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가오루
이노우에 가오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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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6년 1월 16일 일본 스오국 요시키군( |
사망 | 1915년 9월 1일 일본 제국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 (79세)
성별 | 남성 |
국적 | 일본 제국 |
직업 | 관료, 정치가, 사상가, 기업인, 외교관 |
자녀 | 양자: 가쓰노스케 |
종교 | 유교 |
상훈 | 대훈위 국화장경식 대훈위 국화대수장 대훈위 이화대수장 |
이노우에 가오루(일본어:
태정관제 시대에는 외무경, 참의를 역임하였으며 구로다 내각에는 농상무대신(
본성은 겐지이며, 세이와 겐지의 일가계 가와치 겐지의 지류인 아키국인 모리씨의 가신·이노우에씨(
조선의 개화 사상가인 이동인, 유대치 등과 교류하였으며, 이후 1881년부터 일본에 파견된 조선인 개화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조선의 개화파 유길준, 윤치호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
생애
[편집]초기 이력
[편집]스오국 요시키군(
에도에서 네덜란드 학문인 란가쿠를 배웠다. 이후 존왕양이 운동에 공감하여 1862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영국 대사관 방화사건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863년 서양식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 등의 조슈 출신 인물들과 함께 영국에 밀항하였고, 유학 중 서구열강의 국력을 눈으로 체험하여 개국론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이토와 함께 귀국하여 "개국양이(
메이지 유신 이후
[편집]메이지 유신 이후 관직으로 나서 신정부의 재정 부분을 맡았다. 1873년 사법경 에토 신페이에 의해 독직 사건을 추궁받고 사직하였다. 잠시 미쓰이 재벌의 배경을 업고,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가로 나섰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강한 요청을 받아 오사카 회의를 통해 정계로 복귀하여 외무경, 외무대신, 농상무대신, 내무대신, 대장대신등을 역임하였다. 1883년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외교 사절을 위한 접대 시설인 로쿠메이칸(
또한 실업계의 발전에도 힘을 쏟아서, 방직업, 철도 산업을 지원하였다. 1884년 화족령에 의해 백작의 작위를 받고, 이후 후작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각종 재벌들의 최고고문을 맡는 등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런 정경유착으로 이권에 개입하여 재산을 모아서 세간에 의해 탐관오리라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조선 개혁가들에게 영향
[편집]1881년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조선에서 신문물 견학차 파견된 신사유람단 단원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조선에서 신문물 견학차 사절단이 파견되기 이전에 그는 이동인, 어윤중, 박규수, 유대치 등과 사전에 교류하기도 했다.
그는 이동인, 어윤중, 박규수, 유대치 등의 주선과 부탁으로 김옥균, 서광범, 윤치호, 유길준 등의 일본 유학기간 중 비용과 숙식을 지원하였고, 그들을 일본의 개화 사상가들과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한다. 조선의 무장 윤웅렬의 부탁으로 윤치호를 특별히 도진샤에 입학하는데 도움을 준다.[1]
생애 후반
[편집]제4차 이토 내각의 붕괴 이후, 내각총리대신에 낙점되었으나, 정국의 운영이 쉽지 않겠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사퇴하고 가쓰라 다로에게 양보하였다. 이토가 사망한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와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함께 겐로(
사망
[편집]평가
[편집]-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주역의 한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 그 성질과 노성에서 " 벼락같은 아버지"라고 불렸다. 한편, 오른손 격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에는 절대적 신뢰를 두고 있어 시부사와가 근처에 있는 한 이노우에는 어조를 돋울 것도 없었고, 시부사와의 주위에는 천둥은 떨어지지 않다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시부사와를 "피뢰침"이라고 불렀는데, 시부사와 본인은 "진짜 피뢰침은 이노우에 씨"였다고 했다. 어떤 정치적 공격도 이노우에가 몸으로 받아 준 덕분에 자신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 메이지 10년대(1877년-1886년)독일 공사는 이노우에에 대해서"전 외무성 경(데라지마 무네노리)보다 좋고 온화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각주
[편집]같이 보기
[편집]외부 링크
[편집]제1대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가 당주 1907년 ~ 1915년 |
후임 이노우에 가쓰노스케 |
이노우에 (가오루) 백작가 당주 1884년 ~ 1907년 |
후임 후작으로 승작 |
전임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 |
일본의 외무대신 1885년 12월 - 1887년 9월 |
후임 이토 히로부미 |
전임 고노 도가마 |
일본의 내무대신 1892년 8월 - 1894년 10월 |
후임 노무라 야스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