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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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성종이 재위하던 991년(성종 10) 병관시랑 한언공의 건의로 북송의 추밀원을 따라서 중추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현종 즉위 직후 강조가 중추원을 폐지, 중대성(中臺 省 )을 설치하여 초대 중대성 장관인 중대사(中臺 使 )가 되었다가 강조 실각 뒤 1011년(현종 2) 중대성이 없어지고 다시 설치되었고 강감찬이 중추사가 되었다. 1095년(헌종 1)에는 추밀원으로 바뀌었다.
원 간섭기 관제 격하로 1275년(충렬왕 1) 밀직사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 옛 제도에 따라 추밀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밀직사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서는 여말선초를 이어 건국 직후 잠시 존치시켰다가 삼군부, 승추부(承 樞 府 ), 중추부로 이어진다.
현종 즉위 직후 강조가 중추원을 폐지, 중대성(
원 간섭기 관제 격하로 1275년(충렬왕 1) 밀직사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 옛 제도에 따라 추밀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밀직사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서는 여말선초를 이어 건국 직후 잠시 존치시켰다가 삼군부, 승추부(
고려에서는 군사 및 군정 위원인 종2품 ~ 정3품 추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정3품 승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추밀(
樞密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종2품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종2품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종2품
- 중추원부사 (부사) - 정3품 (2인)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 정3품
종2품 판원사(
- 승선(
承 宣 )
종1품에서 종2품에 이르는 중서문하성 재신(宰 臣 )에 비해 종2품에서 정3품에 이르는 중추원 추밀의 품계가 부재상급으로써 다소 낮아보이나 양부 재상의 위상으로서 도병마사, 도평의사사, 식목도감 등에 참여하여 군국의 기무를 다루었고 고려 전기에는 재신의 6부의 판사를 추신이 상서육부의 상서를 겸직하며 주요 권력을 양부의 재상이 갖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왕조에서 재신과 추신의 직책을 굳이 구분지은 연유는 재상권을 분할한 송나라의 체제를 도입하여 다수 재상들의 합의제로써 신권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염두에 둔 중국사 당송의 관제와 정사암, 화백회의 등의 한국사 고유의 군신 합의제도를 적절히 조화시킨 역사적 정치체제로 여겨진다. 다만 당송제의 추밀원복사 붙여넣기 도입으로 왕권강화를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추원은 문벌귀족, 권문세족들의 합좌기구로써 왕권을 제약하는 신권강화의 관부로도 기능함으로써 군약신강의 체제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고려의 역사에서 한국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고려왕조에서 재신과 추신의 직책을 굳이 구분지은 연유는 재상권을 분할한 송나라의 체제를 도입하여 다수 재상들의 합의제로써 신권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염두에 둔 중국사 당송의 관제와 정사암, 화백회의 등의 한국사 고유의 군신 합의제도를 적절히 조화시킨 역사적 정치체제로 여겨진다. 다만 당송제의 추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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