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이 문서는 참고 문헌 목록을 포함하고 있으나, 각주가 불충분하거나 존재하지 않아 출처가 모호합니다. |
진국 (698년~713년) 발해국 (713년~926년) | ||||
---|---|---|---|---|
渤海 | ||||
| ||||
수도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왕 698년 ~ 719년 820년 ~ 830년 906년 ~ 926년 | 고왕(초대) 선왕(10대) 대인선(말대) | |||
인문 | ||||
공통어 | 발해어, 말갈어[1][2] 한문[a] | |||
데모님 | 발해인 | |||
민족 | 고구려인, 말갈인, 거란인 | |||
종교 | ||||
종교 | 불교, 도교, 샤머니즘 | |||
기타 | ||||
현재 국가 |
발해(渤海) 또는 발해국(渤海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스스로를 천손(
남송(
국호[편집]
초기 국호[편집]
698년 길림성 돈화현(
한국 외의 다른나라 학자들은 각각 진국이라는 국호에 대해 여러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북한의 학자 장국종은 이미 걸걸중상이 진국이라는 공국을 세웠으나 698년 발해란 국호를 선포하면서 진국이라는 국호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16][17] 러시아의 학자 A.L.이블리예프는 698년에 진국을 선포했다고 서술한다.[18] 중국 사학자들은 《신당서》의 "말갈이란 명칭을 버리고 발해라 하였다."라는 기술을 근거로 대조영이 거란, 선비, 돌궐 등 여러 북방민족과 같이 민족의 이름을 국호로 썼을 뿐 진국을 선언한 적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19]
발해 국호[편집]
김종복은 《구당서》에 근거하여, 발해의 초기 국호가 진이지만, 그 국호는 대조영이 713년, 발해군왕에 책봉되었을 때가 아닌 문왕대부터 진을 버리고 발해라 일컬었다고 추측했다.[20]
이블리예프는 당의 책봉은 발해를 신라와 같이 이웃 국가로 인정하여 국제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새로운 말갈 국가를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한 것이라 하면서 이로서 대조영에게 발해라는 명칭은 새로운 말갈국의 명칭이 되었고, 민족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18]
김육불은 산동의 발해군과 발해 국호를 연관시키면서 발해와 말갈이 음성학적으로 동일음이기 때문에 발해라 명명하였다고 주장하였다.[21] 그러나 조평춘은 말갈이 발해로 와전되었다는 학설을 반박하면서, 발해 국호가 바다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당나라가 자국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토록 했다고 주장했다.[22]
역사[편집]
건국[편집]
668년 당은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을 차지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 도호부(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추장 이진충(
당나라는 대조영의 발해 건국이 기정사실화 되고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를 발해에게 정복당하고 안동도호부도 멸망하자 발해인들을 달래기 위해 705년 책봉을 시도했지만 불발되었다.[27]
713년 대조영은 좌효위원외대장군(
안정과 성장[편집]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인안(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아우 대문예(
영토 확장과 발전[편집]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756년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발해는 당의 문물도 수용하여 3성(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
9세기 전반,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
8세기 전반에서 9세기 후반기에 발해(혹은 속말)말갈이 남만주 지역에서 아무르 유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빠르게 아무르 유역을 정복하며, 이후 아무르 강 상류를 따라 서아무르 평원의 북서쪽인 실카강까지 진출했다. 비트틱 산 성터, 류잔카 성터, 우스티-쵸르나야 성터 등과 같은 유적이 그러한데,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 주민들이 아무르 강을 따라 실카 강까지의 북서지역까지 장악한 결과로 파악한다.[36] 말갈 확장에 대한 지역민인 부르호토이 주민(실위)의 저항은 이주민으로 하여금 실카 강과 초르나야 강의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에 방어용 취락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하였다.[37]
쇠퇴와 멸망[편집]
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38] 발해 멸망을 상세히 다룬 요사의 기록[39]을 고려하면 수도 급습설이 유력하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
발해와 요의 전쟁은 무려 20여 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요동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 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비록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했지만, 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국가였다. 919년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입을 격파하고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락시킨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국제적 환경은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의 해체, 토번 제국의 붕괴, 중원의 당나라의 몰락과 오대십국시대, 한반도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다. 이런 가운데 대인선(
