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
서유구(
생애
[편집]1790년(정조 14) 초계문신(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백가서(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서유구는 숙부인 서형수가 동기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정계에서 축출당하자 1806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땅으로 돌아갔다.[1] 초야에 묻혀 지낸 18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토대로 《임원경제십육지》를 저술했다. 조선과 중국의 각종 문헌 892권을 참조하여 3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오직 아들 서우보(
벼슬 길에서 물러난 후 그동안 모으고 다듬고 덧붙인 방대한 분량의 《임원경제지(
임원경제지
[편집]이 책은 양반의 농촌생활과 농업을 주 내용으로 한 113권에 달하는 2만8천 항목 252만자 분량의 방대한 백과사전이다. 아래와 같은 16부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종 그림 설명과 도보(
- 본리지 (
本 利 志 ) 권1~13 (13권): 농사 일반에 관한 사항을 다루면서 전제(田制 ), 수리(水利 ), 토양지질, 농업지리와 농업기상, 농지개간과 경작법, 비료와 종자의 선택, 종자의 저장과 파종, 각종 곡물의 재배와 그 명칭의 고증, 곡물에 대한 재해와 그 예방, 농가월령(農家 月 令 ), 농기도보(農 器 圖譜 ), 관개도보(灌漑 圖譜 ) 등에 걸쳐 서술했다. - 관휴지 (灌畦
志 ) 권14~17 (4권): 식용식물과 약용식물을 다루면서 각종 산나물과 해초·소채·약초 등에 대한 명칭의 고증, 파종시기와 종류 및 재배법 등을 설명하였다. - 예원지 (
藝 畹志) 권18~22 (5권): 화훼류의 일반적 재배법과 50여 종의 화훼 명칭의 고증, 토양, 재배시기, 재배법 등에 대하여 풀이하였다. - 만학지 (
晩學 志 ) 권23~27 (5권): 31종의 과일류, 15종의 과류(瓜 類 ), 25종의 목류(木 類 ), 그 밖의 초목 잡류에 이르기까지 그 품종과 재배법 및 벌목수장법 등을 설명하였다. - 전공지 (
展 功 志 ) 권28~32 (5권): 뽕나무 재배를 비롯한 비단과 무명 옷감과 직조 및 염색 등 피복재료학에 관한 논저이다. - 위선지 (
魏 鮮志) 권33~36 (4권): 여러 가지 자연현상을 보고 기상을 예측하는 이른바 점후적(占 候 的 ) 농업기상과 그와 관련된 점성적인 천문관측을 논하였다. - 전어지 (
佃 漁 志 ) 권37~40 (4권): 가축과 야생동물 및 어류를 다룬 논저로서, 가축의 사육과 질병치료, 여러 가지 사냥법, 그리고 고기를 잡는 여러 가지 방법과 어구(漁具 )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 정조지 (
鼎 俎 志 ) 권41~47 (7권): 식감촬요(食 鑑 撮要 )는 각종 식품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의약학적 논저와, 영양식으로 각종 음식과 조미료 및 술 등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였다.[3] - 섬용지 (贍用
志 ) 권48~51 (4권): 가옥의 영조(營造 )와 건축기술, 도량형기구와 각종 공작기구를 농기(農 器 )의 도보(圖譜 )와 함께 소개하였다. 농촌의 기재·복식·실내장식·생활기구와 교통수단 등에 관해서 중국식과 조선식을 비교해가며 우리 나라 가정의 생활과학 일반을 다루었다. - 보양지 (葆養
志 ) 권52~59 (8권): 도가적(道家 的 ) 양생론을 편 논저로, 불로장생의 신선술(神仙 術 )과 상통하는 식이요법과 정신수도를 논하고, 아울러 육아법과 계절에 따른 섭생법을 양생월령표(養生 月 令 表 )로 해설하였다. - 인제지 (
仁 濟 志 ) 권60~87 (28권): 의(醫 )·약(藥 ) 관계를 주로 다루었으나 끝부분에는 구황(救荒 ) 관계 및 260종의 구황식품을 소개하였다. - 향례지 (鄕禮
志 ) 권88~90 (5권): 지방에서 행해지는 관혼상제 및 일반 의식(儀式 ) 등에 관한 풀이이다. - 유예지 (
游 藝 志 ) 권91~98 (6권): 선비들의 독서법 등을 비롯한 취향을 기르는 각종 기예를 풀이하였다. - 이운지 (怡雲
志 ) 권99~106 (8권): 선비들의 취미생활에 관해 서술하였다. - 상택지 (
相 宅 志 ) 권107~108 (2권): 조선 땅의 지리 전반을 다뤘다. - 예규지 (倪圭
志 ) 권109~113 (5권): 조선의 사회경제를 다룬 것으로 양입위출(量 入 爲 出 )·절생(節 省 )·계금(戒禁)·비예(備豫) 등을 다룬 것과 무역이나 치산(置 産 ) 등을 다룬 화식(貨殖 ) 등이 논술하였다.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수록하였다.
