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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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에는 예법에 따라 화려하게 장신한 의식용 기물인 깃발, 악기, 부채, 지팡이, 우산을 들고 임금이 탄 초오련을 호위하는데 행렬대의 팔관의위는 3726명, 팔관 노부는 548명이 참여했을 만큼 대규모이다.
고려가 팔관회(八 關 會 )를 개설(開設 )하였다. 신라 진흥왕(眞 興 王 ) 이래로부터 여러 대를 지나 궁예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중동(仲冬 )에 팔관회를 크게 개설하여 복을 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 )가 그 제도에 따르기를 청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궁궐 뜰에 윤등(輪 燈 ) 한 곳을 설치하고, 그 곁에 향등(香 燈 )을 벌여 놓고서, 온땅에 가득히 광명으로 밤을 새웠다. 또 신라의 화랑을 본떠서 양가(良家 )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옷을 입혀 뜰에서 줄지어 춤추게 하였다. 또 두 개의 채붕(綵棚 화려하게 꾸민 가설무대)을 마련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5장(丈 ) 남짓 되는데 모양이 연대(蓮臺 )와 같아, 바라보면 덩그렇고 아득하였다. 그 앞에서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였는데, 그 중 사선악부(四 仙 樂 府 )의 용ㆍ봉황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 )였다. 백관이 모두 포홀(袍 笏 도포와 홀. 즉 조복차림)로 예를 행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이 온 도성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왕은 의봉루(儀 鳳 樓 )에 거둥하여 관람하였으며,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여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상례(常例 )를 삼았다.『동사강목』 제5하 918년
918년 궁예를 축출한 직후부터 고려에서는 팔관회를 국가 행사화하였다. 동사강목에서는 이 918년의 팔관회에서 옛 화랑을 본떠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아름다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게 하고 이들을 선랑이라 하였는데 모두 신라의 고사(
참고로 팔관회는 고구려 승려 혜량이 진흥왕의 명을 받아 개최하기 시작했는데 고구려에서도 불교는 소수림왕 때 삼국 중 가장 먼저 전래된 이래 나중의 백제나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굉장히 밀착해 있었으니만큼 당연히 왕실 주관의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었을 것이고[3] 혜량은 고구려의 고승이었으니 그런 각종 제도적 지식에 대해 굉장히 해박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4] 그리고 아마 이 점 때문에 공인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자체적인 역량이 모자랐던 신라 불교계에서 각종 제도정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 과정에서 이미 알고 있던 고구려 불교 제도의 지식을 활용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고려의 팔관회는 고구려 불교의식의 그림자가 돌고 돌아 후계국인 고려까지 다다르게 된 셈이 된다.[5]
단 고려 팔관회의 불교적 색채는 다소 옅어지게 되었다. 태조 왕건이 훈요 10조에서 '천령(
그런데 유교 우선적 정책을 펼친 성종은 "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지랄이다(...)."라며 훈요 10조를 무시하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를 폐지(987년)해버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이후 현종 때에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중 팔관회는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써 현종이 정당문학 최항의 권유에 따라 다시 개최한 것인데, 대내적으로는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관을 견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천자국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한 국가 중흥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팔관회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구국 영웅들과 국가의 번영 또한 기원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6].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행해졌다.
팔관회와 관련된 사건으로 1170년 의종 24년의 팔관회에서 무신정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했던 곳 역시 팔관회 장소였다.[7]
[1]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연등회는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회는 천령(天 靈 )ㆍ오악(五 嶽 )과 명산(名山 )ㆍ대천(大川 )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 여러 토속 신앙들의 종교의식을 통합해 중앙집권화를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3]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뒤 바로 시작한 게 백좌강회와 팔관법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는데 인도나 티베트, 중국 같은 선진불교지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도 이런 법회 등의 의식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4]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당대에 승려는 유럽의 수도자들처럼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공부에 몰빵한, 유교를 공부한 유학박사와 더불어 최고 지식인 계층이었고 따라서 명성이 있다면 백제로 간 도림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나라를 가도 웬만해선 크게 환영받았다.[5] 물론 각각 시공간이 다른 신라와 고려에서의 토착화가 있었고 또 시대에 따른 변화도 컸으니 오리지날 그대로 내려왔을 리는 만무하겠지만.[6] 2018년 국가직 9급 한국사 과목에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것. 선택지를 안 보고 지문만 보면 팔관회인지 연등회인지 모른다.[7] 물론 실패했다.[8] 사실 조선왕조실록에 불교로 검색해보면 나오지만, 조선시대에는 거의 기승전불교 수준으로 불교를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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