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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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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술(ひろしじゅつ, 1647년 ~ 1722년 5월 17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 무신, 정치인이며, 자는 사선(ぜん)이다. 노론 삼장신(さんしょうしん)이다. 훈련대장(訓練くんれん大將たいしょう) 및 형조 판서(けいばんしょ)를 지냈으며, 연잉군(영조)왕세제로 책봉하는데 기여했다.[1] 덕흥대원군 초(とくきょう大院君たいいんくん 岹)의 5대손이다. 1675년(숙종 1)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장 자산군수, 창성부사, 선천부사, 절도사, 황해병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목호룡에 의해 경종의 암살 미수범의 동조자의 한 사람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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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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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ぜんしゅう), 휘는 홍술(ひろしじゅつ), 자는 사선(ぜん), 시호는 충정(ちゅうじょう)이다.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원군(河原かわはらくん) 이정(鋥)의 4대손이며, 종실 응천군 이돈(しこりかわくん 潡)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吏曹ばんしょ) 이석한(すずかん)이며, 어머니는 호군(まもるぐん) 경주인(慶州けいしゅうじん) 김광익(金光かねみつつばさ)의 딸로 증 정부인 김씨(さだ夫人ふじん きん)이다. 부인은 증 승지(うけたまわむね) 광산인(光山こうやまじん) 김정탁(きむ廷鐸)의 딸로 증 정경부인(さだけい夫人ふじん) 김씨(きむ)이다.

증 이판 이석한의 3남으로 1647년(인조 25) 11월 30일 탄생하였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1675년(숙종 1) 무과에 급제하여 1676년(숙종 2) 5월 16일 선전관(宣傳せんでんかん)에 제수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직후 부호군이 되었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しゃげんしたがえ功臣こうしん一等いっとう)에 책록되었다.

무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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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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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숙종 6) 내금위장(內禁衛きんえいしょう)을 거쳐 이해 8월 6일 자산부사(慈山使), 자산군수(慈山ぐんもり), 내금위장(內禁衛きんえいしょう)을 거쳐 이해 9월 11일 평산부사(平山ひらやま使)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 12월 3일 부호군(ふくまもるぐん)를 거쳐 이해 12월 22일 창성부사(あきら城府じょうふ使)을 역임하고, 1682년(숙종 8) 7월 25일 선천부사(せんかわ使) 겸 감목관(かんまきかん)를 거쳐 1684년(숙종 10) 호군(まもるぐん), 영천총(營千摠)이 되었다.

1685년(숙종 11) 4월 15일 선천 부사(せんかわ使)로 재임 중 청강진(淸江きよえ鎭)의 군졸(ぐんそつ)이 은(ぎん)을 도적질한 일을 추문(推問)해 내고자 하여 함부로 혹형(酷刑こっけい)을 베풀어서 그들 부자(父子ふし)가 모두 죽어 처음 탈고신(だつつげ)에 그쳤으나 우의정(みぎせい) 남구만(みなみきゅうまん)이 차자를 올려 대흥산성(だいきょう山城やましろ)의 별장(べつしょう) 직을 파직하고 포도 대장과 형조의 당상을 추고(推考すいこう)하라고 명하였다.[2]

1686년(숙종 12) 12월 21일 소강첨사(ところこう僉使)를 거쳐 1687년(숙종 13) 2월 2일 절도사(節度せつど使), 방어사(防禦ぼうぎょ使)를 거쳐 이해 4월 17일 경상우병사(けい尙右へい使)를 역임하고 이해 9월 28일 가선대부(よしみぜん大夫たいふ)에 가자되고, 이해 12월 20일 황해병사(黃海こうかいへい使)을 역임하였다. 1690년(숙종 16) 별장(べつしょう)을 거쳐 1691년(숙종 17) 6월 24일 길주목사(よししゅうまぎ使)를 역임하였다. 1692년 의주목사가 되었다.