번역 및 출간
[편집]1930년대 일제하에서 국학(
순수 민간연구소인 만큼 일반의 후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5] 2015년에는 풍석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임원경제지》 번역 지원과 학술대회 개최, 요리연구소[6]의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기타 저서
[편집]- 《난호어목지(
蘭 湖 魚 牧志 )》 - 《누판고(
鏤 板 考 )》 - 《행포지(
杏 浦志 )》 - 《금화경독기(
金華 耕 讀記)》[7] - 《종저보(
種 藷 譜 )》 - 《향례합편(鄕禮
合 編 )》 - 《풍석전집(
楓 石 全集 )》 - 《번계시고(樊溪
詩 稿 )》[8]
가족 관계
[편집]- 고조부: 서문유(
徐 文裕 )- 증조부: 서종옥(
徐 宗 玉 )- 종조부: 서명익(
徐 命 翼 ) - 종조부: 서명성(
徐 命 誠 )- 숙부: 서형수(
徐 瀅修) - 생부 서명응(徐 命 膺)의 차남, 종조부 서명성(徐 命 誠 )에게 양자로 출계
- 숙부: 서형수(
- 조부: 서명응(
徐 命 膺) - 조모: 이정섭(
李 廷燮)의 딸- 숙부: 서낙수(
徐 樂 修 ) - 숙부: 서책수(
徐 策 修 ) - 숙부: 서채수(
徐 采 修 ) - 양부: 서철수(
徐 澈修) - 양부이자 숙부 - 숙부: 서유수(
徐 柔 修 )
- 숙부: 서낙수(
- 종조부: 서명익(
- 증조부: 서종옥(
현대적 평가
[편집]동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통해 백성들이 좀 더 잘사는 '풍요로운 나라'를 그리려고 했다. 그는 당시 성리학에 매몰된 선비들이 입만 살아서 "흙으로 끓인 국과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
서유구는 바로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어, 한 사람이 했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선과 중국의 문헌을 참조하고 인용·정리해가며 《임원경제지》에 하나라도 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정보를 담으려고 애썼다. 그는 문화 콘텐트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다방면에 달통한 보물창고를 후대에 전한 셈이다. 200년 전의 고루한 내용이 아니고 지금 농촌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365일 일상을 재구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라 할 수 있다.[9]
각주
[편집]- ↑ 박종인,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
土 羹 紙 餠)을 누가 먹으랴!" -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①, 조선일보, 2020년 12월 16일. - ↑ 그러나 서우보는 편찬 작업 도중 1827년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서유구는 비통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출한다. 서유구, 《금화지비집》 권5,
祭 亡兒 生 日 文 , “我 實 不 慈。閡汝願 欲 。郭 西 曲 巷 。近 置 小 宅 。不 逮汝生 。乃棲汝 魄 。筆 硏 左 設 。帷 幌 前 隔 。櫝藏帖 括 。掌 大 卅冊。麻 姑 細字 。悉汝心 畫 。汝 去 何處 。遺 下 此笈。俯仰 無 覿。叩之無 答 。已 矣已矣。無 可 及矣”。 - ↑ 정조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통주 제조법만 160여 가지에 이르러 역자들은 전통주 제조 수업을 듣고 실제로 제조법을 적용함으로써 구체적인 검증을 마쳤다.
- ↑ 정명현 소장은 서울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해양 박물학의 성격」으로 석사를 마쳤으며, 동 대학원에서 서유구의 농업정책서인 《의상경계책》을 역주하고 분석하는 박사 논문을 썼다. 「본리지」를 김정기와 함께 번역하였고, 「본리지」의 설명대로 파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 2003년에 정명현 소장이 영어 강사로 잠시 근무했던 영어학원의 원장인 송오현 DYB 교육 대표가 거금을 쾌척하고 수십 명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대 2009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파트타임으로 작업을 하는 까닭에 진척은 더디지만 모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박정호, "252만자 보물창고를 캐다, 더 잘사는 나라를 그리다", 중앙일보, 2019년 7월 18일.
- ↑ 풍석음식연구소의 곽미경 소장은 《임원경제지》에 실린 요리를 골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전통 레시피를 중심으로 《조선셰프 서유구》(씨앗을 뿌리는 사람)라는 책을 2016년 4월에 출간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는 초피나무 열매로 만든 초피에 찹쌀가루와 간장을 섞어 전천초라는 지짐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신준봉, "곽미경 소장 인터뷰" 중앙일보, 2016년 5월 26일.
- ↑ 원래는 산일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 도쿄도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분량은 제8권이 빠진 총 7권 7책이다. 또한 이 책에서 김영(
金 泳 : 1749년~1817년, 본관은 김해, 진주시 출신)의 저술인 《기삼백해》(朞三 百 解 )와 《역상계몽》(易 象 啓蒙 )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 ↑ 서유구가 1838년에서 1840년까지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이다.
- ↑ 박정호, 위의 중앙일보 2019년 7월 18일자 기사 참조.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농촌 경제와 사회 변동〉"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
[편집]- 서유구 두산백과 두피디아
- 임원경제지 설명 엠파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강명관 교수 (부산대 한문학), 주간동아, 2007년 4월 579호
- 조선후기 달성서씨가의 학풍과 실학: 임원경제지(
林 園 經濟 志 )를 통해 본 서유구의 이용후생학(利用 厚生 學 ) 안대회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 한국실학연구 제11집,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