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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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한글전용은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의 흐름속에 있었다. 서구의 표음문자인 알파벳의 존재와 서구의 낮은 문맹률에 힘입은 기계문명에 인상을 받은 동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은 표의문자인 한자를 전근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자국의 언어 생활에서 한자를 타파하는 것을 계몽의 일환으로 보았다. 루쉰 등의 지식인은 한자가 죽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는 구호인 '한자불멸중국필망'(漢字 不滅 中國 必亡)을 주장했고, 이에 힘입어 주음부호나 '라틴화 신문자'(拉 丁 化 新 文字 方案 )를 이용해서 중국어를 표음표기(한글이나 라틴문자와 같이 소리를 적는 것)하는 방안을 실험했다.
한글전용은 한반도만의 독특한 이슈가 아니라 '문자개혁'이라는 20세기 한자문화권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이 문자개혁 운동은 각 국가 및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실현되었다. 1950-60년대에 이르러 각 국가에서 정착되었는데, 전통식 고전 표의문자의 존치를 보수, 전면 폐기를 진보라 하였을 때, 그 스펙트럼은 보수로부터 진보까지 다음과 같다.
한글전용은 한반도만의 독특한 이슈가 아니라 '문자개혁'이라는 20세기 한자문화권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이 문자개혁 운동은 각 국가 및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실현되었다. 1950-60년대에 이르러 각 국가에서 정착되었는데, 전통식 고전 표의문자의 존치를 보수, 전면 폐기를 진보라 하였을 때, 그 스펙트럼은 보수로부터 진보까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한글전용 문제도 민족주의적 혹은 국수주의적 관점뿐만 아니라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2000년대 들어오기까지 확실한 노선을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한 면이 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편의상의 문제 등으로 한글을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용하는 방안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한자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고, 당시의 신문에선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는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여 정보를 전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신문들은 성향이 어떻든 식자층을 대상으로 했기에 국한문혼용체였으며, 조선총독부에서 펴내는 각종 정책 홍보물(예: 창씨개명 독려, 징병 등)은 한글전용으로 표기했다. 이는 물론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조선인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거나, 행정 조치에 순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글 사용은 위축되지만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한문혼용체 대신 한글전용을 추구하던 스승 주시경을 따라 언어학자 최현배는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던 조선교육심의회의 전체회의에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통과시켰다.#
이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다음과 같이 법률을 제정한다. 여섯번째로 제정된(법률 제6호) 유서깊은 법률이다.
이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다음과 같이 법률을 제정한다. 여섯번째로 제정된(법률 제6호) 유서깊은 법률이다.
그리고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며 부칙 제2조에 따라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은 폐지되고, 해당 규정은 국어기본법으로 이전되며 약간의 보완을 거쳤다.
국어기본법 제14조(공문서의 작성) ① 공공기관등의[2]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 ② 공공기관등이 작성하는 공문서의 한글 사용에 관하여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공문서의 작성과 한글 사용) 법 제14조제1항 단서에 따라 공공기관의 공문서를 작성할 때 괄호 안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는 경우는 다음 각 호와 같다. 1.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2. 어렵거나 낯선 전문어 또는 신조어( |
이는 완벽하게 한글전용이라기 보다는 보조어 병기를 일정 부분 허용하는 것이다. 또한 이 법령은 사적인 문서의 한글전용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문서는 일찍부터 한글전용이 대세가 되었는데 세벌식 타자기가 보편화된 데다가 중국과 일본에서 보급된 한자 타자기의 사용 방법이 너무 불편하여 일일이 한자를 한 글자씩 찾아서 써야 되는데, 컴퓨터가 발달한 훗날처럼 한자를 자동으로 찾아주는 기술 따위는 없었다보니 문서 작성에 오랜시간이 걸려 손으로 쓰는 것보다 속도가 빠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법령으로 한국에서는 한글전용과 한자 병기가 혼용되고 있다.
