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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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제2대 국왕 움베르토 1세 Umberto I | |||||||||||||||||||
출생 | |||||||||||||||||||
사망 | |||||||||||||||||||
재위기간 | 이탈리아 국왕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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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1895년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더 얻기 위해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도와 전투에서 메넬리크 2세에게 대패했고, 영국의 반격으로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일부도 잃었다. 결국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전하고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움베르토 1세 (Umberto I) | |||
카리냐노 공 카를로 에마누엘레 (Charles Emmanuel, Prince of Carignano) | |||
작센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공주 (Princess Maria Christina of Saxony)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Theresa of Austria) | |||
오스트리아의 라이너 대공 (Archduke Rainer of Austria) | |||
사보이아의 엘리사베타 공녀 (Princess Elisabeth of Savoy) | |||
카리냐노 공 카를로 에마누엘레 (Charles Emmanuel, Prince of Carignano) | |||
작센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Princess Maria Christina of Saxony) |
사보이아제노바의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Savoia-Genova 1851~1926). 풀네임은 마르게리타 마리아 테레사 지오반나(Margherita Maria Teresa Giovanna).
왕비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는 친사촌으로[5] 피자 마르게리타의 어원이 된 사람이다. 결혼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두었으나 제왕절개로 출산해서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외아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제왕절개로 인한 불임은 둘째치고 결혼 초창기에 움베르토 1세의 불륜이 걸리면서 부부관계는 일찍부터 파탄나고 말았다. 다만 부부관계가 벌어졌을 뿐 인간관계까지 벌어지지는 않아서 마르게리타는 움베르토를 남편이 아닌 왕으로 대하긴 했고 움베르토 1세 역시 정치적으로 왕비에게 많이 의존했다.
자신과 외모, 생년월일까지 똑같은 도플갱어를 발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왕의 도플갱어였던 남자는 레스토랑의 주인이었고, 왕 즉위일과 레스토랑 개업일이 일치하며, 아내와 아들의 이름이 왕태자비와 왕태자의 이름과 각각 일치했고, 같은날 입대하여 군생활 때 2개의 훈장을 받고 같은 날에 전역했으며, 왕이 암살당한 날 그도 총기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서프라이즈에서도 백인 연기자들을 통해 재현했지만 여기서는 그 레스토랑 주인이 죽었을 때 움베르토 1세는 무사했다고 결말을 보여줬다.
조이수호통상조약이 움베르토 1세의 치세에 맺어졌다. 한국은 고종 치세.
움베르토 1세의 조카이자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의 아들인 아브루치 공작 루이지 아메데오는 1895년에 조선을 방문하여 한양 경복궁 건청궁에서 고종을 알현한 적이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고종 32년 음력 6월 2일 기사에 기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아브루치 공작'을 공작 아부리(公爵 阿 夫 里 ) 또는 단순히 아부리라고 기록하였는데, '아부리'는 앞서 5월 27일경에 인천항을 경유해 입국하였고 이때 고종은 외부협판 윤치호에게 명하여 인천항에 급히 가서 아부리를 영접하게 했다.# 아부리는 이 조선 방문에서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부지에 있던 종정사(宗 正司 )에 거처하였다가 곧 본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유추된다.[6]
조이수호통상조약이 움베르토 1세의 치세에 맺어졌다. 한국은 고종 치세.
움베르토 1세의 조카이자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의 아들인 아브루치 공작 루이지 아메데오는 1895년에 조선을 방문하여 한양 경복궁 건청궁에서 고종을 알현한 적이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고종 32년 음력 6월 2일 기사에 기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아브루치 공작'을 공작 아부리(
[1] 지금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이 당시에는 매우 큰 장신이였다. 출처[2] 사보이아 왕조의 계승 전통을 따르면 움베르토 4세가 되는데 마지막으로 움베르토라는 이름을 사용한 군주는 나중에 복자로 시복된 움베르토 3세였고 무려 700년 전 인물이었다. 원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로 바꾸자는 여론이 있었는데 그대로 유지하였다.[3] 완전히는 1890년[4] 이탈리아는 1889년에 사형제를 폐지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기인 1926년에 사형제가 부활하였으나, 1948년 1월 1일부로 다시 폐지되어 현재까지 없다.[5] 움베르토 1세의 숙부인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Ferdinando di Savoia-Genova, 카를로 알베르토의 차남)의 딸.[6] 종정사는 조선왕조 왕실 사무를 다루던 기관이다. 예전 이름은 종친부(宗 親 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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