1695년(숙종 21) 6월 5일 북로(きた)의 군병(軍兵ぐんびょう)의 조총(鳥銃ちょうじゅう) 사용을 허락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개 우리 나라는 조총을 장기(ちょうわざ)로 삼는데, 북로에 범월(はんこし)의 우환이 잦았으므로, 민간(民間みんかん)의 조총을 관부(かん)에다 거두어 두어 사용할 수 없게 하니, 연소(年少ねんしょう)한 군병 중에는 간혹 조총이 어떠한 물건인지 알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이때에 와서 이홍술이 민간의 사용을 허가하고, 매양 3일마다 점명(てんめい)할 때 총을 가지고 와서 모이게 한다면, 무기(武器ぶき)를 정비하여 환란에 대비하는 방도를 둘 다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어렵게 여겼다. 그 뒤에 권시경(けんけい민진후(閔鎭あつし) 등이 다 북로로부터 돌아와 이 일을 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홍술이 또 말하기를, “북로(きた)의 봉화(烽火ほうか)는 경흥(けいきょう)에서 시작되어, 강변(江邊えべ)의 여섯 고을이 차례차례 서로 응(おう)하게 되어 있는데, 산이 높은데다 구름이 가려서 단절(斷絶だんぜつ)되고 서로 응하지 못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강변의 여섯 고을은 모두 변방의 경계이니, 굳이 경흥(けいきょう)에서 시작하기를 기다려 봉화를 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산이 높고 구름이 가려 어두운 곳은 봉군(烽軍)을 절반으로 나누되, 직로(直路ちょくろ)의 서로 마주보이는 산에 내려 배치하고, 강변의 여섯 고을로 하여금 각자 봉화를 들어 북병영(きた兵營へいえい)에 고기 비늘처럼 서로 차례차례 응하여 도달하도록 한다면, 단절될 우려는 없을 듯합니다.”하였다.[3] 이해 11월 30일 비국(備局)에서 회령(かいやすし) 백성이 월경(越境えっきょう)하여 도적질을 한 이유로 나국(拿鞫) 당하였고, 이해 12월 10일 영의정(りょうせい) 남구만(みなみきゅうまん)이 서로(西にし)가 흉년듦을 가지고 상차(うえ箚)하여, 평안 병사(平安へいあんへい使)을 전대로 유임(留任りゅうにん)하였다.

1697년(숙종 23) 6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さんみち水軍すいぐん統制とうせい使)을 역임하고, 1699년(숙종 25) 부호군(ふくまもるぐん)를 거쳐 이해 윤 7월 26일 총융사(摠戎使)가 되고, 이해 8월 14일 춘당대(春塘しゅんとうだい) 친림시(親臨しんりんためし) 때 참시관(まいりためしかん)이 되고, 이해 10월 8일 문과회시(文科ぶんかかいためし) 때 2소시관(しょためしかん)이 되었다.

1700년(숙종 26) 오위도총부 부총관(ふく摠管), 동돈녕(どうあつしやすし)이 되고, 이해 3월 4일 윤기(りん)의 죄를 얻은 사람 정유석(てい維錫)의 무리를 불러다가 집 안에 기르며 대소(大小だいしょう) 과장(じょう)에서 간계(奸計かんけい)를 부린 터전을 만들었고, 그의 조카 이세정(ただし)이 외장(そとじょう)에서 불법으로 합격하게 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호군(まもるぐん)을 거쳐 이해 8월 7일 총융사(摠戎使)에 제수되고, 이해 9월 2일 오위도총부부총관(ふく摠管)를 거쳐 9월 25일 우변포감대장(右邊うへんかん大將たいしょう)에 제수 되고, 이해 11월 9일 다시 오위도총부부총관(ふく摠管)를 거쳐 11월 18일 훈련도정(くん鍊都せい)이 되었다.

