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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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창군가 역사 시작 | ← | 1대 경창군 이주 | → | 2대 창원군 이준[1] |
조선 선조의 왕자 경창군 | | |||||||||||||||||||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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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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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 음력 9월 23일에 평안도 평양 행궁[4]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03년 경창군(慶 昌 君 )에 봉해지고 광해군 즉위 후 15살 때인 1610년 창녕 조씨 조명욱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5] 이후 1617년 음력 11월 인목왕후[6]에 대한 폐비론이 불거졌을 때는 폐비에 찬성하였다.[7]
인조 즉위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살았다. 1625년 음력 1월 21일에 있었던 소현세자의 관례를 주관하였고 그 공으로 안구마[8] 1필을 하사받았다. 1628년에는 역모 혐의를 뒤집어 쓴 인성군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1631년(인조 9년)에는 경창군 자신이 이귀와 김자점 등으로부터 폐단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1632년 음력 10월 16일에는 아들 양녕군이 회은군의 상소로 인해 역모에 휘말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양녕군이 경창군의 이복 형 임해군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경창군이 이러한 양녕군을 위해 남몰래 역모를 꾸민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국청까지 열렸으나 역모 고변이 거짓으로 판명나면서 경창군은 무사하였다. 한편 1636년에는 방한용 모피를 헐값에 사들여 매점매석을 저지르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이에 대해 별 다른 처벌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인조 즉위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살았다. 1625년 음력 1월 21일에 있었던 소현세자의 관례를 주관하였고 그 공으로 안구마[8] 1필을 하사받았다. 1628년에는 역모 혐의를 뒤집어 쓴 인성군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1631년(인조 9년)에는 경창군 자신이 이귀와 김자점 등으로부터 폐단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1632년 음력 10월 16일에는 아들 양녕군이 회은군의 상소로 인해 역모에 휘말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양녕군이 경창군의 이복 형 임해군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경창군이 이러한 양녕군을 위해 남몰래 역모를 꾸민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국청까지 열렸으나 역모 고변이 거짓으로 판명나면서 경창군은 무사하였다. 한편 1636년에는 방한용 모피를 헐값에 사들여 매점매석을 저지르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이에 대해 별 다른 처벌을 하지 않고 지나갔다.
- 적장녀 : 전주 이씨(
全 州 李 氏 , 1613 ~ ?) - 외손녀 : 이혜숙(
李 惠淑 , 1631 ~ ?) - 외손녀 : 이말숙(
李 唜淑, 1634 ~ ?) - 외손녀 : 이애숙(
李 愛 淑 , 1638 ~ ?) - 외손자 : 이재악(
李 載 岳 , 1647 ~ ?) - 외손자 : 이진악(
李 鎭岳, 1650 ~ ?) - 외손녀 : 이만애(
李 晚 愛 , 1655 ~ ?)
- 적장남 : 창원군(
昌 原 君 ) 이준(李儁, 1614 ~ 1639) - 손자 : 청평군 이전(
淸 平 君 ) 이천(李洤) - 손자 : 청흥정 이헌(
淸興 正 ) 이헌(李瀗) - 손자 : 청풍군 이옥(
淸 豊 君 ) 이옥(李沃)
- 적차녀 : 이옥란(
李 玉 蘭 , 1619 ~ ?) - 사위 : 류연(
柳 㝚, 1621 ~ ?)- 외손녀 : 류초원(
柳 初 媛 , 1638 ~ ?) - 외손녀 : 류현원(
柳 賢 媛 , 1639 ~ ?) - 외손자 : 류창운(
柳 昌 運 , 1642 ~ ?)
- 적3녀 : 이말란(
李 唜蘭, 1622 ~ ?) - 외손녀 : 심여취(沈女
翠 , 1643 ~ ?) - 외손녀 : 심여용(沈女
容 , 1647 ~ ?) - 외손자 : 심방(沈滂, 1652 ~ ?)
- 외손자 : 심장(沈漳, 1654 ~ ?)