발해의 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나라는 20여년간의 전쟁 경험을 통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한 것이다. 즉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서 공격해서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였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건국한 나라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고려[편집]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느라 발해를 돕지 못했다. 발해를 도와주면 후백제가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조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후대 왕들이 재위기간 5년을 못 넘기고 죄다 요절했던 데다가 왕건의 호족 우대 정책으로 인해 왕권이 불안정했고, 고려의 중앙 제도나 군사 제도 등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원군 파병은 어림 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들 나라를 우대하느라 고려는 요나라와 국가적 존망을 걸고 세 차례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사실 많은 발해 후계국이 건국되었지만 이들과의 외교 관계 성립을 위한 고려의 노력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여요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고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요나라는 요성종의 죽음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에 당시 고려의 국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발해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을 그저 안정적으로 흘러가던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어지럽히는 반란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에 대한 성급한 군사적 지원을 지양하는 대신 망명해오는 발해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받아주면서 고려에서 왕실 제사를 지내게 해주거나, 왕씨 성을 하사하여 안정적인 생계유지 및 정착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려의 보수적인 대외정책은 금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각각 요나라와 금나라, 북송의 지원군 요청과 화친요청, 책봉제의를 거절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는 점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요나라가 비록 고려를 집어삼킬 수 없었다 해도 엄연히 유목 민족과 정주 문명의 장점을 합친 당대 동아시아 1타의 엄청난 강대국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홈 그라운드와 지형의 이점 등을 통해 이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가 대단했던 거지 아무리 요성종 이후로 잠시 혼란에 빠졌다고 해도 다시 역공을 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고려 입장에서도 가증스러웠을 요나라를 뒤흔들 수만 있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당대의 정세는 당대인들이 훨씬 더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요나라에 비해 세력이 미약했던 부흥국들이 고려가 돕는다고 성과를 내기에는 게임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고려가 거란을 압도할 만한 국력이 있었다면 발해부흥운동이 활발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기였던 이후의 요-금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확률이 높다.
고려는 발해와 '친척의 나라'였으되 '고구려 계승'이 정체성 그 자체인 왕조였기에, 발해 유민의 편입은 어디까지나 자국 밑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발해가 일찍 멸망한 탓에 발해와 고려의 외교 관계는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
외세의 개입이 없어 발해가 멸망하지 않았던가 혹은 발해부흥운동을 성공시켰더라면 천리장성 혹은 청천강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발해 후계국이, 남쪽에는 고려가 위치하여 흡사 남북국시대의 연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표[편집]
연도 | 성명 | 연호 | 설명 |
---|---|---|---|
668 | 고구려 멸망. 사리걸걸중상 · 대조영 부자 영주로 강제 이주 됨. | ||
698 | 대조영 | 영주 탈출 후 당의 추격군을 격퇴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발해 건국. 고왕 즉위. | |
719 | 대무예 | 고왕 붕어( | |
732 | 인안 14년 | 대장 장문휴를 보내어 수군으로 당의 등주를 침공, 거란, 해와 연합해 요서 마도산 침공 | |
733 | 인안 15년 |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 | |
737 | 대흠무 | 인안 19년 |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
756 | 대흥 20년 | 상경으로 천도( | |
793 | 대흥 57년 | 문왕 붕어. 동생 대원의가 즉위했으나 폐위되었고 수 개월 후 사망. | |
" | 대화여 | 성왕 즉위, 연호 중흥. | |
794 | 대숭린 | 중흥2년 |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
809 | 대원유 | 정력16년 |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
812 | 대언의 | 영덕4년 |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
817 | 대명충 | 주작6년 |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
818 | 대인수 | 태시2년 |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
830 | 대인수 | 건흥13년 | 선왕 붕어. |
831 | 대이진 | 건흥14년 |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
857 | 대건황 | 함화27년 |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
871 | 대현석 | 대정15년 |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
