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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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생애
[편집]울주(허베이성 울현)의 출신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 여러차례 낙방한후 현청의 교관(
왕진은 학식이 제법 있었던 터라 선덕제의 명으로 태자 주기진(
정통제 7년(1442년)에 섭정을 맡았던 정통제의 할머니 태황태후 장씨(성효소황후)가 승하하자, 조정의 유력자가 되었다.[6] 가장먼저 왕진이 한일은 명태조 주원장이 환관억제책의 실행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환관의 정치 간여금지'를 천명하며 궁문에 세워놓은 철패를 부셔버리는 것이었다.[7][8] 이후 선대 황제시절의 유능한 신하였던 양사기(楊士
정통제 14년(1449년)에 오이라트가 샨시에 침입하면서, 정통제에게 친정을 추천해 같이 종군 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대패해 정통제는 포로가 되었고 자신도 금위군 군관 번충에게 살해당했다.[9]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 하는데 이일이 있은후 왕진의 가문은 처벌을 당하고, 재산도 몰수됐다.
외부 링크
[편집]각주
[편집]-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p141
- ↑ 가 나 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목의 변 [
土木 之 變 ]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 -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p137
- ↑ [네이버 지식백과] 환관의 정치 개입 - 황제의 옆에 선 환관, 위세를 부리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한나라와 당나라가 환관의 횡포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 태조는 이러한 과거 역사 경험을 거울삼아 환관들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중략)..이는 건문제 때도 계속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자가 '정난의 변' 때 영락제와 내통하여 영락제의 황제 즉위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 대한 대우를 개선시켰다.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전을 넓히고 환관의 숫자를 수천 명으로 늘인 데 이어 위계질서에 따른 환관의 직책을 만들었다. 그중 최고위직이 사례감이었다. 공식문서에 황제 대신 대필하는 병필태감도 사례감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장관 아래에 감찰관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락제의 밀실정치에는 관료보다 환관의 활용도가 컸다.
- ↑ [네이버 지식백과] 토목의 변 [
土木 之 變 ]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조카한테서 황제 자리를 빼앗은 성조는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봐 곁에 있는 환관들을 특별히 신임했고 그 때문에 환관의 세력이 점차 커졌다. 선종(宣 宗 ) 대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비답(批答)을 내려야 하는 상주서마저 환관들이 대필하게 되었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높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 안정애,양정현 <한 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7.1.5 p253
-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p140
- ↑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66
- ↑ 안정애,양정현 <한 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7.1.5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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