1701년(숙종 27) 2월 21일 어영대장(大將たいしょう)에 제수 되었다. 이해 3월 어영대장에 제수 한것에 대해 정언 이동언(ひがし彦), 정언(せいげん) 유태명(やなぎ泰明やすあき) 등이 과옥(ごく)에 관계되었으니, 그때 대간(たい諫)이 탄핵한 것은 대개 공의(おおやけ)에서 나온 것이라 파직하라고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 윤 6월 12일 북병사(北兵きたへい使)에 제수되어 이해 윤 8월 24일 북병사(北兵きたへい使)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이 사조(あさ)하니, 임금을 인견(引見いんけん)하고, 이홍술이 아뢰길, "조총(鳥銃ちょうじゅう)은 곧 무기(武器ぶ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인데, 북쪽의 백성들이 금법(きんほう)을 범하고 국경(國境こっきょう)을 넘어갈까 염려하여, 관아에서 거두어 모아 간직해 두고서 조련(みさお鍊)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명색이 군정(ぐんひのと)이 되어서 조총(鳥銃ちょうじゅう)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니, 진실로 딱합니다."하고, 승지(うけたまわむね) 정호(てい澔)가 아뢰길, "만약 국경을 범하는 것을 경계한다면, 비록 포수(砲手ほうしゅ)가 아니더라도 삼(蔘)을 캐러 금법을 범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우환이 또한 매우 빈번하니, 어떻게 이에 취해(吹薤)하여 적(てき)을 방어하는 장기(ちょうわざ)까지 아울러 없앨 수 있겠습니까? 조총을 전례(前例ぜんれい)대로 포수(砲手ほうしゅ)에게 내어 주고, 본관(本官ほんかん)으로 하여금 5일에 한 번씩 점검하게 한다면, 5일만에 어찌 감히 국경을 범하여 왕래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길, "조총을 간직해 둔 후에 간사한 백성들이 지경을 범하여 넘어간 자가 또한 많이 있었으니, 금법을 범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우환이 어찌 오로지 조총에만 있겠는가? 마땅히 변통(變通へんつう)할 방법이 있어야 할 듯하나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니, 대신(大臣だいじん)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호가 아뢰길, "북쪽 지방의 여러 고을은 모두 연해(沿海えんかい)에 있고, 또 그 성루(なりるい)가 하나도 험준한 땅에 웅거한 곳이 없으니, 설령 정강(精强せいきょう)한 기병(騎兵きへい)이 그득하게 쳐들어온다면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경성(かがみじょう) 이남에는 마천령(すりてんみね)·마운령(すりくもみね)·함관령(咸關みね)·철령(てつみね)이 있고 형세가 험하니, 실로 하늘이 만든 땅입니다. 고(ゆえ) 상신(あいしん) 민정중(閔鼎じゅう)이 감사(かん)가 되었을 때, 감사의 행영(くだり營)을 마천령(すりてんみね)에 설치하여, 적이 침입하면 머물러서 방어하기를 마치 병사(へい使)의 행영(くだり營)처럼 하기로 하였는데, 미처 설치되기도 전에 체직(遞職)되어 돌아갔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마천령에 영(營)을 설치하는 것이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만약 연해(沿海えんかい)의 요해처(要害ようがいしょ)에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각기 수군 첨사(水軍すいぐん僉使)를 두며, 지방의 어부(漁夫ぎょふ)를 뽑아내어 군기(ぐん)를 나누어 주고 연습(鍊習)하게 하여서 위급할 때 도와줄 세력으로 삼는다면, 실로 좋은 계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이홍술은 아뢰길, "적병이 거침없이 달려오는 형세를 막으려면, 수군(水軍すいぐん)을 설치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길주(よししゅう)의 성진(しろ)도 또한 연해(沿海えんかい)의 요충(要衝ようしょう)인데 원래 군사를 두어 방수(ぼうもり)한 일이 없으니, 지금 만약 수군(水軍すいぐん)을 많이 정하여 변고에 대비하게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홍술에게 명하여, 부임한 후에 적당한지의 여부를 살펴서 계문(けい聞)하게 하였다.

1704년(숙종 30) 3월 25일 영의정(りょうせい) 신완(さる琓)이 북도(北道ほくどう)의 월경(越境えっきょう)을 범한 데 대한 장계(じょうけい)에 날짜가 틀리고 지명(地名ちめい)이 분명하지 않고 피살된 사람도 상호(しょうえびす)인지 주호(はしえびす)인지 몰라서 의심스러운 일이 많다는 것으로 도신(みちしん)을 추고할 것을 청하자 함경 감사(咸鏡かん) 이진휴(しんきゅう)와 북병사(北兵きたへい使)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은 모두 파직(罷職ひしょく)하고, 지방관도 아울러 파직하여 유(りゅう) 3천리에 처하며, 죄인의 원적관(原籍げんせきかん)은 5자급(きゅう)을 강등하고, 지방관으로 기미를 알고 포착(捕捉ほそく)한 자는 단지 파직만 하며, 깨달아 살피지 못한 자는 극변(きょく)에 충군(たかしぐん)하라 하였다.[4]

