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질라르디노
최근 수정 시각:
분류
- 1982년 출생
- 1999년 데뷔
- 2018년 은퇴
- 피에몬테 주 출신 인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 이탈리아의 축구 감독
- 스트라이커
- 피아첸차 칼초/은퇴, 이적
- 엘라스 베로나 FC/은퇴, 이적
- 파르마 칼초 1913/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ACF 피오렌티나/은퇴, 이적
- 제노아 CFC/은퇴, 이적
- 볼로냐 FC/은퇴, 이적
- 광저우 FC/은퇴, 이적
- 팔레르모 FC/은퇴, 이적
- 엠폴리 FC/은퇴, 이적
- 델피노 페스카라 1936/은퇴, 이적
- 스페치아 칼초/은퇴, 이적
- FC 프로 베르첼리 1892/역대 감독
- 시에나 FC/역대 감독
- 제노아 CFC/역대 감독
-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200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201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라질 참가 선수
- 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감독 대행/축구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수상자
알베르토 질라르디노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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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질라르디노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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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질라르디노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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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oa Cricket and Football Club SpA | ||
이름 |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Alberto Gilardino | |
출생 | ||
국적 | ||
신체 | 184cm, 79kg | |
직업 | ||
경력 | 유스 | |
선수 | ||
감독 | ||
국가대표 | 57경기 19골 (이탈리아 / 2004~2013) |
피아첸차에서 축구를 시작해 2000년 1월 6일에 17세의 나이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2000년 3월 25일, AC 베네치아전에서 프로 첫 골을 기록하였다.
2000년 7월 1일 피아첸차와 공동소유의 조건으로 엘라스 베로나로 이적하였다. 2002-03 시즌에는 파르마로 이적하였다. 처음에는 출장기회가 적었지만 2002-03 시즌 종료 후 아드리아누, 아드리안 무투의 이적으로, 출전 기회가 좀더 늘게 되었다. 2003-04 시즌에는 주전자리를 확보하고 리그에서 23골을 기록하며, 안드리 셰브첸코에 이어 득점 2위 (이탈리아 선수 중에서는 1위)라는 결과로 끝내고 그 지명도가 단번에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2004-05 시즌에도 똑같이 리그에서 23골을 기록하며, 득점 2위를 차지했다. 거기에 질라르디노 본인은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소속팀 파르마는 모기업의 파산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며 처절한 강등 플레이오프 끝에 가까스로 세리에 A에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2005년 7월 17일,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이적 초기에는 선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침체와 알렉산드르 파투의 대두로 인해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탈리아 대표팀과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
2008년 5월 28일에 출전 기회를 모색하기 위하여 파르마 시대의 은사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이 지휘하는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을 결정하였다. 이적 후 첫 시즌이 된 2008-09 시즌에서는 리그 19골과 팀을 견인하고 UCL 출전권 획득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이 활약과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마르첼로 리피가 다시 취임 한 것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탈리아 대표에 복귀하였다.
2008년 10월 18일에 열린 세리에 A 7라운드 레지나 칼치오 전에 2골을 넣으며 세리에 A 통산 100골을 달성하였다. 2012년 1월 3일, 제노아 CFC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14경기에서 4골에 그쳤다. 팀도 마지막까지 잔류 싸움에 휘말리며 17위에 그쳤다. 2012년 8월 31일, 마르코 보리엘로의 영입에 따라 마르코 디 바이오의 후임으로 볼로냐에 임대 이적하였다.
2013-14 시즌 제노아로 복귀하여 주전으로 꾸준히 출장해 24라운드 종료기준 12골로 루카 토니, 안토니오 카사노, 로드리고 팔라시오등과 함께 세리에의 30대 스트라이커 돌풍의 주역이 되었다.
2014년 7월 11일 광저우 헝다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5m 유로, 계약 기간은 2년 6개월이며 연봉은 5m 유로이다. 2015년 1월 28일 ACF 피오렌티나로 6개월 임대되었다. 그리고 마리오 고메스를 밀어내버렸다.
2015년 8월 28일 US 팔레르모 이적이 확정되었다. 2016년 7월 7일 엠폴리 FC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간으로 알려졌다. 2017년 1월 9일 델피노 페스카라 1936 이적이 확정되었다. 2017년 10월 3일 자유계약으로 스페치아 칼초 이적이 확정되었다.
