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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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
호 | 구암( |
본관 | |
재임기간 | 제7대 경상남도지사 |
제4대 국토통일원장관 | |
1918년 3월 7일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에서 아버지 괴운(槐 雲 ) 신종삼(愼 宗三 , 1888. 1. 6 ~ 1945. 12. 16)과 어머니 풍천 노씨(豊川 盧氏, ? ~ ?. 3. 7)[6] 사이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사가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학부 졸업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대학원 연구과에 행정법 전공으로 진학하였다. 해방이 되자 연희전문학교 조교수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며[7], 동시에 대구대학 학장에 부임하여 각각 1954년까지 재직했다.
1951년 김성수 대한민국 부통령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5분과 회원에 정치학 전공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거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신중목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5년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다가 그만두었다. 1957년 4월 27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의 임기가 만료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김상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9년 11월부터 1960년 4월까지 관선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연루되었고 4.19 혁명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4.19 혁명 이후 구속되었다.
이후 정치생활을 접고 1969년 영남대학교 교수에 부임하면서 학계로 돌아왔으며, 영남대학교 내에 ‘한국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남북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는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1972년부터는 영남대학교 부총장을 겸임하기도 했으며,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국토통일원장관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명지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금까지의 친정부적 이력과 달리, 야당의 거물이자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는 김대중의 대북정책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평화민주당 및 신민주연합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99년 9월 6일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중앙길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사가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학부 졸업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대학원 연구과에 행정법 전공으로 진학하였다. 해방이 되자 연희전문학교 조교수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며[7], 동시에 대구대학 학장에 부임하여 각각 1954년까지 재직했다.
1951년 김성수 대한민국 부통령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5분과 회원에 정치학 전공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거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신중목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5년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다가 그만두었다. 1957년 4월 27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의 임기가 만료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김상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9년 11월부터 1960년 4월까지 관선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연루되었고 4.19 혁명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4.19 혁명 이후 구속되었다.
이후 정치생활을 접고 1969년 영남대학교 교수에 부임하면서 학계로 돌아왔으며, 영남대학교 내에 ‘한국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남북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는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1972년부터는 영남대학교 부총장을 겸임하기도 했으며,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국토통일원장관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명지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금까지의 친정부적 이력과 달리, 야당의 거물이자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는 김대중의 대북정책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평화민주당 및 신민주연합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99년 9월 6일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중앙길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 거창 신씨 집성촌이며, 전 국회의원 신성범도 이 마을 출신이다. 황산리 신씨 고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참조[2] 통례공파(通 禮 公 派 ) 30세 성(晟 ) 항렬.[3] 행정법 전공[4] 법학 박사학위 논문 : 蘇 聯 .中共 間 論爭의 '이데올로기'的 側面 考察 (소련.중공간 논쟁의 '이데올로기'적 측면고찰, 1970).[5]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 : 소련.중공간 경쟁의 「이데올로기」적 측면고찰.[6] 노정현(盧正鉉)의 딸이다.[7] 경성대학이 해체되고 서울대학교가 새롭게 설립되면서 문리과대학 내에 정치학과를 설치하였는데 1946년 창립 당시에는 학과 내 전임 교수가 신도성 교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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