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연극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대해 서술한다.
초기 그리스 연극[편집]
고대 그리스에서의 희극 및 비극 등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에 크레타섬이나 미케네 등을 중심으로 개화한 에게해 문화의 농경제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봄이면 풍요를 기원하고 가을에는 결실을 감사하는 해마다의 연중행사에서 연극적인 시도가 생겨났음은 다른 모든 문화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이다.
즉, 고대의 그리스나 이탈리아에서도 자연의 영위나 신의 배려가 자기들 인간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각지의 위정자나 농민들이 일체가 되어 제신에게 바치는 기도·무용·설화 등이 후세에 연극을 육성시키는 모태(
그리고 그리스인의 전승에 의하면 가장 오랜 '오르케스타라'는 공장(
뿐만 아니라 그 후의 고전기(
제사에서 움튼 연극의 싹은 미케네 문명의 붕괴나 그 뒤에 엄습한 소위 암흑시대에도 여전히 생장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 후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가 삶에 깃들인 극적인 기복(
후세에 와서 비극의 발생사(
초기의 극작 시도는 기원전 6세기를 통하여 코린토스, 시큐온 등 펠로폰네소스의 문화적 중심지나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등 각지에서 활발하였으며, 특히 아티카(Attica)의 마을 이카리아 출신의 테스피스의 이름이 아티카 비극의 시조로서 전해지고 있다. 그 활약연대는 솔론 시대(B.C. 590년경)라고도 하고, 페이시스트라투스 시대(B.C. 530년경)라고도 한다. 그리고 솔론의 시에는 후에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모랄을 형성하는 망집(
당시 여러 마을이나 수도 아테네에서 융성해진 서사시의 경연이나 여러 가지 합창시의 경연 가운데에서 대두한 비극·희극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다른 여러 장르에는 없는 휴포크리테스(배우)의 등장이라 하겠다. 비극의 경우에는 합창대에서 천으로 만든 가면을 쓴 배우가 나타나, 이야기의 주역이 될 신이나 영웅, 미녀 또는 중대한 일을 예지하는 사자(
현존하는 바큐리데스의 작품 <테세우스>는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작품으로서 테스피스 등이 연출했던 초기 극시(
아무튼 비극배우의 출현으로 관객의 흥미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초점을 발견한 것만은 분명하며, 또한 작가=배우의 입장에서도 이 새로운 가능성의 개발에 온갖 힘을 기울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클라이맥스를, 갈등을, 인간을 어떻게 해서 신화전설로부터 파악해 내어 재연할 수 있느냐'는 것이야말로 비극의 창시기로부터 완성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1세기 간에 걸쳐 작가와 연기자가 몇 세대를 두고 직면했던 문제이다.
고전기에서의 연극과 사회[편집]
처음에 말하였듯이 그리스의 연극은 그 발생에 있어서 사회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의 기원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 사회적 모태는 그 후의 연극 발달사에서 갖가지 중요한 단계에 명백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테스피스 등의 비극이나 그 무렵의 희극 발달로 당시 농민보호의 정책에 중점을 두었던 페이시스트라투스의 융합정책에 자극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음 세대에 비극 상연이 아테네의 국가적 원조 아래 대대적으로 행하여지게 되었고, 이윽고 아이스킬로스(Aischylos) 등의 대시인들이 많이 나온 것도 기원전 508년 무렵부터 아테네의 정치적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민주정치의 기초를 닦기에 이른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인심수습을 노려 행한 문화정책의 산물이라고 해야 하겠으며, 그 후 고전기를 통한 아테네 연극은 바로 민주적 치세(
실제로 디오니소스 신역(
아테네에서의 희극과·비극의 상연은 또한 레나이온 극장에서도 열렸으며 여기서도 기원전 440년경부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와 거의 같은 제작제도가 민주주의 국가와 부유시민들의 협력으로 유지되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제작체제가 희극과 비극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신구 가치의 공존과 언론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 사회가 연극적 표현에서 추구한 것은 주역의 독백연기가 자아내는 도취가 아니라 각각의 입장을 지킨 '주역들'의 주장이 자아내는 긴장과 해결이었다. 그리스 비극이 대시인인 아이스킬로스를 통하여 두 인간의 대화극(
그러나 다음 세대에 오면 두 인간이 자아낸 대립을 신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즉 제3의 배우의 등용으로써 무대 위에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옮겨진다. 다시 말해서 소포클레스(Sophokles)에 의한 3자대화(