894 | 대위해 | 천복24년 |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
906 | 대인선 | ?13년 |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
906 | 청태7년 |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 |
924 | 청태19년 | 발해의 거란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 |
925 | 청태20년 |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 |
926 | 청태21년 |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태자 야율배가 지배. | |
934 | 대광현 | 청태29년 | 대광현 발해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순. |
정치[편집]
중앙 정치 조직[편집]
발해의 중앙 정치조직은 문왕때 3성(
지방 조직[편집]
발해의 지방 조직은 선왕 때 영토확장으로 넓어진 지방행정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
상경은 당의 장안성(
발해의 영역을 비정하는데 있어 본원적인 발해 유적은 모두 발해의 영역에 포함되며, 말갈 유적의 분포현황도 매우 중요하다. 발해는 말갈 7부 이외에도 사모, 군리, 굴열, 막예계, 우루, 월희, 철리 등 북방의 모든 말갈들도 복속시켰는데 《태평환우기》와 《당회요》에는 흑수말갈도 일정 기간은 발해에 복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흑수말갈의 서쪽과 북쪽 그리고 북동쪽에 위치한 사모, 군리, 굴열이 발해에 복속된 사실은 그 사이에 위치한 흑수 역시 발해에 복속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발해가 말갈제부를 모두 복속시켰다는 사료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말갈 유적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들을 발해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 유적은 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아무르 강 중하류, 제야 강 일대 등에서 그룹을 이루면서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멀리 실카강 일대, 동쪽으로는 아무르 강 하류의 수추섬까지 발견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서기 4~7세기까지 동아무르 지역에 존속하던 흑수말갈은 서기 8세기부터는 서아무르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 즈음 동아무르 지역에서는 포크로프카 문화가 나이펠드-동인 문화를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흑수말갈은 원래의 거주 지역을 발해에 정복당한 뒤 서쪽으로 이주하여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포크로프카 문화에 특징적인 과형토기는 연해주 지역의 크라스키노 성터 등 발해 유적에서도 출토되었으며 포크로프카 문화에 보이는 철제 손칼, 화살촉, 부싯쇠, 꺾쇠모양 유물, 청동제 띠꾸미개 등도 발해 유적 출토품과 유사하다. 또한 포크로브카 문화에서 가장 유행한 '등을 아래로 하고 다리는 무릎을 접은 상태'의 토광 시신장은 체르냐치노 5 고분군의 토광묘에서도 그대로 확인되었고 이러한 매장문화가 발해에 포함된 말갈의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코르사코프카 고분군에서 출토된 발해 청동불상 역시 이 지역에 대한 발해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10세기 이전의 포크로브카 문화양상은 서아무르지역의 트로이츠코예 문화와 발해 영역 내의 본원적 문화와 양상이 서로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50]
S.P.네스쩨로프는 아무르 강의 북쪽으로 제야 강과 부레야 강 사이 지역에 분포하는 트로이츠코예 문화를 서기 8세기보다 이르지 않은 시기에 발해인들 혹은 속말말갈인들이 송화강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형성한 문화라고 주장했는데, 이 경우 트로이츠코예 문화 지역을 발해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지역은 트로이츠코예 문화뿐만 아니라 발해 성립 이후에 해당되는 실위유적과 서쪽으로 이동한 흑수말갈의 유적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51] 2018년 6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북방 문화 연구소가 제야 강과 부레야 강 사이에 있는 서아무르 평원의 유적을 발굴조사한 결과, 발해 수도였던 상경성이나 발해 유적인 크라스키노 성에서 확인된 토기와 매우 유사한 토기 조각 9점을 찾았다. 따라서 트로이츠코예 지역에 발해인들이 실제로 거주했고 발해 영역이 서아무르 평원까지 미쳤을 가능성이 높아졌다.[52]
고구려 계승의식[편집]
《속일본기》기록에 의하면 728년 무왕이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 "무예는 황송스럽게도 대국(
재일교포 출신으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과 와세다대학교 조선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목간학회 회장을 역임 중인 이성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인 송기호는 발해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출한 이유에 대해 정황상 대조영은 말갈족이지만 고구려에 귀속되면서 일정 부분 고구려화 되었고, 걸걸중상을 거치면서 고구려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말갈계 고구려인으로서 고구려 귀속의식이 나타나 훗날 발해를 운영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56]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이종욱은 이성시와 견해를 조금 달리하여 발해에는 고구려인이 많이 살았고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 장군으로 근무한 바 있기에 새로운 왕국을 갖출 정보와 힘이 있었지만 그러한 발해에 살게 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멀어진 한국과 연속성이 없는 집단이라고 비판했다.[57]
이 외의 주장 중에는 발해에는 순수 고구려인도 대다수였으며 한민족 문화는 사라진 것이 아닌 타 민족의 문화와 혼합돼 새로운 문화가 생성된 것[출처 필요],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언어가 통했고 발해는 고구려인들과 고구려에 동화된 말갈족들이 주류가 되어 건국되었다는 점, 훗날 신라, 고려로 수많은 발해인들이 이주한 점 등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입장 또한 존재한다.[출처 필요]
