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대한민국의 사적 | |
종목 | 사적 제257호 (1977년 11월 22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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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9,413.23m2 |
시대 | 조선 시대 |
소유 | 서울특별시, 학교법인 덕성학원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0 (운니동) |
좌표 | 북위 37° 34′ 34″ 동경 126° 59′ 14″ / 북위 37.57611° 동경 126.98722°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해지) | |
종목 | 유형문화재 제21호 (1974년 8월 21일 지정) (1977년 11월 22일 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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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운현궁(
역사
[편집]조선시대 일반 상류주택이었던 이 건물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역이 크게 넓혀지고 건물들도 새로 더 들어서며 흥선대원군이 10여 년간 집정하며 정치를 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실제로 고종이 살았던 집은 운현궁 동북쪽 뒤에 있었는데, 196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행하던 1863년 ~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노락당과 노안당은 1864년 9월, 이로당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은 원래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
현재의 운현궁 터는 복원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그리고 별당인 이로당(
건물
[편집]현존하는 운현궁의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궁실의 내전 건물에 가깝다. 평면에 보이는 특징으로 각 채들의 동측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월랑(
노안당
[편집]노안당의 '노안(
노안당의 몸채는 장대석의 세벌대이고, 영화루는 장대석 두벌대로 되어있다.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쌍사모를 한 기둥을 세워 기둥머리에는 초익공을 결구하였다. 가구(
노락당
[편집]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정면 3칸은 앞퇴를 개방했고, 좌협간 2칸 중에서 한 칸 부분이 개방되어 좌측 날개 부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좌우 각 2칸은 온돌, 중앙 3칸은 대청이다. 좌우측의 날개 부분 즉 안채의 몸채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는 부분은 돌출부가 각 2칸이며 부엌과 창고로 쓰였다. 노락당은 초익공 7량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기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남아있다.
노락당 남쪽의 남행각은 자 모양의 평면을 하여 자 모양의 평면을 한 노락당과 함께 자 모양의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명성황후 민씨가 삼간택을 마친 후 왕비수업을 받았던 곳이고, 고종 3년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가례가 있었던 곳이다.
이로당
[편집]별당인 이로당은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
정면 7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정방형주초(
사진
[편집]-
노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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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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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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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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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 정문
운현궁의 역대 종주
[편집]- 제1대 : 흥선대원군 이하응(
興 宣 大院君 李 昰應, 1820년~1898년) - 제2대 : 흥친왕 이재면(
興 親王 李 載 冕, 완흥군(完 興 君 ), 1845년~1912년) - 제3대 : 영선군 이준용(
永 宣 君 李 埈鎔, 1870년~1917년) - 제4대 : 이우(
李 鍝, 1912년~1945년) - 제5대 : 이청(
李 淸 , 1936년~)
같이 보기
[편집]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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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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