- 측실 : 일은(
日 隱 ) - 양민 출신- 서장남 : 창림군(
昌 臨君) 이일(李佾, 1629 ~ 1690) - 의창군의 양자로 출계 - 손자 : 영풍군(
永 豐 君 ) 이항(李 沆) - 손자 : 영평군(
永 平 君 ) 이완(李 浣)
- 측실 : 득환(
得 環 ) - 속(贖) 양민- 서장녀 : 이백덕(
李 百 德 , 1630 ~ ?) - 사위 : 구취형(
丘 就衡) - 서차남 : 창흥군(
昌 興 君 ) 이수(李脩, 1638 ~ 1704) - 손자 : 고평군(
高坪 君 ) 이철(李澈) - 손자 : 고성군(
高城 君 ) 이석(李氵+奭) - 손자 : 고릉수(
高陵 守 ) 이즙(李濈)
- 측실 : 애운(
愛 雲 ) - 속(贖) 양민- 서차녀 : 이천금(
李 千 今 , 1634 ~ ?)
경창군은 창녕 조씨 조명욱의 딸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고, 측실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조씨 부인은 경창군보다 5년 먼저인 1639년에 사망하였다. 조씨 소생의 차남 양녕군은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요절하였고, 3남 평운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1659년에 수릉관에 임명되었다. 4남은 창성군[12]이다. 장녀는 이후걸에게, 차녀는 류연에게, 3녀는 심약하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두 아들은 창림군과 창흥군이다.[13]
따라서 현재 전주 이씨 임해군파, 신성군파 구성원의 대부분은 경창군의 후손들이다.[15]
조선 말 춘생문 사건의 주역 중 하나인 이도철[16], 의병장이었던 이소응[17]이 경창군의 후손이다.
따라서 현재 전주 이씨 임해군파, 신성군파 구성원의 대부분은 경창군의 후손들이다.[15]
조선 말 춘생문 사건의 주역 중 하나인 이도철[16], 의병장이었던 이소응[17]이 경창군의 후손이다.
경창군 후손들 중 일부는 조선 후기와 말기에 정식으로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왜냐하면 효종 이후 절손한 왕손들이 많아져서 왕실에서는 이들의 후사를 다른 파에서 양자를 들여 겨우 잇게 했는데, 이 때 입양왔던 사람들 대부분이 경창군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슬하에 아들을 14명 두었다. 그 중 8명은[18]은 실제 후손이 끊겼고[19], 나머지 6명[20]은 후사를 남겼다. 여기서 왕통이 이어지는 원종의 가계를 제외하면 그 중 그나마 가장 번성한 집안이 바로 경창군파였다. 그래서 양자가 나가더라도 기존의 본가에서 부담을 덜 느낄 수 있었다.[21]
선조는 슬하에 아들을 14명 두었다. 그 중 8명은[18]은 실제 후손이 끊겼고[19], 나머지 6명[20]은 후사를 남겼다. 여기서 왕통이 이어지는 원종의 가계를 제외하면 그 중 그나마 가장 번성한 집안이 바로 경창군파였다. 그래서 양자가 나가더라도 기존의 본가에서 부담을 덜 느낄 수 있었다.[21]
이렇게 후기 조선 왕실은 왕통 직계와 소수 종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창군의 후손들로 구성되었다. 이에 다른 경창군파 일원들 중에서도 왕실 사람들과 사실상 한 일가처럼 가깝게 지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 임해군의 양자로 출계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실은 고려 대상이었던 적이 있을 뿐 입양이 실행되진 않았다. 《선원록》이나 《선원계보기략》에는 양자로 들어간 부분이 나타나지 않으며 《경창군파보》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창원군이 경창군의 장남인 관계로 가독을 이어야 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임해군의 양자는 경창군의 차남 양녕군 이경이었다.[2] 선원록_출처[3] 조카 인조보다 1살 어리다.[4] 현 평양시 중구역 외성동[5] 당시 혼례는 정원군(원종)이 주관하였다.[6] 선조의 계비. 경창군에겐 적모(嫡母 ).[7] 반면, 친누나인 정정옹주 부부는 인목왕후 폐비론에 반대하였다.