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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포충사

포충사
(褒忠ほこら)
대한민국 광주광역시기념물
종목기념물 제8호
(1974년 5월 22일 지정)
수량3동
시대조선시대
위치
주소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776번지
좌표북위 35° 5′ 26″ 동경 126° 50′ 50″ / 북위 35.09056° 동경 126.84722°  / 35.09056; 126.84722
정보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광주 포충사(光州こうしゅう 褒忠ほこら)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사우이다. 1974년 5월 22일 광주광역시의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601년 전라도 광주에 충렬공 고경명(ただしれつおおやけ だかけいいのち)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고경명의 아들 종후(したがえあつし)·인후(よしあつし)와 팽로(彭老)·안영(あんあきら)을 함께 배향하였다. 1603년 사액을 받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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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きんざん)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こうたかしいのち, 1533~1592)·고종후(こうしたがえあつし, 1554~1593)·고인후(こういんあつ, 1561~1592) 3부자와 유팽로(やなぎ彭老,1554~1592)·안영(あんあきら,1564~1592)을 모신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왜란 후 호남유생들이 충의로운 인물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1603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ぼく之孝ゆきたか)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しょうきかん)·내외삼문·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고 이때 옛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忠孝ちゅうこうどう)·청사영당(はれすなかげどう)·전사청(てんまつちょう)·고직사(くらじきしゃ) 등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옛 사당과 동·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ぶんせき) 4종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소장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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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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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褒忠ほこら)는 금산전투(錦山にしきやま戰鬪せんとう)에서 순절(殉節)한 고경명(こうたかしいのち), 차남 고인후(こういんあつし), 유팽로(やなぎ彭老), 안영(あんあきら) 4명과 제2차 진주성전투(すすむしゅうじょう戰鬪せんとう)에서 남강(南江なみえ)에 투신(投身とうしん) 자결(自決じけつ)하여 순절한 장남 고종후(こうしたがえあつし)와 5명만을 배향(はいとおる)한 사당(祠堂しどう)이다.

금산전투에 참여(參與さんよ)한 고경명을 비롯한 의병(義兵ぎへい)은 6000명~7000명 이라고 모든 기록(記錄きろく) 문헌(文獻ぶんけん)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삼부자(さん父子ふし)를 제외한 의병은 유팽로(やなぎ彭老), 안영(あんあきら) 이 두 사람만을 배향(はいとおる) 했을 뿐이다. 같이 함께 했던 6000~7000명 의병 이라고 인원 규묘를 자랑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6000명~7000명의 의병에 비하면 5명만 배향이 되어 있다, 과연 6000명~7000명의 의병부대 라면 숫자와 규모에 비해 배향된 인원은 너무나 미미하고, 함께 전사 했던 의병분들은 안중에도 없었단 말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우습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해보자면 1601년부터 1978년까지는 개인의 사당 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1978년 시작하여 호국선열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국가에서 새로운 사당을 1980년 준공 건립(현창:顯彰けんしょう)한 이 후에는 불행 중 다행하게도 호남절의록 동순제공사실(湖南こなん節義せつぎろく どう諸公しょこう事實じじつ:같이 함께 전사한 사실)에 실려 밝혀져 있는 의병 28인 외(そと) 다른 문헌에서 밝혀진 7인의 의병과 35인 아라도 추가배향(つい加配かはいとおる)을 했어야 당연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고경명은 문인으로서 시편은 물론 달리는 말위에서도 마상격문(馬上もうえ檄文げきぶん)의 통문(通文みちふみ)을 쓸만큼 글을 좋아 했던 글재주가 있는 분으로 상기를 해 보자면, 1592년 5월29부터 7월10일 전사할 때까지의 의병사 일기나 의병사록(義兵ぎへいろく)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하물며 조헌(ちょうけん)을 모신 금산 종용사 에서는 고경명과 같이 함께 전사한 의병들을 다음과 같이 모셔져 있다.

금산(錦山きんざん) 종용사(從容しょうようほこら)에는 눈벌전투(1592.7.10.) 종용사에 묘셔진 주요 의사 라고 비석(碑石ひせき)에 34인의 의병(義兵ぎへい)의 명단(めいたん)이 세겨져 있으며 배향(はいとおる)되어 있다.

종용사에 모셔진 주요 의사

가나다순

눈벌전투(1592. 7. 10.)

고경명(こうたかしいのち), 강 염(きょう 恬), 고몽룡(こうゆめりゅう), 고인후(こういんあつし), 고 훈(こう いさお), 김덕홍(きむ德弘のりひろ), 김봉학(かねたてまつづる), 김세근(きむこん), 김신문(きむ申文もうしぶみ), 김여정(きむなんじてい), 류팽로(やなぎ彭老), 박광조(ぼくひかり), 박광종(ぼくひかりむね), 박언신(ほお彦信), 박응주(ほおおうばしら), 신 건(さる 楗), 안 영(あん あきら), 양대박(りょうだいしらき), 양정언(りょう廷彦), 엄인원(いむひとしもと), 오응필(おう弼), 오응현(おうけん), 이억수(おくことぶき), 이인우(ひとしたすく), 전용관(ぜんよう灌), 정귀세(ていたか), 조효원(ちょうたかしもと), 채희연(蔡希ふち), 최영수(ちぇ永水ながみず), 최응룡(ちぇおうりゅう), 최홍립(ちぇひろしりつ), 최후립(ちぇあつしりつ), 하 정(かわ ひのと), 한 순(かん だて)등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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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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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충사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