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냥
매사냥(falconry)이란 훈련된 맹금류를 부려서 짐승을 잡는 사냥법이다. 이때 사용되는 맹금류로는 세계의 지역과 문화 등에 따라서 매(매과)의 매, 흰매 등과 수리과의 참매, 검독수리 등이 사용된다. 신석기 시대 이후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매사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된 사냥 기술 가운데 하나로써, 전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생업으로써 뿐 아니라 오락, 유희 수단으로써도 널리 행해졌다.
한국에서는 매를 길들여 사냥을 하는 전문 사냥꾼을 가리켜 조선시대 직책으로 응사(
개요
[편집]매사냥은 야생 맹금류가 날짐승이나 길짐승을 사냥하는 습성에서 착안한 것으로, 기원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중앙아시아 및 몽골 평원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통설로 한다. 인류가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 후반의 일로, 이 신석기 시대를 전후해 매사냥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매사냥은 이후 인도, 페르시아, 앗시리아, 이집트 등 동서 국가로 전파되었다.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의 치세(기원전 722년 - 705년)에 매사냥이 중동에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1][2] 5세기인 400년 훈족과 알라니족으로부터 매사냥이 유럽으로도 전해졌다. 이후 엽총이 발명되는 17세기 후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특히 영국 색슨 왕조 시기에 매사냥은 전성기를 누렸고,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 때 자신이 중동에서 본 매사냥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하였고, 직접 《조류를 이용한 사냥 기술》(원제: De arte venandi cum avibus)이라는 매사냥 연구서를 쓰기도 하였다. 이 책은 매사냥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룬 최초의 서적으로써, 조류학과 동물학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
한편 동양에서는 몽골 초원을 거쳐 지금의 중국 둥베이(
근대 이전에 매사냥은 동쪽으로 일본, 서쪽으로 아일랜드와 모로코까지, 북쪽으로 몽골과 스칸디나비아, 남쪽으로 인도까지 이르는 유라시아 및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각 지방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행해졌다. 현대에 들어 인도나 이란에서는 절멸해 버렸지만, 남북아메리카나 남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또한 매사냥 기술은 맹금류의 인공 번식 및 방류, 다친 야생 조류의 치료 및 재활 치료에도 응용되고 있다.[5]
2010년 11월 16일에, 아랍에미리트(UAE)와 몽골, 체코, 한국 등 11개 국의 매사냥이 유네스코 지정 무형문화유산의 「대표일람표」에 기재되고(2012년에 2개 국이 추가 기재) 매사냥 관련 국제조직으로써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Falconry and Conservation of Birds of Prey이 결성되었다. 한편 20세기에 들어 수의학의 발달과 송신기의 발명으로 매의 수명도 늘었고 과거와 같이 사냥 중이던 매를 잃어버리는 일은 줄어들고 있다.
한국의 매사냥
[편집]고대
[편집]한국에서 매사냥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다.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이 위치한 지안 시(
백제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에 실린 영취사연기에도 매사냥이 언급되고 있는데, 영취사연기(내지 이를 전하기 위해 인용된 《사중고기》라는 문헌)의 배경은 신라 신문왕 때에 해당한다.
신라 진골 제31주(
主 ) 신문왕대인 영순 2년【본문에는 원년으로 되어 있는데 틀린 것이다.】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즉 동래현으로 다른 이름은 내산국이다.】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성으로 돌아오다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머물게 되었는데, 문득 어떤 사람이 매를 풀어 꿩을 쫓는 것을 보게 되었다. 꿩은 금악을 지나 그 자취가 영영 사라져 버렸는데,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가니 굴정현관의 북쪽 우물가에 매는 나무 위에 앉았고 꿩은 우물 속에 있었다. 그 물이 핏빛 같았는데, 꿩이 양쪽 날개를 펴서 새끼 두 마리를 품고 있고 매 또한 그것이 가엾은 듯 함부로 덮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하략)—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영취사
또한 같은 책 권5 감통제7에서는 신라 경명왕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선도산에 올라 매를 풀었는데 찾지 못하자 선도산신인 신모에게 기도해, 매를 찾게 해달라고 빌었고 이에 매가 날아와 의자에 앉자 신모를 대왕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의 기록인 《구당서》(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 속에서 고대 한반도에서 매사냥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대에 매사냥은 선사 시대의 생업적 성격보다는 이미 오락으로써의 성격으로 변모해 있었고, 주로 귀족 계층이나 왕실의 여가 스포츠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고려 시대에 더욱 뚜렷해진다.
중세
[편집]고려 시대의 매사냥 기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충렬왕(
고려에서 매사냥이 특히 성행하게 된 것은 고려의 왕이 원(
매사냥과 관련해 고려 시대의 중요한 문헌으로써 《응골방》(
근세
[편집]고려에 이어 조선의 역대 국왕들도 매사냥을 즐겼고, 매사냥에 필요한 매를 바치는 것은 하나의 역(
태종 이후 매를 기르는 사람에게는 응패(
한반도에서 매는 보통 전국에서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해동청(
응방 혁파에 이어 숙종(肅宗) 41년(1715년)에는 매를 잡아 올리는 응군도 혁파되었다. 관직에서 응방이나 응사의 존재는 사라지고 대신 사대부층이나 민간에서 매사냥을 주도하였고, 순조 때에는 응사의 횡행으로 소요 대상이 되어 문제가 된 사례로 있다.
근현대
[편집]민간에서의 매사냥에 대한 기록은 제정 러시아에서 제작한 《한국지》(1900년)가 유일하다. 한국의 산업을 다룬 부분에서 이 책은 한국에 꿩이 많기 때문에 누구나 꿩사냥을 즐기며 부유한 사람은 누구나 매를 갖고 있다고 적었다. 1950년대까지 매사냥은 민간에서 성행하였으나,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에는 몇몇 문화재 전승자들에 의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참고 문헌
[편집]- 대한민국 문화재관리국 편 《매사냥 조사보고서》 1993년
각주
[편집]- ↑ Egerton 2003, 40쪽
- ↑ Soma 2012a, 168쪽
- ↑ Ferber, Stanley (1979), 《Islam and The Medieval West》, SUNY Press, 57쪽, ISBN 9780873958028
- ↑ 가 나 Shawn E. Carroll. “Ancient & Medieval Falconry: Origins & Functions in Medieval England”. Richard III Society. 2015년 9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9월 25일에 확인함.
- ↑ “A Falconer with His Falcon near Al-Ain”. 《World Digital Library》.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