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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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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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초상화 | |
고려의 문화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제조관 | |
임기 | 1379년 ~ 1380년 |
군주 | 우왕 |
이름 | |
별명 | 초명( 자( 호( 시호( 추증 작위는 익양부원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 |
출생지 | 고려 경상도 영천군 ( |
사망일 | 1392년 5월 4일(음력 4월 4일) (향년 54세) |
사망지 | 고려 개경 선지교 ( |
경력 | 문신, 성리학자, 정치가, 외교가 |
본관 | 연일 정씨 |
부모 | 아버지 정운관[1] 어머니 영천 이씨 부인 |
형제자매 | 아우 정과( 아우 정후( 아우 정도( |
배우자 | 경순택주 경주 이씨 |
자녀 | 아들 정종성( 아들 정종본( 서자 정종화 서자 정종함 |
친인척 | 사촌 형 정항신( 손녀 오천군부인 정씨 손녀사위 선성군 사돈 정종 서손녀 정씨 서손녀사위 한명회 |
종교 | 유교(성리학) |
본관은 연일, 초명은 몽란(
고려 경상도 우항리와 고려 경상도 영천현을 거쳐 고려 개경에 거주하였던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
경상북도 우항리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라고하나 기록은 없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었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
태종은 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사림파가 집권한 후에도 그의 문하생이라서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성인화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생애
편집생애 초기
편집출생과 가게
편집포은 정몽주는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일현에서 영일 정씨(
의종 때의 추밀원지주사(
유년기
편집그의 선조 3대는 검교직과 동정직을 가졌을 뿐 현직은 가지지 못한 지방의 사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조들이 대대로 관직에 있었으므로 넉넉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동생이 세 명 태어났는데, 정과(
아버지 정운관은 향시에 합격한 뒤 성균복응제생의 벼슬에 올랐으며 뒤에 아들인 포은 정몽주의 출세로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수문하시중 판병조사상호군영경령전사에 추증되고 일성부원군(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 영천 이씨(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유년기에 아버지인 정운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이색의 문인이 된다. 소년기 때 그의 집은 영일 청림동에서 외가가 있는 영천으로 이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수학과 청년기
편집아버지 정운관은 관직이 비록 미관말직이었으나 당대의 유학자이자 명사인 이색과 친분관계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아버지에 의해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 된다. 이색은 고려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과 백이정의 손제자이자 익제 이제현의 제자였다. 이들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그는 후에 이숭인, 길재를 통해 조선 사림파에 학통을 전수했고, 다른 제자인 권우는 세종대왕 등을 가르치게 된다.
스승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8]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8]
이색의 문하에서 그는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만나게 된다. 특히 정도전과는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도전과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 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으로 돌변한다.
1355년(17살)(고려 공민왕 4년) 1월 19세 되던 해에 아버지 정운관이 죽자, 그는 영천 도일동에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묘소에서 3년동안이나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공민왕은 그의 집에 특별히 포상을 하고 정표(旌表)를 세워주었다.
과거 급제와 변방 근무
편집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여름에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하는 감시(
이때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개경을 수복하고서도 김용(
이때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김득배의 시체를 친히 수습한 뒤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사람이 누구입니까?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 즉,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大義 )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써 덮는 것이 옳을 것이요.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뒤에 베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태산 같은 공을 오히려 칼날의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
나는 그 충혼(忠魂 )과 장혼(壯 魄 )이 천추 만세토록 반드시九泉 의 아래서 울음을 머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명이로구나!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이후 위위시승(
관료 생활
편집관료 생활 초기
편집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혁명방법을 놓고 갈등하게 된다. 그 뒤 64년 전보도감판관(
그 뒤 복직하여 예조 정랑 겸 성균관 박사·성균관 사예, 1367년 통직랑(
실제로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하며 유교의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
신돈의 죽음과 정치적 위기
편집신돈이 신진사류를 발탁하게 되면서 정몽주 역시 요직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 등이 몰락하고 그의 일파들이 처형될 때 정몽주도 신돈의 일파라는 누명이 나돌게 된다.