[8] 안장을 지운 말[9] 현재의 한국전력 자리[10] 선원록 [11] 광주부윤 심총의 아들 , 응교 심광세의 손자 , 증 영의정 심엄의 증손자, 병조판서 심의겸의 고손자[12]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 略 修正 儀 軌)》 1874년판을 보면, 영창대군의 사후 양자에 지명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13] 경창군 아들들의 봉호는 조씨 부인의 본관인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따왔다. 단, 양녕군은 양어머니(임해군 부인)의 본관 경기도 양천군[14]에서, 평운군 역시 양어머니(신성군 부인)의 본관 황해도 평산군에서 따왔다.[14]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15] 왜 대부분이냐면, 일부 구성원은 다른 파에서 입계했기 때문이다.[16] 서장남 창림군의 7대손.[17] 서차남 창흥군의 8대손.[18] 임해군, 광해군, 의안군, 신성군, 순화군, 의창군, 영창대군, 영성군.[19] 광해군은 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후사 없이 죽었다. 영성군 역시 아들 한 명이 있었지만, 그 아들의 대가 끊겨 무려 광평대군파에서 손자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20] 원종(정원군), 인성군, 경창군, 흥안군, 경평군, 인흥군.[21] 흥안군은 이괄의 난에 엮여 역적으로 죽었기에 그의 후손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22] 단, 낙천군 역시 친자식이 없어 양자로 은신군을, 그 은신군도 아들이 없어(...) 인평대군파의 남연군 이구를 입적시켜 현재까지 대가 이어져 온다.[23] 원래 풍계군의 양자는 원종의 2남이자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인 경평군 이호(이세보)였다. 그러나 1860년 세도가들을 비판하다가 그들의 눈에 찍혀 파양당했다.[24] 단, 흥완군 이정응은 친 아들 완림군 이재원이 있었다. 그러나 큰 형 흥녕군 이창응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집안의 종가를 잇게 하기 위해 양자로 보냈는데 흥완군 역시 일찍 죽음으로써 정작 자신의 후계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원래는 흥선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이 양자로 들어갔으나, 고종 즉위 후 이재면이 흥선군의 대를 잇기 위해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 양자를 들인 것.[25] 참고로 완순군 이재완의 양고조부인 낙천군 이온은 이재완의 생가 6대조 이정욱의 동생 이정수의 손자다.(쉽게 말해 친고조부의 6촌)[26] 단 청안군 이재순의 경우 역시 친자가 없어 소현세자파에서 양자 풍선군 이한용을 입적했다가 그 역시 자식이 없어 덕흥대원군파인 청풍군 이해승을 입양해 그 뒤를 이었다.(실제로는 월산대군의 후손. 월산대군파에서 덕흥대원군파로 입적한 집안 출신이다.)[27] 원음은 '게'인데 경창군파 족보에는 독음이 기로 되어 있다.[28] 6대 종주 이기의 동생 이재의 아들 이유수의 생자. 7대 종주 이유병과는 5촌 당숙 - 당조카 사이다.[29]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 흥완군의 양자가 된 완순군의 생부다.[30] 원래 형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 흥완군의 양자가 되어 나갔기에 그가 사손이 되었다. 참고로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친일파다.[31] 11대 종주 이재곤의 아들로 원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주가 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보다 4달 일찍 죽었다.[32] 12대 종주 이원용의 양자이자 이원용의 동생 이운용(李沄鎔)의 친자.[33] 이재곤 사후, 이미 죽은 이재곤의 장남 이원용의 첫째 아들 이해국(李海菊 )이 종주 자리를 바로 물려받았으나 6.25 전쟁 때 실종되고, 친동생 이해백(李海栢 )마저 북한군에게 피살당했는데 둘 다 후손이 없어 부득이 이해석이 이원용의 사후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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