대한흥학보(大韓 興 學 報 ) 제1호 1909년 3월 20일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1948년 조선연감의 홍명희(
洪 命 熹)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의 홍명희(
洪 命 熹) 1930-12-12 - 벽초문학비건립과정을 정리한 웹사이트
- 벽초 홍명희선생 생가를 안내하는 한국관광공사 웹사이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월간 작은책 기사 〈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의 삶〉
전임 (초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1대 부총리 (박헌영, 김책과 공동)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
후임 박헌영, 홍명희 |
전임 박헌영, 김책, 홍명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부총리 (박헌영, 최창익과 공동) 1951년 1월 30일 ~ 1953년 3월 31일 |
후임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
전임 박헌영, 홍명희, 최창익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대 부총리 (김일, 박창옥, 최창익과 공동) 1953년 3월 31일 ~ 1956년 9월 |
후임 홍명희, 김일 |
전임 김일,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4대 부총리 (김일과 공동) 1956년 9월 ~ 1957년 9월 20일 |
후임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
전임 홍명희, 김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5대 부총리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과 공동) 1957년 9월 20일 ~ 1958년 10월 |
후임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
전임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6대 부총리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과 공동) 1958년 10월 ~ 1962년 10월 23일 |
후임 김광협, 김창만, 남일, 리종옥, 리주연, 정일룡, 정준택 |
전임 (없음)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 1953년 |
후임 홍명희 이극로 |
전임 홍명희 |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극로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
후임 김원봉 |
전임 김원봉 |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극로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
후임 홍명희 박금철 |
전임 홍명희 리극로 |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박금철과 공동) 1961년 3월 25일 - 1968년 |
후임 최용건 |
전임 (없음)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1948년 - 1953년 |
후임 홍명희 이극로 |
전임 홍명희 |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리극로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
후임 김원봉 |
전임 김원봉 |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리극로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
후임 홍명희 박금철 |
전임 홍명희 리극로 |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박금철과 공동) 1961년 3월 25일 - 1968년 |
후임 최용건 |
전임 여운형 |
진보정당 당수 1947년 7월 - 1948년 4월 |
후임 장건상 |
- 홍명희
- 1888년 출생
- 1968년 사망
- 공산주의자
- 한국의 통일운동가
-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
- 한국의 사회주의자
-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 일제강점기의 작가
- 일제강점기의 저술가
-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신간회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한국의 군정기
- 한국 전쟁 관련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저술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신론자
-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 월북자
- 근로인민당
- 풍산 홍씨
- 괴산군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