사회 및 주민구성[편집]
지배층의 구성[편집]
발해는 다종족 왕국으로 고구려유민과 대다수의 말갈 외에 한족, 거란족, 실위, 위구르족 등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8] 발해 지배층의 족속 구성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송막기문》에 발해의 왕은 옛부터 대씨를 성으로 삼으며, 우성에는 고, 장, 양, 두, 오, 이씨 등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 지배계층 성씨 70% 이상이 고구려 계통이라고 추정하는데,[59],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림호성이 발견한 기록에 전해지는 발해인 201명 가운데 그 수가 33명으로 16.41%를 차지하는 것이 고(
육정산 고분군의 비교적 대형의 고분을 밀집되어 있는 제1구역 중하부에는 고분 양식면이서 고구려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지만, M5에서 말 뼈와 같은 짐승뼈가 이곳에서만 다수 출토된 점과 다인장을 보여줘 말갈적 요소에 가까운 M3을 볼 때, 역시 말갈적인 전통이 함께 스며 있음을 보여준다. 제1구역 상부와 제2구역이는 말갈계 토광묘가 포함되어 있고, 화장의 현상이나 통형관의 출토도 이곳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말갈적인 요소가 제1구역 중하부보다 더 강하게 드러난다. 명심해야할 것은, 고분 자료만 가지고 매장자의 혈통을 따질 수 없다. 예컨대 말갈 혈통을 지닌 고구려인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무덤에서는 고구려적인 문화 요소가 강조되어 나타나거나, 때에 따라서는 고구려 문화 요소만 나타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65]
신분적으로 높았던 제1구역 중하부에 위치하는 M1~M10의 고분 가운데, 정혜공주 무덤인 M2는 고임식 천정을 비롯하여 고분 축조 양식에서 고구려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내부에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린 점도 고구려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일부 출토 유물이나 바닥에 깐 벽돌에서 당나라 문화가 결합돼 있는 사실도 인정된다. 또 진릉(
제2구역에 비해 제1구역 중하부 그룹과 친연관계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분적으로 또는 다른 요인으로 구분이 되는 그룹인 제1구역 상부에서는 M11에서 짐승뼈가 출토됐고, M101에서 통형관이 확인됐으며, 다인정과 2차장 현상아 보인다는 점에서 말갈적인 요소를 더 띠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짐승뼈가 출토된 점이나 화장 현상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는 제2구역과 구별되는 독립성을 보인다.
제2구역에는 우선 제1구역에서 보이지 않는 토광묘가 자리잡고 있다. 4기의 토광묘 모두에서 화장 현상이 나타나는 점까지 고려하면, 순수 말갈적인 양상을 다분히 띠고 있다. 그럼에도 2기의 고분에서 석묘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3기에서 기와가 출토된 점에서 볼 때에 고구려 문화도 습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4기 고분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들은 석묘로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요소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장과 다인장 및 2차장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고, 통형관 매장 사례도 다수 보이는 것은 말갈적 문화 요소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66]
결국, 육정산 고분군에서는 고구려와 말갈 문화가 상호 결합된 양상이 주목된다. 그러면서도 신분이 위로 올라갈수록 고구려 문화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확인된다. 송기호는 이러한 고고문화 연구와 문헌연구를 토대로 말갈계 고구려인이나 원고구려인이 발해 상층부를 주도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내려오면서 말갈인이 좀 더 많은 수를 차지하였던 면모가 도출될 수 있다고 하였다.[67][68]
또, 속말말갈의 중진통형관(
서강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종욱은 자신의 저서인 《고구려의 역사》에서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정보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 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발해에 살게 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떨어져 나간 역사 속의 한국인들로 현대 한국인에게 피를 전해 줄 기회를 잃게 된 집단이라고 일축했다.
프레데릭 W. 모트(Frederick W. Mote)는 발해인들은 본래 수렵과 어업활동을 했는데 발해인들은 정착 생활을 했고, 발해인들의 농경 인구는 정복한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국인들은 발해라고 부르며 '발해'라는 용어는 많은 역사서에서 나타난다고 하고 한국 문화적 요소는 발해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70]
경제[편집]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세금으로는 조세, 공물, 부역 등이 있었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을 했다. 무역의 증거로서 고비사막에 서식하는 쌍봉낙타 청동상이 러시아의 발해유적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견되었고, 러시아의 노브고르데예프 발해 성터에서는 중도의 부하라에서 온 소그드 은화가, 콕샤롭카 성터에서는 위구르 토기가 발견되고 신라, 당나라, 일본, 거란과 위구르로 연결되는 다섯 개의 통로를 열고 신라와의 교역로에 신라도를 연결하며 그 사이에 39개의 역참을 두었다는 기록과 일본에 담비가죽을 수출한 일화가 남아있다. 또한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원숭이 조각상과 신라 장보고의 청해진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편병이 발견되어 장보고 상단과의 교류가 짐작되기도 한다.
