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국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3년 6월) |
고창국 | ||||
---|---|---|---|---|
| ||||
수도 | 가오창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지리 | ||||
위치 | 실크로드 | |||
인문 | ||||
공용어 | 토하라어 | |||
민족 | 토하라인 | |||
종교 | ||||
종교 | 불교 |
고창국(
역사[편집]
고창은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되었고, 비단길의 중요한 도시였으나 14세기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가오 왕궁 유적은 도시 외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고창은 위구르어로는 카라호자라고 불리며 위치는 신장의 투르판에서 30km 떨어져 있다. 고창은 서부 중국에서 교통의 허브로서 열쇠의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문헌 역사 많지 않다. 구전된 이야기들만이 역사를 구체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고 학적인 유물은 단지 지역주민에 의해 이디쿠샤리라 불리는 교외의 장소에만 있다. 도시의 예술적인 기념비는 A. 폰르콕에 의해 출판되었다.
서기 439년에 북량의 패잔병이 저거무휘와 저거안주의 지휘 아래 고창으로 달아났다. 그 곳에서 그들은 서기 460년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 때 누란에 의해 정복되었다. 고창에는 한족이 만가구 이상 있었으며, 460년, 누란은 한족인 감백주를 고창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고차(
후에 장맹명은 고창의 백성들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마유(
고창의 멸망[편집]
고창의 결정적인 몰락은 한족이면서도 당나라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나라보다는 돌궐족과 가까워 651년 당태종은 소정방을 보내 고창을 정벌한다. 657년 소정방은 서돌궐까지 항복시킴으로써 중앙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은 모두 안서도호부(
결국 고창은 100년의 역사로 멸망하고 이슬람과 몽골의 침입을 받아 성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성터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만다. 현재는 고대 고창의 흔적은 덩그러니 남은 고창고성과 베제클리크 천불동에서만 찾을 수 있다.
불교[편집]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실크로드의 천산북로를 따라서 북위의 초창기 4~5세기경에 전파되었다. 투르판의 천불동도 이 시기에 건립되었다. 고창 근처에 이러한 천불동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베제클리크 천불동(Bezeklik grottos)이다.
현장의 방문[편집]
현장법사가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고창국 국문태의 초대를 받아 630년 2월경에 도착하여 1개월간 고창국에 들러 이 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
고창국의 역대군주[편집]
감씨 고창국[편집]
장씨 고창국[편집]
마씨 고창국[편집]
국씨 고창국[편집]
대수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연호 |
---|---|---|---|---|
제1대 | 소무왕( |
국가(麴嘉) | 501년 ~ 525년 | 승평( 의희( |
제2대 | - | 국광(麴光) | 525년 ~ 530년 | 감로( |
제3대 | - | 국자견(麴堅) | 530년 ~ 548년 | 장화( |
제4대 | - | 국현희(麴玄 |
549년 ~ 550년 | 영평( |
제5대 | - | 국씨(麴氏, 이름 불명) | 551년 ~ 554년 | 화평( |
제6대 | - | 국보무(麴寶 |
555년 ~ 560년 | 건창( |
제7대 | - | 국건고(麴乾 |
560년 ~ 601년 | 연창( |
제8대 | 헌문왕( |
국백아(麴伯 |
601년 ~ 613년 619년 ~ 623년 |
연화( 중광( |
제9대 | - | 불명의 찬탈자 | 613년 ~ 619년 | 의화( |
제10대 | 광무왕( |
국문태(麴文 |
623년 ~ 640년 | 연수( |
제11대 | - | 국지성(麴智 |
640년 | - |
같이 보기[편집]
갤러리[편집]
-
현장이 설법을 했던 유적지
-
당시 고창국의 유적, 고창고성
-
고창고성
-
고창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