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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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경호의 2집 수록곡에 대한 내용은 금지된 사랑(노래) 문서 참고하십시오.
원나라는 1261년부터 《요사》와 《금사》의 편수 계획을 시작하여 1276년에는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을 정복함과 동시에 황실 도서의 완전한 보존을 명령하면서 사서 편찬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런데 1279년, 남송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 성리학적 관점에서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어 계속 연기되었다. 원 조정내에서는 다양한 주장이 대립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송을 <본기>( 2. 요와 금을 《북사》( |
이처럼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결국
삼국 모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연호를 사용한다(三 國 各 與 正統 ,各 繫其年號)
|
<본기>(本紀 ) 19권, <지>(志 ) 39권, <표>(表 ) 4권, <열전>(列傳 ) 71권, 합계 13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대에 <금국어해>(金 國語 解 ) 1권이 추가되었다.
《금사》는 《요사》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편찬자들은 당나라 이래로 확립된 ‘설관수사'(設 館 修史 )[2]의 방식을 계승했고, 중국 정사를 편찬하기 위한 공식 기관이 설립되는 등 체계적이고 일관성있게 진행했다. 그런 점에서 정복 왕조가 편수했지만, 정통 왕조와 다를 바가 없어 의의하는 점이 크다. 게다가 위에서 상술했듯이 요, 송, 금 모두 평등하게 역사를 서술한 점 역시 이전의 화이론적인 중국 정사와 대비되어 역사학적 가치가 크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단기간에 편찬되어 사료가 엉성하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구오대사》,《신오대사》, 《송사》, 《요사》, 《금사》, 《원사》, 《명사》와 함께 고려 역사를 기록한 사서라 고려사 연구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사료이다.[3]
그리고 《구오대사》,《신오대사》, 《송사》, 《요사》, 《금사》, 《원사》, 《명사》와 함께 고려 역사를 기록한 사서라 고려사 연구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사료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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