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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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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扶餘じょ
나라한국
관향충청남도 부여군
시조부여융(扶餘たかし)
원시조온조왕
중시조서존(じょそん)
집성촌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평안남도 개천군
주요 인물서익, 서필원, 서성, 서승진, 서민석
인구(2015년)17,145명
비고서씨일가연합회

부여 서씨(扶餘じょ)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たかし)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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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たかし)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とう)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きむむらさきこう祿ろく大夫たいふ)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ひょうぶ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たいげんくん)에 봉해진 서존(じょそん)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じょしげるまご)이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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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익(じょえき, 1542 ~ 1587년) : 본관은 부여(扶餘). 자 군수(きみ受), 호 만죽(まんたけ), 만죽헌(まんたけのき).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じょしんおとこ)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こうしゅう)로 직제학 이약해(若海わかうみ)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1등 5인중에 2위으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 병조·이조좌랑, 병조정랑, 교리,수찬,군기경차관, 종부시첨정, 함경북도 순문관, 사인(舍人とねり)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고창현감, 안동부사, 평양서윤, 서천군수·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きせつ)이 뛰어나 삼당시인, 팔문장, 정철과 더불어 이십팔숙회라 칭하여졌고, 이이(珥)·정철(てい澈)로부터 지우(こころざしとも)로 인정받았으며, 1585년 5월 의주목사 재직시 박순, 정철, 이이 등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내렸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청남도 은진(おん)의 갈산사(葛山かつらやま사)에 배향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우암 송시열이 현 가야곡면 산노리에 효암서원에 배향되었다가 다시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사에 모셔져 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まんたけのきしゅ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유품으로 장검1점, 옥피리 1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시조2수는 청구영언, 국조시산, 기아 등 실려있으며 야담 및 일화 다수가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 서필원(じょ必遠, 1614년 ~ 1671) : 164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오직(じき)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さだあつし)이다.
  • 서성(じょあきら, 1942년 ~ ) : 대법원 대법관
  • 서한범(じょかんはん, 1945년 ~ ) :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 서승직(じょうけたまわきび, 1949년 ~ ) : 인하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 서승진(じょうけたまわ鎭, 1953년 ~ ) : 대한민국 제24대 산림청장
  • 서정식(じょ廷植, 1952년 ~ ) : 전 대한소방공제회(이사장), 전 인천광역시청(소방방재본부 본부장)
  • 서의식(じょあつしうえ, 1956년 ~ )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서희석(じょ熙錫, 1968년 ~ )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서봄이(1994년~) : 레고 맞추는 백수

과거 급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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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서도유(じょみちひろし) 서익(じょえき) 서정훈(じょかなえいさお) 서필원(じょ必遠)

무과

서경은(じょけいいん) 서귀남(じょ貴男たかお) 서내원(じょらいとお) 서대인(じょ大仁おおひと) 서시현(じょけん) 서인일(じょ仁一ひとかず) 서필후(じょ必厚) 서행보(徐行じょこう輔) 서행진(じょ行進こうしん) 서호인(じょこうじん)

생원시

서경복(じょけいぶく) 서규훈(じょ奎勳) 서내석(じょらいせき) 서내익(じょらいえき) 서병기(じょ秉箕) 서상민(じょしょうみん) 서상훈(じょ尙勳) 서석록(じょすず祿ろく) 서영로(じょさかえろう) 서응로(じょおう魯) 서익(じょえき) 서정민(じょ廷民) 서희적(じょのぞみせき)

진사시

서경성(じょたかしなり) 서기도(じょはじめどう) 서병규(じょ秉奎) 서병덕(じょ秉德) 서병호(じょ秉浩) 서복일(じょ福一ふくいち) 서숭수(じょかさみひさし) 서승교(じょうけたまわきょう) 서영택(じょさかえたく) 서필원(じょ必遠)

율과

서경식(じょけいうえ) 서병숙(じょ秉璹) 서응호(じょおうひろし) 서종건(じょおわりけん) 서홍선(じょひろしせん) 서홍수(じょひろしとげ) 서홍적(じょひろしすすむ) 서홍진(じょひろしすすむ)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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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으로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나당(とう)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당나라에 예속되어 660년에 백제도호부, 665년에 웅진도독부의 산하에 들어가 우이현(すみえびすけん)이 설치되었으나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해 신라에 예속되었다. 751년(경덕왕 10)에 이르러 부여현(扶餘けん)이라고 개칭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부여군으로 고치고 웅주(くましゅう) 영현에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かんつとむ)를 두면서 독립하여 부여현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6년에 충청남도 부여군이 되었다.