1371년 7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12] 그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일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외교, 정치 활동
편집1372년(공민왕 21년) 3월 명나라가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
이때 중국의 한 객관에서 지은 시가 후대에 전한다.
奉天 門 前 謁天子 / 봉천문 앞에서 천자를 배알하고金 陵 市上 醉 佳人 / 금릉 땅 저자에서 가인과 취했노라[13]
1374년(공민왕 23년) 경상도안렴사로 부임했으나 그해에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
1375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1376년(우왕 2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그는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 신진사류는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재개하려는 정책을 문제삼아서,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이인임과 지윤(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비판, 규탄하였다가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 되었다가 1377년(우왕 3년)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복귀와 정치적 변신
편집몸을 돌보지 않는 노력과 자신의 외교적, 학문적 능력 덕분에 정몽주는 1375년 쫓겨났던 다른 동료들에 비하여 꾸준히 정치적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15]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장에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의 달라진 정치관이었다.[15] 그해 3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공민왕 대와 달리 우왕 대에 관직에 복귀한 이후에는 시류에 영합하면서 권력자들의 뜻에 어느 정도 맞추어 가는 쪽으로 처신하였다.[15] 그리고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15] 당시 왜구의 침입과 노략이 심하여 그는 나흥유(
1377년 9월 그는 사신을 자원하여 왜에 보빙사(
규슈 성주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언행에 감복해 특별히 우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시를 청했고 매일같이 가마를 타고 규슈 내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1378년 7월 포로나 노예로 끌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고려인 포로 수천명을 구해 되돌아온 일로 명망을 얻었다. 이후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를 거쳐 1379년(우왕 5년) 우산기상시를 거쳐 전공판서(
1380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한탄하는 시를 짓는다. 그 뒤 밀직제학(
개혁정책과 외교 활동
편집1381년(우왕 7년) 성근익찬공신(
1383년(우왕 9년) 3월에 판도판서(
그해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
1386년에는 명나라에 바쳐야 할 5년간의 공물과 일방적으로 명나라에서 늘려 정한 공물을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하러 간 것이었는데[15], 명의 황제로부터 (공물 면제) 승낙을 받고 돌아옴으로써 집정자들의 큰 부담을 덜어 주기도 하였다.[15] 또한 고려의 흉년과 입을 옷감이 부족한 점을 들어 구원을 요청하여 명나라로부터 갓과 의복, 옷감 재료의 지원을 받아오는데 성공하였고, 동시에 명나라로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았다. 우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하사하였고, 그는 바로 문하평리(
1387년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
위화도 회군 찬성
편집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16] 1388년 최영과 우왕이 계획한 요동 정벌이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고, 우왕이 폐위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창왕(
정몽주는 이성계가 이름을 빛낸 1380년 전라도 남원군 운봉[17](지금의 남원 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에 조전원수(
대은 변안렬과의 관계
편집정몽주는 변안렬의 제사에 참석하여 그를 애도하는 제문을 이색, 길재, 이승인, 이방번(이성계의 아들이며 변안열의 사위이다) 등과 같이 지었다.
다음은 정몽주의 제문이다.