정책적으로 한글전용을 처음 실시한 것은 박정희 정부였다. 박정희는 한글전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과 얘기를 나눈 뒤 한글전용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는 대학생들이 가져온 한글전용 계획을 살핀 뒤 1968년 5월 내각에 1973년을 목표로 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자신도 문서 작성과 명패 등을 모두 한글로 바꾸었다. 10월에는 목표년도를 1970년으로 3년 앞당기게 하는 등, 7개항의 강력한 한글전용 지시를 다시 내렸다. 거기에 한자 교육을 일시적으로 폐지하기까지 했다.[3] 이 외에도 1968년 12월 콘크리트로 복원한 광화문에도 박정희 자신이 직접 쓴 한글 현판이 달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한자 사용과 한글전용에 대해서 뚜렷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한글전용은, 광복 직후나 박정희 정부 시기 등의 정책적 드라이브, 전산화나 86세대의 부상 등 언어 외부적 등이 중첩된 혼잡한 과정을 겪었다. 한글전용 도입은 그 박정희 군사정권도 이루지 못한, 수 세대에 누적된 복잡한 숙제가 된 것이다.[4] 특히 전두환 정부 당시 청와대로 보고되는 공문서나 대통령의 지시사항, 보도자료 등은 대부분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노태우, 김영삼 정부까지 지속되었으며,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공문서에서의 국한문 혼용체 사용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한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한자문화권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문 중엔 중앙일보, 한겨레가 한글전용을 한다. 이 가운데서 한겨레 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한글전용을 했고, 중앙일보는 1990년대 초반까지 타 신문사와 같이 국한문혼용체를 쓰다가 전산화와 함께 한글전용으로 전환한 예이다. 이들은 다른 신문들에서 주로 사용하는 약자인
근래에는 국한문혼용체보다 한영혼용체가 더 자주 나타난다. 보그체와는 달리 주로 학술적인 서적에서 자주 나타난다. 한자는 아니더라도 오늘날 라틴 문자를 혼용한 서적은 제법 흔하게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전문 서적 같은 경우 컴퓨터 언어 등 영어 용어들이 많은 특성상 라틴 문자 혼용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간판의 경우 스타벅스와 같은 영어 상호는 한글이 아닌 로마자를 그대로 걸어놓는 등의 모습이 더 친숙하다. 이러한 사각지대 극복 노력의 하나로 고궁 등 인근에서는 한글전용이 된 간판들이 의도적으로 장려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대학 교과서, 판결문 및 법조문 등에서 국한문 혼용이 빈번했다. 현재도 다수의 법학 교과서가 표제만큼은 순한자 표기를 고수하고 있다.
한글전용이 널리 퍼지기는 했으나 한글전용론자와 국한문혼용론자[6] 사이의 갈등은 2022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측과 한글전용을 지지하는 측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으로 인해 오랜기간동안 한글전용 정책은 논란이 되어 왔고, 2016년엔 급기야 한글전용 정책이 헌법에 어긋나는가의 여부가 헌법재판소에서 가려지게 되었다(2012헌마854). 기사 그 결과 같은 해 11월 24일에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이 나왔다. 기사 헌재의 결정내용은 구체적으로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항(즉 기본적으로 한글전용을 하고 필요에 따라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병용하는 것)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위 규정이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북한의 경우에는 1946년까지는 세로쓰기에 국한문혼용체를 썼지만 문맹 퇴치를 명목으로 1948년엔 가로쓰기로 바꾸고 한글전용으로 바꾸었다. 남한에서 주시경의 제자인 최현배가 한글전용을 이끌었다면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시경의 제자인 김두봉이 언어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보다 좀 더 철저한 한글전용정책을 처음부터 시행했는데, 남한에서는 국한문혼용체가 쓰였지만 북한에서는 이제 막 한글을 뗀 사람들이 한자를 배우는데 시간이 몇년은 더 걸리니 편의성을 우선시한 것이다. 다만 북한 원 지폐의 한자표기가 1950년대 말까지 남아있었고, 또한 일제강점기~소군정때 발행된 서적의 상당수는 국한문혼용체였고, 한자의 영향력이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것은 아니었으며, 본격적으로 의무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주류를 차지하고나서야 한자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기는 하다.
문맹자가 거의 없어지고 중학교 교육까지 의무화된 이후인 1968년부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자를 쓰니 중고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하라고 의무화하여 오늘날까지도 정식 교육과정에 있기는 하나 실생활에서는 남한에 비해서도 더욱 쓰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한자어가 남한보다 덜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탄성'을 '튐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보다 좀 더 철저한 한글전용정책을 처음부터 시행했는데, 남한에서는 국한문혼용체가 쓰였지만 북한에서는 이제 막 한글을 뗀 사람들이 한자를 배우는데 시간이 몇년은 더 걸리니 편의성을 우선시한 것이다. 다만 북한 원 지폐의 한자표기가 1950년대 말까지 남아있었고, 또한 일제강점기~소군정때 발행된 서적의 상당수는 국한문혼용체였고, 한자의 영향력이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것은 아니었으며, 본격적으로 의무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주류를 차지하고나서야 한자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기는 하다.
