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
보부상(褓負
기원[편집]
보부상은 삼국시대 이래 농업생산자·가내 수공업자(
보부상의 길드적 성격[편집]
길드는 배타적인 자격 요건과 내부 서열, 독점적 상행위 권리를 특징으로 한다. 부상(
보부상단은 일반적으로 몇 개의 군·현을 묶어 각 지점의 관할단위로 삼아 임소(
다음은 이들의 길드적 성격을 보여주는 내부 상규이다.
- 환난상구(患難
相 救 ) :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는 뜻으로 행상들이 무뢰배나 지방관의 사적 갈취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 조동모서(
朝 東 暮 西 ) : 아침에 동쪽 저녁에는 서쪽이라는 뜻으로, 근면성실히 일하며 서로 같은 소속임을 잊어선 안됨을 재차 확인시키는 항목이다. - 병구사장(
病 救 死 葬 ) : 일면식이 없을지라도 객지에서 급병으로 드러누운 보부상을 보거든 돕고, 혹시 객사한 보부상을 발견하거든 반드시 묻어줘야 한다.
조선 전기 부보상[편집]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건국과 더불어 부보상이라는 명칭을 하사한다.[7] 건국된 이후, 이성계는 보부상들의 공로를 인정해 각종 행상권을 전담시켰으며 독점적인 전매권을 보장해줬다.[8] 보부상들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평화시에는 장사를 했고 전시에는 군량수송의 중요임무를 도맡았다.[8]
조선 중기 이후 주요 연혁[편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행주산성의 권율에게 양식을 조달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 안으로 양곡을 조달했다.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했다. 보부청(褓負
1883년(고종 20년) 대원군 일파가 쫓겨나고 정부 조직이 일신되면서 혜상공국(
1885년(고종 22년) 혜상공국은 상리국(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엄순영(
1898년(광무 2년) 황국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보부상 관리의 업무는 혜상공국에서 황국협회로 이관되었다.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여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되었다.
1899년(광무 3년) 상리국의 좌·우단은 상무사(
같이 보기[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 울산 보부상단 문헌자료 (울산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각주[편집]
- ↑ 표준국어대사전
- ↑ 한성부완문(
漢 城府 完 文 ): 1879년(고종 19년) 발행 - ↑ 황해도 토산현(
兎 山縣 ) - ↑ 어염(
魚 鹽 ): 생선과 소금 - ↑ 수철(
水 鐵 ): 무쇠의 이두식 표기 - ↑ 역사속 경제위인 - 보부상과 백달원(하) 아하경제 2011년 1월 16일 기사
- ↑ “부보상, 한국의 전통행상”. 조선닷컴. 2010년 5월 28일. 2016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4월 19일에 확인함.
- ↑ 가 나 “[
金 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 건국과 멸망의 주역이었던 상인, 보부상”. 아시아경제. 2017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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