"임신년 정월 기망일은 고인 대은공이 순절하신 두번째 해입니다. 진실한 벗이며 시중의 직책을 맡고 있는 영일인 정몽주는 술잔을 부어 공의 묘에서 아륍니다. 늠름하기가 추상같음은 공의 충열이요, 열렬하기가 백일(
정몽주는 진실한 벗이며, 잊을 수 없는 벗이라 하고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이 두터움을 표현하였다. 짧은 제문에서 그는 변안렬의 충직하고 열렬한 절의를 다 표현하고,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생각하며 그의 죽음을 원통해 하였다. 정뭉주전에서 , 변안렬은 지조가 맑고 높았으며 기국과 도량이 넓고 컸으며, 문장에 능통하였고 무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나, 우왕의 강화 추방에 상심하여 문을 닫아걸고, 호를 대은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성계와의 협력과 공양왕 추대
편집1388년(창왕 1년) 삼사좌사(
1389년(창왕 1년) 말에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괴뢰로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성계의 위망(
그러나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였다. 공양왕을 옹립할 때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16] 뒤를 이어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조준(
수문하시중
편집1390년(공양왕 2년) 벽상삼한삼중대광(
이성계 일파에 대한 공격으로 그는 정도전이 탐욕스러운 존재라고 비난, 규탄했으며 우현보 일가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현보 일가는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우씨 집안의 여종이었고,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씨 집안의 인척으로 승려가 된 김진인 점을 지목하며 정도전과 그의 아들들을 무시하였고, 정도전은 우현보의 일족들에게 악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성계 주변인물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한다. 또한 그는 정도전의 외가가 우현보집안의 종의 자손임을 지적하여 바르지 못한 혈통에서 태어났다며 공격하였다. 이 비난을 듣고 감정이 상한 정도전은 그를 원수로 여기게 된다.
생애 후반
편집역성 혁명에 저항
편집1391년(공양왕 3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
“ | 此亦 |
” |
— 이방원, 《하여가》
|
“ | 此身 |
” |
— 정몽주, 《단심가》
|
그의 오랜 벗이었던 정도전 역시 계속 그를 찾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종묘와 사직을 엎을 수 없다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이성계 일파 제거 시도
편집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정몽주 역시 이 암살계획을 변중랑이라는 심복부하로부터 입수하였다. 그는 자신의 문하생과 동문수학한 이색의 문하생들을 사주하여 이성계, 정도전 등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게 했다.
1392년 봄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준비함을 감지한 그는 이성계가 병으로 은신한 것에 의문을 품고 사람을 보내 이성계의 주변을 살핀다.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병을 이유로 물러나자 정몽주 역시 병을 핑계로 조용히 있다가 그해 4월 이성계가 병을 빙자한 것의 여부를 확인하러 이성계를 방문한다.
타살
편집1392년 5월 4일(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새벽 그는 악몽을 꾸었는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그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숭상하는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말라'는 유언과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5월 4일(음력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낙마로 부상당했다는 이성계의 문병 겸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일부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철퇴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이라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 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하고 답하였다.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 이후 김구(
타살 직후
편집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손들에게 자신의 묘비를 세울때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적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1392년 4월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禹玄
그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비토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책망하였다고 한다.
사후
편집그 뒤 1517년(조선 중종 12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중종에게 청원하여 정몽주의 비석을 세울 때 묘비문의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
그가 죽은지 9년 후인 1401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22] 그의 문하생 중 길재와 이숭인은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 인사로 성장하여 후일 사림파의 기원이 된다.
조선 건국 초까지만 해도 그는 간신(
추증과 성역화
편집그의 사후 태종은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
세종대왕은 왕자시절 정몽주의 문하생 권우에게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세종대왕 즉위 후, 편찬한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정몽주가 수록되었다. 세종대왕은 부왕 태종 이방원에 이어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시켰다.
성종이 훈구파(공신 세력)의 견제를 위해 그의 후신인 사림파를 발탁하면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려는 운동이 나타나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1555년(명종 10년)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임고서원이 창건되고,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25] 1611년 참찬관 이자가 정몽주의 묘를 수리할 것을 건의했다. 중종은 예조 정랑 이순(
퇴계 이황의 주도하에 영천 지역 퇴계 이황의 문인들인 김응생, 정윤량, 노수 등을 중심으로 부래산에 임고서원이 창건되었다. 퇴계 이황은 임고서원의 제문과 상향 축문을 지어 정몽주의 학문과 충절을 극찬했다. 그 뒤 임고서원은 1584년 ‘영천구각본’, 1607년 ‘영천중간본’ 등 3종의 ‘포은집’을 간행하여 발표하였으며, 임고서원 입구엔 포은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 ‘백로가’와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가 나란히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숙종 때 신도비(
현대
편집서울 마포구 양화대교 근처에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박정희 정권하에 그를 충절과 효성의 상징으로 국어와 국사교과서에 그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였으나 이후 제6차 교육과정에서 대폭 축소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그를 띄운 점에 대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고 있다.