그리스의 희극[편집]
비극의 기술적·내용적인 전개는 한편에 있어서 다른 희극으로부터 시사를 얻은 바도 컸다. 희극의 국영조직(
후일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비극은 모두가 모방의 예술이다. 비극은 보다 위대한 인간을, 희극은 보다 비천한 인간을 각각의 모방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 두 장르의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위대하다는 것과 보다 비천하다는 것을 구조적으로 검토하면, 비극에서의 위대함이란 인간을 위에서 억누르는 훨씬 강대한 힘에 대항하여 ―― 신이건 운명이건, 혹은 에우리피데스에서처럼 정체불명의 비합리성이건 ―― 사투(
이와 반대로 희극에서의 비천함이란 인간을 아래에서 지탱하는 강대한 힘 ―― 성욕·식욕·금전욕·명예욕·권력욕, 그 밖의 갖가지 생명욕 ――을 의지삼아 자기 분수를 모르는 소망에 애태운다는 점에 바로 비천함의 본바탕이 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이건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위해서이건, 또는 빚을 갚지 않기 위해서이건 인질을 빼앗기 위해서이건 엉터리 목적의 성취를 위해 기상천외의 수단을 부리는 인간들을 등장시킨다. 그 사이에는 시사문제나 문예·풍속에 대한 풍자도 왕성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요컨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무한히 부풀게 하는 생명력의 희화화(戱畵
연극 연구의 기원[편집]
높은 것을 낮은 곳으로, 낮은 것을 높은 곳으로 이끄는 두 개의 사회적인 힘의 교착(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항복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아테네의 연극계에서는 두드러진 시인도 나타나지 않고, 또 옛날의 부유한 시인들도 빈곤해져 연극 보호자들로서의 봉사도 곤란해졌을 뿐 아니라, 희극작가들도 시사 정치 문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게 된다. 기원전 4세기에 들어와서도 해마다의 상연은 계속되었으나 레퍼토리로는 구시대 대시인의 명작 등을 부활·상연했으며, 또한 배우의 수 등도 격감한 모양으로 한때는 겨우 세 사람이 교대로 각 작품의 역할을 맡았던 상황이 상연기록에 적혀 있다.
이윽고 연극상연이 옛날보다 더욱 왕성해진 뒤에도 작품이나 작가들보다는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흥미를 끌게 된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연기하는 배우가 뼈 상자에 자기의 죽은 아들의 재를 넣어 오레스테스를 슬퍼하는 장면에서 실감나는 연기를 보였다는 점 등은 이야기의 진위보다도 배우 중심이었던 당시의 풍속세태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오늘날에 전해지는 에우리피데스의 시작(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정치가 뤼쿠르고스는 3대 비극 시인의 작품이 멋대로 개작(
신희극[편집]
그러나 아테네 연극의 전통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러 마지막 창조의 빛을 발했다. 기원전 330년경부터 대두한 신희극과 그 대표적 작가 메난드로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지난날의 비극에서 거친 신화를 통해 사람을 위협한 신의 모습은 없고, 또한 외설스런 의상을 두른 아리스토파네스의 기상천외한 웃음도 없다. 그리고 시민 전체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합창가도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대신 시정(
주로 연애가 극적 사건의 계기가 되고 기구한 운명이 사건을 진행시키는 실마리가 되어, 있는 그대로의 약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인간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따뜻한 입김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섬세한 뉘앙스의 남녀는 얼핏 기원전 5세기의 희극과 비극의 웅대한 인물상에 비해 위축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렉산더 대왕 때문에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그리스 소도시의 표정을 그대로 전한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윽고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서방 이탈리아에서 연극의 신풍을 일으킨 플라우투스나 그의 후계자 테렌티우스가 연극작품의 모범으로 삼은 것은 메난드로스를 비롯한 신희극의 여러 작품이며, 그들의 라틴어로 된 작극(
이렇게 볼 때, 아테네 연극의 창조가 된 드라마 투르기의 기본을 고대 민주주의 폴리스의 테두리 안에서 끌어내어, 보편적인 예술표현 형식으로 서방세계에 전하는 것에 성공한 것은 폴라우투스 등의 공적인 동시에 그 모범이 되었던 메난드로스등의 공적이기도 하며, 또한 메난드로스와의 비교를 통해 그보다도 이전의 희극과 비극의 여러 작품이 널리 로마의 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