2000년 7월 1일 피아첸차와 공동소유의 조건으로 엘라스 베로나로 이적하였다. 2002-03 시즌에는 파르마로 이적하였다. 처음에는 출장기회가 적었지만 2002-03 시즌 종료 후 아드리아누, 아드리안 무투의 이적으로, 출전 기회가 좀더 늘게 되었다. 2003-04 시즌에는 주전자리를 확보하고 리그에서 23골을 기록하며, 안드리 셰브첸코에 이어 득점 2위 (이탈리아 선수 중에서는 1위)라는 결과로 끝내고 그 지명도가 단번에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2004-05 시즌에도 똑같이 리그에서 23골을 기록하며, 득점 2위를 차지했다. 거기에 질라르디노 본인은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소속팀 파르마는 모기업의 파산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며 처절한 강등 플레이오프 끝에 가까스로 세리에 A에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2005년 7월 17일,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이적 초기에는 선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침체와 알렉산드르 파투의 대두로 인해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탈리아 대표팀과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
2008년 5월 28일에 출전 기회를 모색하기 위하여 파르마 시대의 은사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이 지휘하는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을 결정하였다. 이적 후 첫 시즌이 된 2008-09 시즌에서는 리그 19골과 팀을 견인하고 UCL 출전권 획득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이 활약과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마르첼로 리피가 다시 취임 한 것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탈리아 대표에 복귀하였다.
2008년 10월 18일에 열린 세리에 A 7라운드 레지나 칼치오 전에 2골을 넣으며 세리에 A 통산 100골을 달성하였다. 2012년 1월 3일, 제노아 CFC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14경기에서 4골에 그쳤다. 팀도 마지막까지 잔류 싸움에 휘말리며 17위에 그쳤다. 2012년 8월 31일, 마르코 보리엘로의 영입에 따라 마르코 디 바이오의 후임으로 볼로냐에 임대 이적하였다.
2013-14 시즌 제노아로 복귀하여 주전으로 꾸준히 출장해 24라운드 종료기준 12골로 루카 토니, 안토니오 카사노, 로드리고 팔라시오등과 함께 세리에의 30대 스트라이커 돌풍의 주역이 되었다.
2014년 7월 11일 광저우 헝다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5m 유로, 계약 기간은 2년 6개월이며 연봉은 5m 유로이다. 2015년 1월 28일 ACF 피오렌티나로 6개월 임대되었다. 그리고 마리오 고메스를 밀어내버렸다.
2015년 8월 28일 US 팔레르모 이적이 확정되었다. 2016년 7월 7일 엠폴리 FC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간으로 알려졌다. 2017년 1월 9일 델피노 페스카라 1936 이적이 확정되었다. 2017년 10월 3일 자유계약으로 스페치아 칼초 이적이 확정되었다.
2004년의 UEFA U-21 챔피언십에서 다니엘레 데 로시 등과 함께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 2004년 8월 30일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에 첫 발탁되어 9월 4일 의 노르웨이전에서 대표 데뷔를 장식하였다. 같은 해 10월 13일, 벨라루스 전에서 A매치 첫 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4골을 넣으며 이탈리아 U-23 대표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2차전에서 미국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였고, 4강전에서 독일을 상대로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쐐기골을 어시스트 하여,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공헌하였다.
성적도 꾸준하지만 그가 특히 국가대표팀에 잘 뽑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前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프란델리의 영향이다. 파르마 시절 그를 발굴하고 세리에 A 정상급 공격수로 조련하고 밀란 시절 카카의 따까리[1]를 해주다 기량이 하락하면서 이적한 피오렌티나에서 재회해 다시금 부활하게 해준 감독이라 그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장 잘 알고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를 가장 아끼는 감독이기도 하기 때문.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2차전에서 미국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였고, 4강전에서 독일을 상대로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쐐기골을 어시스트 하여,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공헌하였다.
성적도 꾸준하지만 그가 특히 국가대표팀에 잘 뽑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파르마 입단 후 대성하여 아드리아누와 아드리안 무투가 떠난 파르마에서 홀로 팀의 득점을 다 책임지는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펼친 공격수. 개인능력에 의존하는 정통 스트라이커는 아닌 포스트 플레이, 연계에 굉장히 능한 지능적인 타겟맨이며, 제공권도 훌륭해서 미드필더진의 지원을 받으면 받을수록 엄청난 득점력을 뽐냈던 선수다. 이것이 여실히 드러나는게 2004-05 시즌 파르마의 세리에A 성적. 상대팀 신경 안 쓰고 대놓고 팍팍 지원했을뿐인데, 질라르디노가 리그 23골이나 넣은 덕분에 리그 17위로 간신히 잔류했었다.