사상과 정책
편집성리학 확산에 기여
편집현종이후로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나 유목민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고종 이후로는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다시 불교가 호국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불교를 허구적인 환상(극락)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존재라고 보고 유교(성리학)의 진흥과 장려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반 사대부로 하여금 〈주자가례
그의 제자들 중 길재, 이숭인 등은 향리에 내려가 지역사회에 성리학을 보급시켰고, 이들이 향촌의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세조 때부터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세조 때 김종직이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종 때는 훈구파에 필적하는 정치적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로 희생되나 중종 반정 이후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에는 일부 사림이 훈구파와 야합하여 신진 사림파를 축출하기도 했으나, 중종 말기에 가서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법령 제정과 양곡법의 시원
편집고려 말기에 들어서 권문세족과 불교 승려, 외척 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법이 유명무실화되자 그는 법령 제정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설파하였으며,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법령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려 노력했다. 그는 정몽주는 〈지정조격
1390년 수문하시중으로 재직 중, 그는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켰으며 의창(
학맥
편집이색의 문인으로, 정도전과 동문수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라서게 되었다. 학문상으로 세종대왕은 그의 손제자가 된다. 정몽주의 제자는 길재, 이숭인, 권우 등으로 권우는 후에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고,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태두를 형성하였다.
논란과 의혹
편집과거 부정 묵인 의혹
편집우왕 때 그는 과거의 부책임자격인 동지공거에 있었으나 부정 합격자의 존재를 알고도 묵인했다. 우왕의 후궁인 의비 노씨의 동생 노구산을 부적절하게 과거에 합격시킨것 알고 있었으나 문제삼지 않았다.
정몽주는 1384년의 과거 시험에서 동지공거(
이때 무장인 최영은 오히려 이러한 시험 부정을 비판하였지만, 부책임자를 맡았던 정몽주는 묵인하고 넘어갔다.[15] 이렇게 공개적인 부정 이외에 정몽주는 이전에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였던 집권자들을 포함한 고위 관료들과의 모임을 스스로 주최하기도 하였다.[15]
고려사 열전의 나오는 바에 따르면 조금 다르다. 정몽주가 과거를 주과했는데, 노구산이 과거에 떨어진 것과 이의 우왕이 대노하여 노구산을 합격 시켰다는 것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몽주가 침묵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음 기록에는 덕창부행수(
권력자들과의 결탁
편집또한 그는 당대의 권력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에 성대한 만찬과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 우왕, 이성계 역시 그의 집에 찾아가 연회를 즐겼다.
1385년 최영을 비롯하여 이인임, 윤환(
조선의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 말에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섬겼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23]
성역화와 우상화
편집그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반대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폄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현창, 미화, 이용하였으며, 후일 사림파의 집권 이후에도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선조인 정몽주에 대한 현창이 필요하여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는 계속 이어져오게 되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간신으로 규정됐던 정몽주는 태종 대에 이르러 충신으로 변신하고, 이어 사림파들이 장악한 중종 때는 문묘에 종사해야 할 유학의 종장으로까지 추대된다.[23] 세종대왕 때는 임금이 그의 손제자였으므로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 때에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는 성역화되었다.[29] 이는 성리학을 조선 유학의 적통으로 삼으려는 사림파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장했던 것이다.[23]
이에 대항하는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 말에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섬겼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지만, 결국 사림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중종 12년에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된다.[23]
폐가입진 논란
편집그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없는 루머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느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30]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
이성계 집권 협력 논란
편집그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16] 이는 목은 이색이 유배된 우왕을 몰래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과는 뚜렷이 대비된다.[16]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16]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그는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 등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익양군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역적을 토벌한 공로가 아니라 한 임금을 폐하고 다른 임금을 옹립하여 공신에 책록되었다.[19]
문묘 종사 배경
편집그가 문묘에 종사하게 된 배경은 정몽주 본인보다는 그의 문하들 중 사림파의 직계 스승들을 종사하기 위한 핑계라는 의혹도 제기되어 왔다.
