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남궁 억(
이력
[편집]그의 자(
1887년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통역관이 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1894년 내무부 토목국장이 되어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또한 경성부내의 도로 정비와 도시 계획을 주도하였다. 그뒤 개화, 계몽운동을 추진하다가 1903년부터 성주목사, 양양군수(
1910년 10월 강제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
생애
[편집]젊은 시절
[편집]출생과 수학(학문을 다룸)
[편집]한서 남궁억은 1863년(철종 14년) 12월 27일,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
1884년(고종 21)에는 영어학교 1학년 재학 중 해관(
관료 생활
[편집]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
계몽, 구국 운동
[편집]독립협회, 독립신문 활동
[편집]1895년 12월 서재필이 귀국하자, 이후 귀국한 서재필(
그해 별군직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직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1898년(광무 1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언론 활동
[편집]그해 9월 나수연(
1898년 11월 왕당파로부터 왕정타도와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경성부 외곽에 숨었으나 결국 경무청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899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언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주장하고 이를 번역하여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는 논평을 게시했다가 경무청에 체포, 구금되었다.
계몽, 개화 활동
[편집]1902년(광무 5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난 이래 조선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조약이라며 러일협정의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황성신문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체포,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2년에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한국 분할설과 러일 협정을 공박하였으며, 1903년 영관(
1903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특별히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와 1904년 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부패한 토호들과 토색질을 일삼는 향리들을 엄히 단속하여 처벌하였으며 조정 고관들의 비리를 탄핵하기도 했다. 강원도 양양군수 재직 중 폐습타파와 단발령, 신식 학교 유치, 도로 정비, 병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광무 10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양양에 현산학교(峴山
1908년(융희 2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
일제 강점기 활동
[편집]교육 계몽 활동
[편집]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
1910년부터 배화학당과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
낙향 초기에는 교회를 설립한다 하여 주민들의 편견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맹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20대에서 30,40대의 학생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부락의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조선이야기 와 동사략 등을 집필, 간행하였다. 후에 모곡학교는 총독부 학제 개편에 의해 한서국민학교와 한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홍천군 모곡리 유리산에 올라 매일 '불의의 일본을 이 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매일과 같이 기도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시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
1918년, 남궁억은 자신의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더불어 교회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으나 일제는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투옥과 석방
[편집]그뒤 〈무궁화 묘포〉(
최후
[편집]그뒤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고향인 홍천으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 《동사략(
1937년 1월 부인 양씨의 장례식을 치른 뒤 그는 제자들과 친지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편집]- 제자들에 의해 홍천군 서면 모곡리 모곡 점말 앞산 선영하에 제자들과 지역유지들에 의해 장례식이 거행된 뒤 안장되었으며 묘소 근처에 특별히 신도비가 세워졌다. 해방 후 1966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468-1번지 산 큰말교회 뒤편으로 이장되었으며, 성역화되었다.
- 1962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그해 강원도 도민들의 성금과 정부의 지원하에 유리봉 근처로 다시 이장하고 성역화하였다.
- 그뒤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7번지에 한서 남궁억 기념관이 세워졌고, 묘소 앞에 있던 신도비는 2009년 8월 15일 한서 남궁억 기념관 경내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저작
[편집]- 통사략(동사략,
東 史 略 ) 5권 - 죠션니약이 (조선이야기) - 아동용 한국사
- 기러기
- 조선의 노래
-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통일찬송가 371장)[2] - 일부 가사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청석골 학교 낙성식 장면에 언급되어 있다[3].
가계
[편집]같이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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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십자가당 사건으로 불린다.
- ↑
“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봄 돌아와 밭갈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 후렴: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 - ↑
귀에 익은 손풍금 소리가 들리며, '삼천리 반도 금수 강산'을 부르는 찬미 소리가 일어났다. 그제야 장래는 활기가 돌기 시작하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목청을 높여,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하고 소리를 지를 때는, '그런 찬송가는 꽤 좋군.'하고 동혁이도 따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상록수》, 제12장
참고 자료
[편집]- 김세한, 《한서남궁억선생의 생애》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 1960)
-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김상태 편역, 인물과 사상사, 2001)
- 피정만, 〈한서 남궁억과 강원도 근대교육〉,《강원문화연구 11》, (강원대학교, 1992)
- 김동면, 〈한서 남궁억의 역사관〉, 《한국사연구 46》, 1984
- 정진석, 〈남궁억: 황성신문 초대 사장〉 (도서출판 기파랑 2014)
외부 링크
[편집]- 한서 남궁억 선생의 생애 담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강원도민일보 2011.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