관료생활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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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년(숙종 31) 절도사(節度せつど使)를 거쳐 이해 4월 25일 부사직(ふく司直しちょく)에 제수되고, 이해 4월 27일 부총관(ふく摠管)에 제수되어 무과 참시관(たけさんためしかん)이 되고, 이해 7월 23일 도총관(摠管)이 되고, 적여포도대장(てきあずか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을 거쳐 이해 9월 24일 동지(どう)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 3월 11일 모화관 무과전시(慕華かん たけ殿どのためし) 때 참시관(まいりためしかん)이 되고, 이해 3월 25일 훈련도정(くん鍊都せい)을 겸임하고, 좌우포도대장(左右さゆう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이 되었다. 1707년(숙종 33) 2월 9일 별시 초시(べつためし はつためし) 때 2소시관(しょためしかん)이 되고, 이해 3월 15일 무과(たけ) 때 2소시관(しょためしかん)이 되고, 부총관(ふく摠管), 이해 9월 17일 동당 문과초시(東堂とうどう 文科ぶんかはつためし) 때 무1소시관(いちしょためしかん)이 되었다. 1708년(숙종 34) 수원부사(水原みずはら使)를 거쳐 부총관(ふく摠管), 우변포도대장(右邊うへん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을 역임하고, 이해 윤 3월 15일 문무과전시(文武ぶんぶ殿どのためし) 때 참시관(まいりためしかん)이 되고, 경기수사(京畿けいきすい使)를 역임하였다.

1710년(숙종 36) 부호군(ふくまもるぐん) 이해 7월 6일 훈련도정(くん鍊都せい) 겸임하고, 다시 경기수사(京畿けいきすい使)가 되고, 이해 9월 17일 무2소시관(しょためしかん)에 임명되고, 도총관(摠管)을 거쳐 이해 11월 26일 우변포도대장(右邊うへん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에 제수되고, 이해 12월 14일 평안병사(平安へいあんへい使)가 되었다.

1711년(숙종 37) 1월 24일 평안 병사(平安へいあんへい使)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이 사조(あさ)하니, 임금이 인견(引見いんけん)하고 칙유(みことのりさとし)하였다. 이홍술이 말하기를, "안주(やすしゅう)와 평양(平壤ぴょんやん)은 나라의 요충지(要衝ようしょう)인데도 병자년 1636년(인조 14) 뒤로 약조(やくじょう)에 구애되어 성첩(しろ堞)을 전연 수리(修理しゅうり)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북자(きた咨)에 마음을 써서 방수(ぼうもり)하게 하였으니, 이 기회에 수축(修築しゅうちく)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각별히 수축하라고 명하였다.[5]

1713년(숙종 39) 3월 6일 우변포도대장(右邊うへん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에 제수되고, 이해 4월 12일 훈련도정(くん鍊都せい)을 겸임하고, 이해 5월 23일 동지(どう)를 거쳐 이해 8월 11일 좌윤(ひだりいん)을 역임하고, 이해 11월 3일 수원부사(水原みずはら使)가 되었다. 1715년(숙종 41) 6월 12일 부호군(ふくまもるぐん)을 거쳐 이해 9월 1일 부총관(ふく摠管)이 되고, 이해 9월 11일 훈련도정(くん鍊都せい)을 거쳐 이해 10월 12일 좌변포도대장(左邊さへん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1월 26일 우변포도대장(右邊うへんぬすめ大將たいしょう)에 제수되고, 이해 1월 27일 훈련도정(くん鍊都せい), 서상관(書狀しょじょうかん)을 거쳐 이해 9월 26일 형조참판(けい曹參ばん)에 제수 되고, 이해 9월 28일 훈련대장(くん大將たいしょう)에 제수되었다.

1717년(숙종 43) 3월 9일 부사직(ふく司直しちょく)을 거쳐 이해 5월 11일 형조참판(けい曹參ばん)에 제수되고, 이해 8월 19일 중시무과초시(じゅうためしたけはつためし) 때 1소시관(いちしょためしかん)에 임명되고, 이해 8월 27일 동당문과초시(東堂とうどう 文科ぶんか はつためし) 때 무과 2소시관(たけ しょためしかん)에 임명되고, 부호군(ふくまもるぐん)을 거쳐 이해 12월 7일 우윤(みぎいん)에 제수되었다.

