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후 (高 こう 因 いん 厚 あつ , 1561년 ~ 1592년 )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 이다. 고경명 의 아들이자 권율 휘하의 장수였다.
본관은 장흥 , 자는 선건(善 ぜん 建 けん ), 호는 학봉(鶴 づる 峯 みね ), 시호는 의열(毅 あつし 烈 れつ )로 의병장이자 학자인 고경명 의 아들이고 고종후 의 동생이다. 또한 중종 ~명종 때의 관료 고맹영 은 그의 할아버지였다. 1577년 사마시(司馬 しば 試 ためし )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 문과 에 급제하여 성균관 (成 なり 均 ひとし 館 かん ) 권지 학유(權 けん 知 ち 學 がく 諭 さとし )에 부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광주 에 있다가 아버지 고경명 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자 이에 종군해 수원 에서 권율 의 휘하로 들어갔다가 제2차 금산 전투 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형 임피공(臨陂公 こう ) 고종후 (高 こう 從 したがえ 厚 あつし ))가 승군(僧 そう 軍 ぐん )에게 애걸하여 주검을 찾아 염습을 하였는데, 죽은 지 이미 40여 일이 되었는데도 안색이 산 사람과 같았다. 전라도 창평현 수곡리(昌平 しょうへい 縣 けん 壽 ことぶき 谷 たに 里 さと ) 모향(某 ぼう 向 むこう ) 산록에 장사 지냈다.
사후 예조참의에 추증되고, 1601년 (선조 34) 고을 인사의 상청(上 うえ 請)으로 사우(祠 ほこら 宇)를 세워 충렬공 고경명 을 제사하고, 그를 배향(配 はい 享 とおる )하여 포충(褒忠)이라 사액(賜 たまもの 額 がく )하였다.
1629년 (인조 7) 공의 아들 고부천(高 こう 傅 でん 川 かわ )의 종훈(從 したがえ 勳 くん )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에 추증되고, 1694년 (숙종 20)에 의열공(毅 あつし 烈 れつ 公 おおやけ ) 시호가 내리지고, 1786년 (정조 10)에 부조지전(不 ふ 祧之典 てん )을 명하였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ほこら ) 및 금산 의 종용사 (從容 しょうよう 祠 ほこら )에 제향되었다.
할아버지 : 고맹영(高 こう 孟 はじめ 英 えい )
아버지 : 고경명 (高 こう 敬 たかし 命 いのち )
어머니 : 울산 김씨 (蔚山 うるさん 金 きん 氏 し ) - 김백균 (金 かね 百 ひゃく 鈞 ひとし )의 딸
부인 : 함풍 이씨 - 관찰사 이경(李 り 璥)의 딸
장남 : 고부림(高 こう 傅 でん 霖)
차남 : 고부천(高 こう 傅 でん 川 かわ ), 문과 급제, 사헌부 장령(掌 てのひら 令 れい )
삼남 : 고부집(高 こう 傅 でん 楫 かじ ), 생원(生 なま 員 いん )
사남 : 고부량(高 こう 傅 でん 良 りょう ), 진사(進士 しんし )
장녀 : 오희일(吳 ご 希一 きいち )에게 출가
첩
남 : 고부매(高 こう 傅 でん 梅 うめ )
장녀 : 금계군(錦 にしき 溪 けい 君 くん ) 박동량(朴 ぼく 東 あずま 亮 あきら ) 첩
차녀 : 참봉(參 さん 奉 たてまつ ) 장응붕(張 ちょう 應 おう 鵬 おおとり )에게 출가
삼녀 : 참의(參議 さんぎ ) 유성증(兪省曾) 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