상업[편집]
발해의 상업은 농업, 수공업, 목축과 수렵 등이 발전하면서 상호간의 교환 관계로 촉진이 되어 발달하게 되었고, 영토상으로도 각기 다른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진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제반 사정들로 생산 부문 간, 주민 상호 간에 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내 상업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건국 이후 국가 통치 체제가 정비되면서 교통망이 발달하게 되어 국내외의 교류로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해 상업의 발달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와 서고성의 도시 구조를 통해 발해의 수도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교육[편집]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나 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문화[편집]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73]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74]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74]
문자[편집]
발해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상황인데,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온전한 발해 역사의 복원을 위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관심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기와에 새겨진 특이한 문자 때문이다.
최근에는 《발해문자연구(渤海
흑룡강성 닝안시의 상경용천부유지(
E. V. 샤프꾸노프는 발해인은 적어도 세 종류의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문자는 중국의 한자로, 이에 대해서는 정혜공주의 묘지와 연해주 빠르띠잔스크 구역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출토된 한자가 새겨진 물고기 모양의 청동부절을 예로 들고 있다. 발해에 보급된 두 번째 문자는 8~9세기에 이웃의 위구르 한국에서 사용되었던 돌궐의 룬 문자로 파악하며, 19세기에 남우수리스크 성터에서 발견된 돌궐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는 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그 룬 문자에서 수이우빙, 즉 솔빈부라는 발해시대의 부의 명칭을 판독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10~12세기 중국의 〈이백(
연변대학 조선어문학연구소의 최의수도 이것을 거란 문자나 여진 문자와 같은 한자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 문자로 보고 있다.[78]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2012년 논문에서 여진 문자가 발해 문자에서 발전한 것이라 학설을 제기하였는데, 여전히 의문점이 있다.[79]
반면에, 금 희종의 조칙 중, "모든 관원들을 임명하는 고명(誥命)은 여진인에게는 여진자(
종교[편집]
불교[편집]
불교의 삼보인 불, 법, 승이 전래되어 수용ㆍ발전되면서 발해의 문화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삼보의 불이란 부처의 혼과 정긴을 의미하는데 불교가 수용 됨으로써 부처의 이러한 정신을 따르기 위한 예배를 위해 당대 모든 역량을 다해 최고급 불상과 불탑, 사찰 등을 만들었다. 삼보 중에 법이란 불교의 경전 즉 부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문자가 있는 고급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불교를 통해 교육과 학문도 발전하게 된다. 승이란 석가모니의 뜻을 앞정소 따르는 승려들을 말하는데 불교가 존래, 발전되면거 많은 승려들이 구복과 경전연구를 위해 국제적 왕래를 하면서 경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불교는 종교를 넘어 사상과 학문, 교육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발해에서 불교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예배의 중심지인 사찰이 많이 건축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발해의 절터는 모두 40여 곳이다. 돈화의 구국지역에서 한 곳, 상경일대에서 10여곳, 중경 일대에거 13곳, 동경 일대에서 9곳이 확인되었고 흑룡강성 동녕현의 대승자성 안에서도 절터로 보이는 곳이 조사되었다. 또한 럿;아 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 5곳 함경도 일대에서도 5개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불탑도 많이 발견되는데 화룡시 용두산 고분군의 정효공주 무덤탑, 훈춘 마적달탑 압록강 상류의 장백 조선족 자치현의 영광탑 등이 유명하다. 또한 상경성터에 6미터나 되는 석등과 거대 석불이 남아 있는 것도 발해의 불교 수준을 알게한다. 이 곳에서는 불상만 1000여점 가까이 출토되었다. 불상에는 돌로 만든 석불, 철로 만든 철불, 구리에 금칠을 한 금동불 그리고 구리의 동불, 구리의 소조불, 마른옻칠을 한 건칠불 등이 출토되었으며 벽화에도 불상이 그려져 있었다. 불상 중 전불이라는 틀에서 뽑아낸 불상도 많았다.