1718년(숙종 44) 1월 8일 병조참판(兵曹へいそうさんばん)에 제수되고, 이해 4월 1일 우윤(みぎいん)이 되고, 윤 8월 17일 좌윤(ひだりいん), 훈련 대장(くん大將たいしょう)이 되고, 이해 9월 5일 훈련 대장(くん大將たいしょう)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이 말하길, "금년의 전염병은 옛날에 없던 바로 도감(かん)의 군병(軍兵ぐんびょう)으로서 사망한 자가 매우 많은데, 금위영(禁衞きんえい營)과 어영청(營廳) 두 군영(軍營ぐんえい)의 군병이 해마다 번(ばん)을 정지하게 되니, 각처에 입직(にゅうじき)하는 일을 모두 도감의 군병이 혼자 담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감의 군병이 휴식할 시간이 없으니, 마땅히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중순(中旬ちゅうじゅん) 시재(ためしざい)를 내일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많은 상포(しょうぬの)를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에서 바친 정번포(とまばんぬの) 각 20동(どう)을 빌어서 옮겨다 나누어 주게 하소서."하니, 세자(世子せいし)가 옳게 여겼다.[6]

생애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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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년(숙종 44) 10월 17일 무과전시 참시관(たけ殿どのためし さんためしかん)에 임명되고, 이해 12월 20일 훈령도정(くん鍊都せい)이 되고, 이해 12월 25일 훈련지사(くん鍊知ごと), 이해 12월 27일 부총관(ふく摠管)이 되었다.

1719년(숙종 45) 이해 2월 29일 무과별시전시 시관(たけべつためし殿どのためし ためしかん)에 임명되고, 중추부사(中樞ちゅうすうごと)에 제수되고, 훈련대장(くん大將たいしょう), 지중추부사(中樞ちゅうすうごと) 10월 20일 훈련 대장(くん大將たいしょう)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이 말하길, "전일에 의주(よししゅう)의 수신(まもりしん)이 장계(じょうけい)하기를, ‘피인(かれにん)이 심양성(瀋陽しんようじょう)을 더 쌓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잇따라 흉년을 만나 양서(りょう西にし)의 군정(軍政ぐんせい)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므로, 군병(軍兵ぐんびょう)이 혹은 흩어지고 혹은 죽어 빈 장부만 있으니, 만약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변고(へんゆえ)가 있다면 어떻게 방어(防禦ぼうぎょ)하겠습니까? 삼남(さんみなみ)은 영장(營將)을 더 설치하였으므로 군병(軍兵ぐんびょう)을 완전히 포기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양서(りょう西にし)는 단지 수령(もりれい)으로 하여금 이를 겸임하게 하였으므로, 여러 검칙(けん飭)하는 일들이 수령(もりれい)의 관문(せきあや)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기꺼이 생각을 기울이겠습니까? 만약 양서(りょう西にし)에 따로 영장(營將)을 설치한다면 반드시 그 공효(こうこう)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는데, 우의정(みぎせい) 이건명(けんいのち)이 말하길, "양서에 영장을 설치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 다만 양서는 전세(ぜい)가 매우 적은데, 만약 영장을 내보내면 반드시 늠료(廩料)를 주어야 할 것이고, 거느리는 병졸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조치(措置そち)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자, 이홍술이 말하길, "양서에는 긴요하지 않는 첨사(僉使)와 만호(まん)가 매우 많으니, 그 액수(がくすう)를 헤아려 줄이고 영장을 설치하면 새로 창설(創設そうせつ)하는 폐단이 없고 일도 반드시 착실해질 것입니다." 하므로, 이건명이 말하길, "갑자기 결정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びょうどう)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7]

1720년(숙종 46) 6월 8일 숙종이 승하 하였을 때 호위 궁성 훈련대장(扈衞宮城みやぎくん大將たいしょう)으로 흥화문(きょうもん)을 지키고 역모를 막았다. 병조 판서(兵曹へいそうばんしょ) 이만성(晩成ばんせい)은 개양문(開陽かいようもん)을 지켰는데, 모두 등()을 달고 조두(刁斗)를 쳐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그만 두었다. 이만성은 경계하여 지키며 잡인(雜人ぞうにん)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자못 엄하게 금하였다.[8]