1509년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
그 뒤 훈구파는 김굉필이나 정여창 등은 사림의 스승이라서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일부 온건파 사림 역시 부정적이었다. 김종직은 사림파는 찬성 훈구파는 반대였고, 정몽주만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된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에 대한 문묘종사 여론을 계속 추진한다.
대묘동 입구에서 암살 논란
편집선죽이라는 지명은 정몽주가 죽기 전에 기록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에 등장한다.[31] 《용재총화》, 《해동악부》에는 ‘선죽교’의 표현이 없지만 조선 중기 이후부터 슬그머니 ‘선죽교 순절설’이 등장한다.[31] 개성부립박물관장 고유섭은 「선죽교 변(
가족 관계
편집정몽주가 등장한 작품
편집평가
편집평가
편집정몽주는 고려 말기 무신 세력의 몰락과 함께 세를 얻어가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고려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 말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나 고려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한 정몽주와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있다.
그는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형태로 탈바꿈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비록 실패했으나, 정도전 등에게 그 뜻이 이어져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을 탄생시켰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
후대의 평가
편집그는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
부적절한 인물을 과거에 합격시켜 준 일 등이 그런 것이지만, 특히 자신이 왕으로 섬긴 우왕과 창왕 두 왕을 왕씨가 아닌 신씨라고 몰아서 죽음으로 내몬 정치적 행위에 동참한 것은 고려의 충신이라는 수식어와 잘 조응하지 않는 것 같다.[33]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나라의 어려움에 이성계를 이용하고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여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최영을 적대적으로 보았던 신진사대부의 한사람으로 신진사대부가 고려 조정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득세를 하였지만 신진사대부 중에 정도전, 조준, 권근 등에 의해 이성계의 조선 개국, 역성혁명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반대하다가 이방원 일파의 조영규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한 이방원은 정도전을 격하할 의도와, 그의 충신 이미지를 부각시켜 새 왕조에 저항하는 세력을 도덕적으로 억제하려는 등의 정치적 효과를 보고 그를 충절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고 계략을 쓴 것 역시 정당한가 여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세력의 동참했다면, 그에게 부귀영화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군권과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정치적 명성과 명분을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없는 정몽주가 이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애당초 조선 건국 세력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주장했고, 이성계가 그의 살해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죽지 않았다. 우연히 이성계가 병으로 쓰러졌고, 마침 정도전의 가계에 약점을 잡아 공격하는 등 사실상 정치적 공격을 제외한다면 무력적 개입은 전무했다. 그리고 공양왕이 이성계의 눈치를 보면서도 밀어주었기에 이들을 압박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타계하려고 이방원이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양왕은 이성계와의 타협 조차 실패해 왕위를 내주어야 했다.
이를 본다면 사실상 정몽주를 제외하고는 조선건국세력을 견제할 세력이 사실상 없으며,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그리고 단순 충신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고려사 열전에는 여러 외압에도 인사행정을 옳바르게 했으며, 이성계와 아기발도가 충돌한 황산대첩에 참전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 포로를 데려오는 등 단순 충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라를 위해 일한 정치인이다. 비록 정도전이 이인임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 견제로 여러 땅을 주유했고, 이게 오늘날 미디어에서 백성의 삶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몽주는 전쟁터에 직접 개입했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일본과 명나라의 사신으로가 백성을 되려오고 외교 관계를 좋게 하는 등 실질적인 국가 이익에 일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세를 타지 않고 부족한 힘에도 고려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충신이라 할 수 있다.
