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지(祉)이며, 1427년(세종 9년) 홍녕군(弘寧君)에 봉해졌고[1], 2년 후 혜령군(惠寧君)으로 개봉되었다[2]. 1430년(세종 12년), 온녕군과 종학에서 싸움을 벌이고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세종이 그의 출입을 엄금하고 정2품 직첩과 녹봉을 거두어 벌하였으며, 세종은 혜령군의 광패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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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李祉)는 어릴 때부터 광패(狂悖)하고 교만하며 방자하여, 글을 읽게 하였으나 책을 펴 보기도 싫어하므로, 이에 활 쏘기를 배우게 하였더니 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끊임 없이 함부로 놀기만 좋아하였다.
일찍이 경회루 연못에 떨어져 죽게 된 것을 세자가 마침 보고 구원하여 살았는데, 나는 이르기를, ‘어린 까닭이니 자라서 철이 나면 반드시 여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미 장성하였는데 아직도 행동을 고치지 아니하는구나.
일찍이 남의 기생 첩을 빼앗아 광망(狂妄)함이 날로 심하므로, 그의 구사(丘史)를 잡아 가두고 명하여 집에 있게 하여 출입을 못하게 하고, 또 만나보지도 아니하여 스스로 마음을 고쳐 새로워지기를 기다렸으며, 또 학업(學業)을 폐할까 염려하여 종학(宗學)에서 수업(受業)하도록 하면서도 오히려 만나보지 아니하였더니, 막 종학에 나아가자마자 맨 먼저 금령을 범하여 함부로 장난을 하였으니, 그 광패(狂悖)함이 날로 늘어가매 내가 심히 근심한다.
”
1433년(세종 15년), 성절 하례(聖節賀禮)에 불참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1438년(세종 20년)에는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북경에 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아 돌아오는 공을 세웠다.
1440년(세종 22년) 사망하였다.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을 정지하고, 관곽과 쌀 콩 합하여 1백 석과 베 40필, 저포(苧布) 3필과 종이 2백 권을 주고,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정척(鄭陟)에게 호상(護喪)을 명하여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였다. 또한 혜령군에게 양회(襄懷)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세종이 친히 혜령군의 집에 가려 하였으나 더위 등을 이유로 신하들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4]
혜령군의 묘소는 처음엔 수원시 동문 안쪽에 위치 했었는데, 3년 뒤 억울하게 죽은 장인 심온의 묘를 왕자의 묘와 함께 나라에서 관리하길 원했던 세종의 명으로, 영통구 이의동 산234번지 경좌로 옮겼었다. 지금의 묘소는 2008년 광교역사공원 조성을 위해 안효공 심온 묘소의 서쪽 능선 옆으로 묘를 이전한 것이며, 혜령군의 묘역은 부인 무송 윤씨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들 예천군과 손자 축산군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현재 혜령군 묘소는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440-1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