누가 이탈리안 스트라이커 아니랄까봐 테크닉도 훌륭하고, 퍼스트 터치도 좋은 편. 과거의 클래식한 스트라이커들처럼 최소한의 터치로 슈팅을 때리는 능력과 간결한 연계 능력을 모두 갖췄었다. 간결하고도 정확한 퍼스트 터치로 아주 좋은 위치에 공을 떨어뜨려 놓던 선수였다. 거기에 슈팅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선수였는데 위력적인 강슛, 정확한 발리슛, 아웃프론트 킥이나 아웃사이드 칩슛 등 화려한 슈팅부터, 골키퍼를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방향과 높낮이만 바꾸어 가볍게 툭 밀어넣는 슈팅 능력에 천부적인 슈팅 타이밍을 모두 가졌으며, 거기에 화려한 발리 슈팅과 우아한 터닝 슈팅 능력도 모두 갖춘 선수였다. 거기에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헤더에 피지컬이 아주 튼튼하지는 않지만 지능적인 몸싸움으로 상대 수비와의 경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던 선수였다.
전성기 시절엔 특히 순간적인 침투와 슛 타이밍도 굉장히 빨라서 리버풀로 이적하기 전이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 페르난도 토레스와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때 까지만 하더라도 질라르디노가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의 밀란에서의 생활 때처럼 최전방 공격중심인 자신이 아닌 주위의 다른선수
2019년 7월 11일 FC 프로 베르첼리 1892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20년 9월 8일 ACN 시에나 감독에 선임되었다. 2021년 1월 12일 계약을 상호 해지하며 팀을 떠났으나, 한 달 만에 복귀한다.
2021년 10월 24일, 경질 소식이 발표되었고 팀을 떠났다.
2022년 7월 1일, 제노아 프리마베라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2년 12월 6일, 제노아 CFC가 알렉산더 블레신 감독을 경질한 후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이후 2023년 1월 4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정식 감독 전환 이후에도 호성적을 이어가 중위권에 처져 있던 제노아를 2위까지 끌어올렸으며, 2023년 5월 6일 아스콜리 칼초를 2-1로 꺾고 세리에 A 승격을 확정지었다. 2024년 5월 20일, 제노아와 재계약을 하였다.
3-4-1-2와 3-5-2 전술을 즐겨 활용하는 감독으로 낮은 블록을 쌓고 견고한 조직력과 역습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감독이다. 최근 이탈리아에 등장한 젊은 감독들이 지안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의 영향을 받았고 이반 유리치와 라파엘레 팔라디노와 같이 이를 지향점으로 하는 감독들이 생겼지만, 질라르디노의 전술은 좀 더 고전적인 카테나치오에 가깝다.
질라르디노가 제노아 CFC를 최종 12승 13무 13패 승점 49점으로 11위로 안착시킨 것에도 이러한 전술에서 나오는 단단한 수비와 조직력, 순간적인 역습을 잘 활용한 것이 주요했다. 그 대신 축구가 정말 재미없다. 조직력과 선수비 후역습을 선호하며, 부분적인 역압박만 수행하는 탓에 경기가 지루하다는 평이 대다수다.
2020년 9월 8일 ACN 시에나 감독에 선임되었다. 2021년 1월 12일 계약을 상호 해지하며 팀을 떠났으나, 한 달 만에 복귀한다.
2021년 10월 24일, 경질 소식이 발표되었고 팀을 떠났다.
2022년 7월 1일, 제노아 프리마베라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2년 12월 6일, 제노아 CFC가 알렉산더 블레신 감독을 경질한 후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이후 2023년 1월 4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정식 감독 전환 이후에도 호성적을 이어가 중위권에 처져 있던 제노아를 2위까지 끌어올렸으며, 2023년 5월 6일 아스콜리 칼초를 2-1로 꺾고 세리에 A 승격을 확정지었다. 2024년 5월 20일, 제노아와 재계약을 하였다.
