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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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서울특별시 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과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가리킨다. 서울이 한 국가의 수도였을 때에는 한성이라고 불리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한산(
해방 이후 경성의 명칭이 서울로 바뀌었을 때도 오랫동안 한성은 서울의 중국어 표기로 쓰였다. 이 때문에 서울대학교로 가야 할 우편이 한성대학교로 가는 등 명칭혼동으로 인한 케이스가 자주 발생하자, 2005년부터 서울시는 서울과 발음이 유사하고 으뜸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
자세한 내용은 한성(바람의 나라) 문서 참고하십시오.
고구려의 수도권인 패서 지역에 속하는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인근으로 비정된다.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수도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설치됐다. 여기는 고구려에서 많이 개발된 지역이면서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중국이나 신라의 직접적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2] 사회적, 군사적 기반이 고구려 영토 중에서 비교적 안정돼 있었고, 따라서 초토화된 다른 지방보다는 주로 여기서 고구려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안승과 검모잠이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통일신라가 차지했고 패서에서 거주하던 기존의 고구려인들 외에도 각지에서 모여든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들어 그 후예인 패서 호족이 이 지방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우게 된다.
재령군이 과거 ‘한성(漢 城 )’ 또는 ‘한홀(漢 忽 )’로 불렸던 점이나 고구려 도시 유적이 나온 곳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유력한 설로 꼽히고 있다. 다만 현재의 서울특별시 부근 북한산성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가 평양, 혹은 남평양이라고도 부른 바 있다는 점과 신라가 이곳을 한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듯. 다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군사대치 관련한 유적이 서울보다 북쪽인 임진강선에서 많이 발견되고, 재령에서 도시 유적지가 나온 이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원래 서울 지역에 있어서 한성이었다가 나제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탈환한 이후 이름만 현재의 재령으로 옮긴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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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외에도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이나 하남시의 이성산성,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등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풍납토성 발굴 후에는 사실상 밀려난 상태. 특히 천안은 문주왕의 남하 중 일시적으로 머물렀을 뿐이란 설이 강하다. 근초고왕 때 한강 이북의 한산성으로 일시 천도했을 때도 그렇게 불리기도 했는데 이렇게 다양한 지역을 부르는 데 사용된 이유가 한성 자체가 대성(大城 , 큰 성)을 음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2] 수, 당의 공격은 요동과 청천강 일대가 위주였고, 신라와의 전선은 임진강 유역에서 형성돼 있다가 고구려 말기에 내분이 일어나 연정토 등이 남부 방어선을 통째로 바치고 항복해 668년 신라군은 별 저항 없이 중간지역을 순조롭게 건너뛰고 평양 근처까지 바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쭉 안전한 후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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