사성 연원에 대한 학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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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부여서씨 대동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로 태자에 책봉됐으나 나라가 망해 당나라에 호송됐다. 이어 당나라 고종이 본래의 성인 ‘부여(扶餘)’를 ‘서(じょ)’로 바꾸어주고 웅진도독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1] 이후 수세대(すう世代せだい)를 알지 못하여 이천서씨 5세손 병부상서 서존(じょそん)을 1세조(一世いっせい)로 삼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당 고종이 부여융에게 성을 부여씨에서 서씨로 바꾸어주었다는 내용에 대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부여융과 손녀 부여태비는 계속 부여씨를 썼고,[2] 중국 역사서의 기록에 당 고종이 부여씨를 서씨로 고쳐 하사했다는 내용을 고증할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융의 묘지석에는 ‘부여융(扶餘たかし)’이라 쓰였고,[3] 중국 산시성에서 발견된 의자왕의 손녀 묘지명에도 ‘부여태비(扶餘たい)’라는 칭호가 쓰였다.[4]

그럼에도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부여(扶餘)’ 씨에서 ‘서(じょ)’씨로 성을 바꾸었을 것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한다. 백제가 멸망한 뒤, 한반도에서 살아남았던 왕족은 신라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의 왕족이‘부여(扶餘)’씨가 ‘부여(おっとあまり)’씨, 그리고 ‘서(じょ)’씨로 글자를 변형시켰을 것이란 이야기다.[1]

서씨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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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어(ゆめりょう) 서문중(じょぶんじゅう) 서상공(じょしょうおおやけ)이 대구 서씨 보(だいおか じょ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じょ)는 애당초 두 관적(ぬきせ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とぎがわ) 달성(いたるじょう) 대구(だいおか) 장성(長城ちょうじょう) 연산(連山れんざん) 남평(南平みなみだいら) 부여(扶餘) 평당(ひらとう) 남양(南陽なんよう) 당성(とうじょう)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とぎがわ)의 선조는 아간공(おもねこう) 서신일(じょかみいつ)이요. 대구(だいおか)의 선조는 서한(じょ閈)이요. 달성(いたるじょう)의 선조는 서진(じょすすむ)이요. 장성(長城ちょうじょう)의 선조는 서능(じょりょう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れんざん)의 선조는 서보(じょたから 연성군)요. 남평(南平みなみだいら)의 선조는 서린(じょうろこ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じょしげるまご)이요. 평당(ひらとう)의 선조는 서준방(じょ俊邦としくに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なんよう じょ)의 선조는 서간(じょ趕)이요. 당성 서씨(とうじょう じょ)의 선조는 서득부(じょとくとみ)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じょ)가 다 이천(とぎがわ)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ななかん)은 곧 이천(とぎがわ)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じょう) 김씨(きむ)의 족보를 보니 서씨(じょ)의 선조(先祖せんぞ)는 기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しんまつねん)의 서신일(じょかみいつ)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じょきよし)이 있었으니 이천서씨(とぎがわじょ)는 그 후손이요. 대구(だいおか),봉성(みねじょう),남양(南陽なんよう),당성(とうじょう)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じょかみいつ)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じょ)는 모두 아간(おもね)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ゆめりょう) 서문중(じょぶんじゅう)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じょ)가 타족(ぞ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とぎがわじょ)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みずのえいぬ)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いたるじょう), 대구(だいおか), 부여(扶餘), 평당(ひらとう), 장성(長城ちょうじょう), 연안(のべやす), 전주(ぜんしゅう), 남평(南平みなみだいら), 남양(南陽なんよう), 당성(とうじょう)의 서씨(じょ)중에 누가 아간공(おもねこう)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おもね)공의 줄거리는 이천(とぎがわ)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じょ)가 이천서씨(とぎがわじょ)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とぎがわじょ)의 족보 「계미보みずのと(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じょ)는 3관(ぬき)이 저명한데, 이천조(とぎがわ)는 아간(おもね) 서신일(じょかみいつ)이고 부여조(扶餘)는 백제의 온조왕(ゆたか祚)이며, 달성조(達成たっせい)는 소윤(しょういん) 서한(じょ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とぎがわじょ), 달성 서씨(いたるじょうじょ), 부여 서씨(扶餘じょ)는 아간대부 서신일(おもね大夫たいふ じょかみいつ)의 후손이라고 참찬(まいりさん)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いたるしろじん じょいのち膺)이 썼다.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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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부여서씨 재실(おっとあまりじょ ときしつ)이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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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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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종국, 2004, 《의자왕 후예들의 과거와 현재》, 백제문화, 제33권, p159-188
  2. 〈부여융묘지명〉. 김영관, 〈백제 의자왕 회손녀 태비 부여씨 묘지〉, 《백제학보》no.1, 백제학회, 2010
  3. 《자치통감》(どおりかん), 권 202, から 18, おおとり 2년 2월 조
  4. 윤완준 기자 (2008년 11월 14일).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여태비 묘비석 なか서 발견”.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