문맹자가 거의 없어지고 중학교 교육까지 의무화된 이후인 1968년부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자를 쓰니 중고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하라고 의무화하여 오늘날까지도 정식 교육과정에 있기는 하나 실생활에서는 남한에 비해서도 더욱 쓰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한자어가 남한보다 덜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탄성'을 '튐성'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북한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한자를 표음문자(한글)로 대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 배경은 위와 같은 사회 및 정치적 배경 말고도 한국어와 한글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자에 1:1로 대응되는 한글의 특성에다가 한자음독도 1자 다음절인 경우가 많은 일본어와는 달리 1음절을 유지하기 때문에 한자 단어들을 한글로 쓴다고 해도 글의 길이가 길어지지 않는다. 한글 자체가 한자와 호환을 목적으로 모아쓰기를 하는 문자라 한자에 비해서는 한자 각 자를 한글 음절로 치환해도 크게 지장이 없었고, 폐음절과 장음을 별개의 문자로 구분하는 일본 가나 문자에 비해 압축성 또한 유지되었다. 그리고 훈독도 없어졌기에 한자어 여부를 헷갈린다고 생기는 불이익도 거의 없다. 일본 가나가 음소문자가 아니라서 외국어 표기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감안하면 상당히 좋은 여건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자 병기나 국한문 혼용체를 선호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것은, 한국어에 한자어가 다수 있고, 한자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한자를 쓰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자음에는 제약이 있기에, 한국어에서는 한자 기준 동철이의어가 많다. 예를 들어 이상(異狀 ) - 이상(異常 )의 쌍과 같이 한자로 표기할 때 서로 구분이 되지만 한글로만 표기했을 때는 구분이 되지 않는 것.
만약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한다면 한글전용이 더 널리 보급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널리 퍼진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는 것은 어렵고 비현실적이다. 전산용어 순화 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크게 자리잡지 못하였다. 또한 한자어를 배제하고 순우리말로 대체한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경우 언중의 언어를 선도한다는 규범주의적 사명감을 가지고 외래어를 배척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들도 외래어에 대한 대체 용어로 한자 신조어로 대체할 때가 많다. 예를들어 레시피를 조리법(調理 法 )으로 바꾸거나 디오라마(Diorama)를 실사모형(實寫 模型 )으로 바꾼 것을 순화했다고 하는 경우 등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한국어에서 한자어를 배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나, 동음이의어를 증가시켜 한글전용의 정착에는 불리하다.
그 배경은 위와 같은 사회 및 정치적 배경 말고도 한국어와 한글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자에 1:1로 대응되는 한글의 특성에다가 한자음독도 1자 다음절인 경우가 많은 일본어와는 달리 1음절을 유지하기 때문에 한자 단어들을 한글로 쓴다고 해도 글의 길이가 길어지지 않는다. 한글 자체가 한자와 호환을 목적으로 모아쓰기를 하는 문자라 한자에 비해서는 한자 각 자를 한글 음절로 치환해도 크게 지장이 없었고, 폐음절과 장음을 별개의 문자로 구분하는 일본 가나 문자에 비해 압축성 또한 유지되었다. 그리고 훈독도 없어졌기에 한자어 여부를 헷갈린다고 생기는 불이익도 거의 없다. 일본 가나가 음소문자가 아니라서 외국어 표기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감안하면 상당히 좋은 여건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자 병기나 국한문 혼용체를 선호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것은, 한국어에 한자어가 다수 있고, 한자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한자를 쓰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자음에는 제약이 있기에, 한국어에서는 한자 기준 동철이의어가 많다. 예를 들어 이상(
만약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한다면 한글전용이 더 널리 보급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널리 퍼진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는 것은 어렵고 비현실적이다. 전산용어 순화 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크게 자리잡지 못하였다. 또한 한자어를 배제하고 순우리말로 대체한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경우 언중의 언어를 선도한다는 규범주의적 사명감을 가지고 외래어를 배척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들도 외래어에 대한 대체 용어로 한자 신조어로 대체할 때가 많다. 예를들어 레시피를 조리법(
[1] 보다시피, 조문이 달랑 한 조였다. 제명과 본문 역시 한글로만 되어 있다.# [2] 구법(2009. 3. 18. 법률 제9491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에서는 "공공기관의"라고만 표현하였다. 현행법의 "공공기관등"이란 국가, 지방자치단체, 특수법인까지 포함한다.[3] 물론 엄청난 반발로 인해 중·고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재개하게 되었지만, 한자 교육 자체가 이미 크게 축소되었고 그 때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사회의 중역이 되기까지 대략 25년 정도 걸렸는데 그게 1990년대이다. 이 무렵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컴퓨터가 보급되고, 전산화,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국한문혼용체 사용은 더욱 위축되었다.[4] 박정희 정권 당시에도 거리에서 한자 간판을 추방하는 운동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당대 신문 지면 등에서는 국한문 혼용이 일상적이라 한자를 알지 못하면 신문과 시사잡지 하나 읽는것도 어려웠던것이 당대의 시대상이었다.[5] 대표적으로 유력 정치인의 이름을 한자 성으로 치환하는 것.[6] 사실상 국한문 혼용이 아니라 한글을 중심으로 한 한자병기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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