1720년(경종 즉위년) 7월 11일 군기제조(ぐんひさげ調ちょう)를 거쳐 지중추부사(中樞ちゅうすうごと), 한성판윤(かんじょうばんいん)을 역임하하였다. 이해 9월 21일 김창집(きむあきらしゅう)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술사(じゅつ) 육현(りくげん)을 태장(むちつえ)을 쳐서 죽였는데, 육현김창집의 음모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김창집의 사주(使嗾しそう)를 받아 죽였다는 소론 측의 탄핵을 받았으나 경종이 듣지 않아 무사하였다. 이해 10월 3일 돈체사 훈련대장(ひたすら遞使 くん大將たいしょう), 돈체사 판윤(ひたすら遞使 ばんいん)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2월 4일 형조판서(けい曹判しょ)에 제수되고, 이해 4월 25일 훈련 대장(くん大將たいしょう)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이 아뢰길, "무변(武弁ぶべん) 중에는 의지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청컨대 대신에게 물으시어 사인(士人しじん)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군직(ぐんしょく)에 임명하여 무예(武藝ぶげい)를 권장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홍술도 또한 신계(さるけい)가 합당한 정상(情狀じょうじょう)을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9] 이해 7월 21일 특진관(特進とくしんかん)을 거쳐 이해 8월 10일 판윤(はんいん)에 제수되고, 연잉군(のべ礽君 : 영조)의 왕세제(おうおとうと)로 책봉하는데 기여하였다. 1722년(경종 2) 목호룡(むつみとらりゅう)이 경종 암살 미수범으로 지목해 투옥되었다.

이홍술의 옥중 졸기
이홍술(ひろしじゅつ)이 옥중(獄中ごくちゅう)에서 죽었다. 이홍술은 침착하고 굳세어 기사(騎射きしゃ)에 능했으므로, 젊어서 무과(たけ)에 급제하였다.
숙종조(肅宗あさ)에 평안도 절도사가 되어서는 명망이 무신 가운데 으뜸이었다. 숙종 42년에 훈련 대장에 승진되고 형조 판서를 지냈다.
숙종이 승하(のぼり遐)하자 금병(きんへい)을 거느리고 궁성(宮城みやぎ)을 호위하였는데, 행진(くだりじん)을 엄중히 하여 출입자를 기찰(そし察)하였다.
비록 수보(くび輔)인 김창집(きむあきらしゅう)의 명령도 받지 않았으므로, 궁문(宮門きゅうもん)이 숙연(肅然しゅくぜん)하여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경종(けいむね)이 즉위하여서는 대신(大臣だいじん)과 함께 저사(もうか嗣)를 세울 것을 청하여 임금이 허락하였으므로,
드디어 영종(えいむね)을 책립(冊立さくりつ)하여 왕세제(おうおとうと)로 삼았다.
그런데 김일경(かねいちきょう)이 은밀히 환관(宦官かんがん) 박상검(ほお尙儉)과 결탁하여 교지(はしむね)로 선전관(宣傳せんでんかん)을 발견(はつ)하여
이홍술의 병부(へい)를 빼앗았다.
처음에 이홍술이 포도 대장을 겸직하고 있을 적에 요인(妖人) 육현(りくげん)이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체포하여
장살(つえころせ)하였는데, 김일경이, '육현은 평소 김창집의 문하에 노닐었으므로, 그들의 은밀한 일을 알게 되자,
김창집이 그를 미워한 끝에 몰래 이홍술을 시켜 때려 죽임으로써 그 입을 봉하려 했던 것이다.'고 하면서
이홍술을 하옥(下獄げごく)시키고 고문을 가하여 힐문했으나, 이홍술이 사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옥졸(獄卒ごくそつ)들도 경복(警服)하였다.
서덕수(じょいさおおさむ)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므로 옥리(獄吏ごくり)가 결안(ゆいあん)에다 대신 압서(押署)하였다.
또 이홍술을 협박하니, 이홍술이 꾸짖어 말하기를, ‘죽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내가 어떻게 거짓 승복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승복하지 않은 채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76세였다.[10]

그해 목호룡이 삼급수(さんきゅう)를 이용한 경종 시해(弑害) 계획을 밀고하자, 그는 주동자로 몰려 신문을 받았으나 끝내 불복(不服ふふく)하고, 매를 맞아 옥중(獄中ごくちゅう)에서 1722년(경종 2) 5월 17일 향년 76세로 별세하였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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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 가산이 적몰(せきぼつ)되고, 그의 가옥은 목호룡에게 상급(しょうきゅう)으로 나갔다.