기타
편집시문(
“ | 우국시( 千仞崗頭石逕橫 (천인강두석경횡) /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
” |
“ | 춘흥(
|
” |
문집
편집조선 왕실과의 관계
편집이성계의 차남 정종 방과의 다섯째 서자 선성군(
각주
편집- ↑ 다른 이름은 정거민
- ↑
정종성(
鄭 宗 誠 ) (1607). 〈圃隱先生 集 年譜 攷異〉. 《圃隱先生 文集 (포은선생문집)》. 2014년 9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4월 7일에 확인함.至 元 三 年 丁 丑 十 二 月 戊 子日 。先生 生 於永川 郡 東 愚 巷 里 。|인용문=
에 라인 피드 문자가 있음(위치 7) (도움말) - ↑ 또는 사은. 목은, 도은과 포은을 삼은이라 하나 이숭인을 포함하여 사은으로도 부른다.
- ↑ 그의 수문하시중 일성부원군(
日 城府 院 君 ) 직책은 사후 아들 정몽주의 출세로 증직된 것이다. - ↑ “신진사대부 (
新 進士 大夫 )”. 2014년 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2월 20일에 확인함. - ↑ 성낙은, 고시조 산책:2003 (국학자료원, 2003) 22페이지
- ↑ 영천이씨의 백로가는 구전으로 전하다가 후일 정몽주를 배향한 임고서원 입구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 ↑ 가 나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74페이지
- ↑ 고려 후기의 문과는 초장, 중장, 종장의 3단계로 구성되었다.
- ↑ 가 나 정몽주 : 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정몽주:daum
- ↑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2페이지
- ↑ 문학의 숲…/ 몸의 자유, 마음의 자유 조선일보
- ↑ 가 나 다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3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4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99
- ↑ 가 나 다 라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5페이지
- ↑ 가 나 다 라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 ↑ 가 나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100
- ↑ 좌명공신은 국왕의 즉위를 도운 신하에게 내리는 공신호이다.
- ↑ 정몽주를 살해한 공로로 공신에 책록되었다.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1402 임오 / 명 건문(
建 文 ) 4년) 10월 16일(병인) 1번째기사 -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101
- ↑ 가 나 다 라 마 조선선비들의
死後 청문회, 문묘종사논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조선일보 2010년 -4월 15일 - ↑ 이후 그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하고,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정도전은 무도한 인물로 격하시켰다.
- ↑ 가 나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
-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070870263
- ↑ 이때 만들어진 법령은 조선 건국 후에도 정도전에 의해 채택되어 계속 유지된다.
- ↑ 그의 손자 정보는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였으나 정몽주의 손자라는 이유로 목숨을 구했다.
-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24페이지
- ↑ 가 나 “선죽교의 핏자국은 정말 있는가”. 경향신문. 2016년 3월 3일.
- ↑ “치밀한 고증으로 고려 황도의 전설을 넘어서다”. 인천일보. 2013년 9월 24일.
- ↑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8페이지
같이 보기
편집관련 서적
편집-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 《질문하는 한국사》 (서해문집, 2008)
- 김동욱 고려사대부 작가론 (도서출판, 박이정, 2004)
- 박영규, 조선의 왕실과 외척 (김영사, 2003)
- 편집부 지음,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 성주덕 편, 서운관지 (이면우 외 역, 소명출판, 2003)
- 유재하, 고려왕조사 6 (학문사, 2000)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8)
외부 링크
편집-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정몽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몽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경록(
松 京 錄 ) -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친회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선죽교의 핏자국은 정말 있는가 경향신문 2016년 3월 3일자
- 정몽주 과거시험 답안지 첫 발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동아일보 2009년 3월 15일자
日 반출된 ‘정몽주 편지’ 발견 조선일보 2015년 1월 15일자- 용인서 ‘포은문화제’ 개막 국민일보 2009년 5월 15일자
- 신혜성, 정몽주 32대 후손 밝혀져 화제 조선일보 2007.11.19
전임 이성계 |
고려의 수문하시중 (이성계와 공동) 1390년 ~ 1392년 4월 |
후임 설장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