3-4-1-2와 3-5-2 전술을 즐겨 활용하는 감독으로 낮은 블록을 쌓고 견고한 조직력과 역습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감독이다. 최근 이탈리아에 등장한 젊은 감독들이 지안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의 영향을 받았고 이반 유리치와 라파엘레 팔라디노와 같이 이를 지향점으로 하는 감독들이 생겼지만, 질라르디노의 전술은 좀 더 고전적인 카테나치오에 가깝다.
질라르디노가 제노아 CFC를 최종 12승 13무 13패 승점 49점으로 11위로 안착시킨 것에도 이러한 전술에서 나오는 단단한 수비와 조직력, 순간적인 역습을 잘 활용한 것이 주요했다. 그 대신 축구가 정말 재미없다. 조직력과 선수비 후역습을 선호하며, 부분적인 역압박만 수행하는 탓에 경기가 지루하다는 평이 대다수다.
- AC 밀란 (2005~2008)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6-07
- UEFA 슈퍼컵: 2007
- FIFA 클럽 월드컵: 2007
- FIFA 월드컵: 2006
- 이탈리아 U-23 축구 국가대표팀
- 올림픽 동메달: 2004
- 이탈리아 U-21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U-21 챔피언십: 2004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4-05
- 세리에 A 올해의 영플레이어: 2003-04
-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 2004-05
- UEFA U-21 챔피언십 MVP: 2004
- UEFA U-21 챔피언십 득점왕: 2004
- 이탈리타 공화국 공로장 5등급: 2004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2006
선수 시절 잘생긴 선수였다. 그러나 남자의 주적 탈모에 겪게되면서 폭삭 늙어버렸다.
바이올린 골 세리머니로 유명하다. 좋은 연계 플레이와 특유의 세리머니로 그라운드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렸다
밀란에서 뛰던시절 말년의 활약상이 좋지 않은 관계로 키배의 대상이 되었는데[3] 이시기 이탈리아 축구 팬사이트 세리에매니아에서 질라르디노 관련 글만 올라오면 무조건 100플[4]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세리에매니아에서 질라르디노의 이름 자체가 떡밥왕의 의미로 통하기도 한다. 밀란을 떠난지도 한참이 지난 2014년에도 게시판이 불타오를 만한 관련주제가 올라오면 질라르디노 등판하나요? 라는 댓글들을 심심찮게 볼수있다.
아드리아누와 비슷한 시기에 주목을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편.[5] 이 때문에 아드리아누에 비해 과소평가 받는 면이 강한데 득점력에서 만큼은 대부분의 시즌 동안 아드리아누는 질라르디노를 꺾은 적이 별로 없다. 그 망했다는 밀란 시절조차 아드리아누보다 득점 페이스만은 더 좋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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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카의 공간침투를 위한 미끼로 수비진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덕분에 2003-04 시즌 부터 이어진 시즌 두자릿수 골 기록이 2006-07 시즌을 마지막으로 끊기기도 하였다.[2] 11번이 질라르디노다.[3] ex: 질라르디노 못하네요→ 미들진 지원이 좋지않아 못하는거임 → 잘하는 선수들은 지원 없어도 잘하던데?→ 패스자체가 안오는데 어떻게 활약함?→ 못하니까 신뢰가 안가서 패스 안주는거 아님? → 그러니까 지원 못받아서 못함! 의 무한루프[4] 어그로성 글도 아니고 말 그대로 질라르디노 부진에 관련한 순수 토론 글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토론이 끝나질 않았다. 단순 어그로성 글이면 무시하거나 운영진에서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말 그대로 토론글들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의견을 무시할수 없었다.[5] 파르마 소속 동기였던 아드리아누가 2004년 인테르 이적 후 코파 이탈리아 2연패와 브라질 국대에서 2004 코파 아메레카 MVP + 득점왕, 2005 컨페더레이션스컵 MVP + 득점왕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써버린 탓에 본인의 뛰어난 기록에도 불구하고 소속팀의 차이와 우승컵의 유무로 상대적으로 너무 덜 주목받은 편. 참고로 질라르디노의 당시 개인 수상 기록만 봐도 2004 UEFA U-21 챔피언십 MVP + 득점왕, 2003-04 세리에 A 올해의 영플레이어, 2004-05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4-05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 등 개인상을 휩쓸었다.[6] 파르마 소속으로 2003-04 시즌 26골, 2004-05 시즌 25골을 기록했으며 밀란에서도 첫 시즌인 2005-06 시즌에 19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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