1725년(영조 1) 8월 11일 신원(しん寃) 되었고, 증 숭정대부(たかしせい大夫たいふ) 의정부좌찬성(ひだり贊成さんせい) 겸 의금부판사 세자이사(世子せいし)에 증직되었으며, 1727년(영조 3) 10월 6일 소론의 집권으로 추탈되었다가 1741년(영조 17) 복관되어 다시 추증되었다. 바로 충정(ちゅうじょう)이라는 시호(諡號しごう) 받았다.

1865년(고종 2) 9월 25일 의정부영의정(りょうせい) 조두순(ちょうあつし)이 아뢰길 "임인년(1722년)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로서 그 성취한 것이 단지 큰 변란을 평정하였다거나 큰 재난을 방지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세대가 변하여 단제(だんさい)를 지낼 날이 멀지 않았으니 부조지전(祧之てん)을 시행하여 공로를 기록해 두는 뜻을 부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여 대왕대비 명으로 그의 신주는 부조지전(祧之てん)이 되었다.[11]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水落みずおちさん) 청학동(あおづるほら) 계곡에 그의 신도비(神道しんとう)가 있다.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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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 이석한(すずかん, 1614년 ~ 1677년)
  • 어머니 : 증 정부인 김씨(さだ夫人ふじん きん, 1609년 ~ 1649년), 호군(まもるぐん) 경주인(慶州けいしゅうじん) 김광익(金光かねみつつばさ)의 딸.
    • 동복형 : 이홍일(ひろしはぐれ, 1640년 ~ 1718년), 백부 도정궁(みやこただしみや) 동지돈녕부사 이정한(ていかん, 1601년 ~ 1671년)에게 출계.
    • 동복형 : 이홍달(ひろしたち, 1645년 ~ 1662년)
  • 부인 : 증 정경부인 김씨(さだけい夫人ふじん きん, 1648년 ~ ?년), 증 승지(うけたまわむね) 광산인(光山こうやまじん) 김정탁(きむ廷鐸)의 딸.
    • 아들 : 이세희(禧, 1680년 ~ 1715년)
    • 장녀 : 청송인(あおまつじん) 심수징(沈壽ちょう)에게 하가.
    • 2녀 : 임천인(はやしがわじん) 조명복(ちょうあきらふく)에게 하가.
  • 서모 : 양녀(りょうおんな) 차영(えい)
    • 이복동생 : 이홍선(ひろしせん, 1652년 ~ 1725년)
    • 이복동생 : 이홍매(ひろし邁, 1655년 ~ 1743년)
    • 이복동생 : 이홍수(ひろしとげ, 1669년 ~ 1723년)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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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2. 숙종 16권, 11년(1685 을축 / 청 강희(かん熙) 24년) 4월 15일(갑진) 1번째기사
  3. 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かん熙) 34년) 6월 5일(을미) 2번째기사
  4. 숙종 39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かん熙) 43년) 3월 25일(갑자) 4번째기사
  5.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かん熙) 50년) 1월 24일(계축) 2번째기사
  6. 숙종 62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かん熙) 57년) 9월 5일(경진) 2번째기사
  7. 숙종 64권, 45년(1719 기해 / 청 강희(かん熙) 58년) 10월 20일(기미) 1번째기사
  8. 숙종 65권, 46년(1720 경자 / 청 강희(かん熙) 59년) 6월 8일(계묘) 2번째기사
  9. 경종 3권, 1년(1721 신축 / 청 강희(かん熙) 60년) 4월 25일(을묘) 2번째기사
  10. 경수 3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かん熙) 61년) 5월 7일(신묘) 1번째기사
  11. 고종 2권, 2년(1865 을축 / 청 동치(どう) 4년) 9월 25일(정해) 2번째기사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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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정홍좌
제75대 삼도수군통제사
1697년 9월 - 1669년 7월
후임
민함
전임
권성
제663대 한성부판윤
1721년 8월 20일 ~
후임
윤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