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1538년)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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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조참의 | |
임금 | 조선 선조 |
영의정 | 류성룡 |
이름 | |
자 | 사순( |
호 | 학봉( |
시호 | 문충(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38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안동 |
사망일 | 1593년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본관 | 의성 |
부친 | 김진 |
모친 | 여흥 민씨 |
형제자매 | 김복일 |
학문 활동 | |
분야 | 성리학 |
스승 | 이황 |
주요 저작 | 《상례고증》, 《해사록》, 《학봉집》 |
군사 경력 | |
최종계급 | 경상우도순찰사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
서훈 | 이조판서 추증 |
김성일(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특히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었을 때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초유사로 활약하다 병사한 공로로 사후 선무원종1등공신에 추서되었다.[1]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아버지 김진(
1562년 승려 보우(
관료 생활 초반[편집]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
1579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
조선통신사[편집]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1년 3월,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조정에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되었다.[3]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3] 1591년 음력 2월 부산으로 귀국하여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 풍신수길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 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이와 같은 상반된 보고에 당시 재상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편을 들었으며, 이에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하였다. 일단 당파심에 김성일의 편은 들었으나, 이후의 결과가 두려워진 류성룡은 어전보고가 끝난 후 김성일 따로 만나 묻길,"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하였다.
-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 실록의 기록이 아니고 왜란이 끝난 후 류성룡이 자신이 지은 왜란 회고록 징비록에 기술한 것이다.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리고 주장하였지만, "서인(
실제 황윤길의 보고가 있은 직후, 조정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뒤늦게나마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과연 당시 민심의 동요를 상당히 초래하였다. 이에 김성일은 다시금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내용으로 하여 '내치에 대신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즉 이를테면 "백성의 민심을 동요 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방비책"이라는 거였다.
임진왜란 직후[편집]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없음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
黃 允 吉 ) · 허성(許 筬 )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5]
일본에서의 통신사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자세히 쓰고 있지 않으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전 몇개월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두려움이 앞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부사 김성일 만이 만남을 독촉하였고, 최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서는 부사 김성일 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 부사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성리학적 인물관[편집]
어전 회의에서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그러한 조짐이 없었사옵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을 하였다.[3]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도 황윤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사옵니다."라고 한 대 비해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 됩니다."라고 다르게 대답하였다.[3]
김성일은 도요토미에게서 성리학적 학식과 예를 찾으려 했겠지만 그를 간바꾸로 만든 것은 성리학적 학식과 예가 아니라 칼과 천하를 상대하겠다는 담략이었다.[6]
임진왜란과 죽음[편집]
전란 초기[편집]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
진주성 전투와 사망[편집]
김성일은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진주판관(
사후[편집]
사후 1604년(선조 34) 선무원종1등공신에 추서되었다. 그에 따라 1592년 이조참판 겸 동지에 추증되었던 아버지 김진은 다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의금부지사에 가증되었다.
1606년(선조 38)에는 학봉 본인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고, 1607년(선조 39)에는 임하현에 그를 모신 임천향사가 세워졌다. 임천향사는 1618년(광해군 10) 사액을 받고 임천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를 모신 사당은 존현사(
1619년(광해군 11) 묘비석이 세워졌으며 한강 정구가 찬하였다. 1664년(현종 5)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우복(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 김만근(
金 萬 勤 ), 김한계(金 漢 啓 )의 아들 - 진외증조부 : 신명정(
申 命 昌 )
관련 작품[편집]
- 《임진왜란》(MBC, 1985년~1986년, 배우:정상철)
- 《왕의 여자》(SBS, 2003년~2004년, 배우:박승호)
- 《불멸의 이순신》(KBS1, 2004년, 배우:권혁호)
- 《징비록》(KBS1, 2015년, 배우:박철호)
관련 문화재[편집]
- 김성일 종가 전적 -보물 제905호
저서[편집]
- 《해사록》
- 《상례고증》
- 《조선연혁풍속고이》
- 《학봉집》(사후에 출간된 문집, 1627년)
수상 경력[편집]
희생자 논란[편집]
학봉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점이 2000년대에 와서 알려지면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현대 한국사학사에 있어 김성일은 임진왜란을 유발한 전화의 책임자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논지를 띤 최초의 학자는 황윤길의 문중 족손인 사학자 황의돈이었다.[7]
해방 후 동국대학교에서 사학을 연구한 제1세대 학자인 황의돈은 《신편 조선역사》 128~129쪽에서 류성룡, 이산해 등 당시 득세한 동인배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모두 부수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하여 드러누웠다.'고 기록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게 있다고 기록하였다.[7]
이를 두고 신복룡은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7]'며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말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다.[7] 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지은 시[편집]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로 진주에서 지은 시가 전한다.
矗 石 樓 中 三 壯士 촉석루위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一杯 笑 指 長江 水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 가리키네長江 之 水流 滔滔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波 不 渴兮魂 不死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원종공신은 정공신(
正 功臣 ) 아래 등급의 공신이다. 정공신처럼 1등, 2등, 3등으로 등급이 세분되며,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책봉되었다. - ↑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년 초판1쇄 p129
- ↑ 가 나 다 라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112페이지
- ↑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 ↑ “조대곤이 고령에서 왜적을 무찌른 일을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6월 28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 ↑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113페이지
- ↑ 가 나 다 라 신복룡, 《한국사 다시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 12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