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모잠
검모잠 | |
본명 | 검모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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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미상 |
별명 | 미상 |
시호 | 미상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수림성 |
사망일 | 670년 |
국적 | 고구려 |
관직 | 대형( |
가문 | 미상 |
부친 | 미상 |
모친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충성 | 고구려 |
복무 | 고구려군 |
근무 | 고구려 부흥군 |
지휘 | 고구려 부흥군 |
주요 참전 | 고구려-당 전쟁, 고구려 부흥운동 |
기타 이력 | 미상 |
서훈 | 미상 |
검모잠(
생애
[편집]《구당서》고종본기에는 겸모잠(鉗牟岑)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림성(
검모잠이 거병했을 당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에 소속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한때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진출했고, 당의 지시를 받던 말갈족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고간(
興 滅 國 繼 絶世 ,天下 之 公 義也 .惟 大 國是 望 .我國 先王 以失道 見 滅 ,今 臣 等 得 國 貴族 安勝 ,奉 以爲君 .願 作 藩 屛,永世 盡忠 .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 )입니다. 오직 대국(大國 )[4]에 바랄 뿐입니다. 우리의 선왕께서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지금 신(臣 )들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얻어 받들고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5]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검모잠
이때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
또한 검모잠이 거병하였던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부터 670년의 시점으로써 3차 고구려-당전쟁 당시 고구려 남부 지역은 신라에 항복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검모잠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김부식 (1145). 〈
卷 第 六 新 羅 本紀 第 六 〉. 《삼국사기》.六月 高句麗 水 臨城人 牟岑大兄 收 合 殘 民 自 窮 牟城至 江南 殺 唐 官 人 及僧法 安 等 向新 羅 行 至 西海 史 冶島見 高句麗 大臣 淵 淨土 之 子安 勝 迎 致漢城中 奉 以爲君 遣 小 兄 多 式 等 哀 告 曰興 滅 國 繼 絶世 天下 之 公 義也 惟 大 國是 望 我國 先王 以失道 見 滅 今 臣 等 得 國 貴族 安勝 奉 以爲君 願 作 藩屏 永世 盡忠 王 處 之 國 西金 馬 渚 [6월에 고구려 수림성(水 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 모잠(牟岑)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 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 安 )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 冶島)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大臣 ) 연정토(淵 淨土 )의 아들인 안승(安勝 )을 보고 한성(漢 城 )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 兄 ) 다식(多 式 ) 등을 신라에 보내어 빌었다. “망국을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인 신라에게 바랄 뿐입니다. 우리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했지만, 지금 우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는 것은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신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 馬 渚 )에 머물게 하였다. - ↑ 황해도 구월산(
九 月 山 )의 옛 이름이 궁홀(弓 忽 ) 또는 검모현(劍 牟縣)ㆍ궁모현(窮 牟縣)으로도 불린다는 단재 신채호의 지적이 있다. - ↑ 김부식 (1145). 〈
卷 第 六 新 羅 本紀 第 六 〉. 《삼국사기》.至 咸亨元年 庚午 歳 夏 四 月 劒牟岑欲興 復 國家 叛唐立 王 外孫 安 舜 羅 紀 作 勝 爲 主 唐 高 宗 遣 大將軍 高 侃 爲 東 州 道行 軍 摠管發 兵 討之安 舜 殺 劒牟岑 奔新羅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劍 牟岑)이 국가를 부흥하려고 하여 당(唐 )을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安 舜 )[신라기(新 羅 紀 )에는 승(勝 )이라 한다.]을 세워 임금을 삼았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 州 道 )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이주하였다.] - ↑ 대국은 신라를 가리킨다.
- ↑ 대국은 신라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