발해의 불교는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60년 이상 수도였던 상경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관음신앙이란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반복 염불하여 현세의 권한에서 벗어나서 영험을 얻고 복을 얻고자하는 신앙을 말한다. 관음신앙은 화염경, 법화경 등 여려 경전 속에서 신앙을 체득하여 여러 형태의 불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동경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법화신앙이란 법화경을 중심으로 깨달음의 단계인 성문승, 영각승, 보살승의 3승이 1불승 하나로 통섭되는 회삼귀일을 이루려는 신앙형태를 맣안다. 이를 신앙하는 많은 사람들은 석가불과 다보불이 다보탑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발해 문왕이 불교를 호국이념으로 삼았는 것으로 보아 불교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도교[편집]
도교는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 발생하여 노장사상 & 유교 & 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 들여 형성된 종교이다. 도교가 성행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금액환단백문결, 해객론 등에서 발해인 이광현을 통해 기록된 도교의 흔적및 당에 보낸 마노궤는 신선(
경교[편집]
서양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는 그 특유의 끝이 넓게 펼쳐진 톡특한 모습의 십자가 석관으로 만든 네스토리우스교의 선교사와 신도들의 무덤이 중앙아시아, 중국에서도 발견되었으며 발해의 영역이렀던 러시아 연해주 아브리코스절터의 십자가 점토판 등이 발견되었다. 경교가 퍼질 수 있었던 까닭은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와 결합하였기 때문에 발해에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경교의 유적은 모두 불교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이다. 네스토리우스교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368~450)이 주장한 양성설(dyophysitism)을 따르는 종파들을 말한다.
군사[편집]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82]
발해의 군사제도 완비 과정은 크게 3시기로 분별하여 살필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건국 초기 확장된 영토 범위에 행정 제도를 마련한 시기, 두 번째 시기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되어 있는 10위 설치 시기, 세 번째 시기는 내양왕(內養
발해는 만주와 연해주, 흑룡강과 동해 연안 방면의 말갈족을 정복해오며 영토를 넓혀왔고 그 과정에서 여러개의 성을 쌓았다.
팔련성, 마리야노프카 성, 청해토성, 콕샤로프카 성터, 크라스키노 성터, 파르티잔스크의 니콜라예프카 성터, 스쵸클라누하 성터, 비트틱 산 성터, 류잔카 성터, 우스티-쵸르나야 성터, 남우수리스크 성터, 코르사코프카 성터, 노브고르데예프 성터 등이 있다.
첫 번째 시기[편집]
첫 번째 시기는 전반적으로 제도가 마련되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과거 고구려의 유제(
고왕·무왕 시기의 지속적인 영토 팽창을 통하여 강역권이 확정되고, 그 확정된 강역과 인구 및 세수의 확보를 통해서 관제의 개편과 완비가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 승병이 몇 만명에 불과하였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발해는 확대된 강역과 인구에 대한 전반적인 조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발해는 주변의 강국인 당(
두 번째 시기[편집]
두 번째 시기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된 중앙 부서와 10위가 설치되는 시기이다. 중앙에 설치된 3성 가운데 하나인 정당성(
다음으로 발해에는 "좌·우맹분위(
한편 《속일본기》에는 728년에 온 사신단 가운데 유장군(
특히 건국 초기 일본으로 간 사신들의 관직을 살펴보면 ○○장군·보국대장군 등 무관직을 지닌 인물들이 중심이다. 자사는 조서를 받들어 주를 감찰하는 지방 행정장관이고, 대장군 및 장군의 경우는 무관의 최고 지위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무관직이 보이고 있는 것은 이들이 사행(
세 번째 시기[편집]
세 번째 시기는 내양왕 왕종우가 발해 사행을 다녀온 이후 발해의 군사 상황을 보고한 시기이다. 832년 왕종우가 발해에서 돌아와 당 문종에게 올린 보고에서 "발해에는 좌우신책군(
왕종우의 보고 내용을 보면, 발해의 군제 조직도 당나라를 모방하여 위군(
발해가 당나라를 모방하여 부병을 설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발해가 장기적으로 대외 팽창을 통해서 강역을 확장한 것과 무관 가운데 자사, 낭장, 과의도위, 별장 등이 존재했던 것에 근거하면, 발해에는 부병제를 실시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 부여부는 거란의 변경에 있는데, 항상 강병을 설치하여 거란을 방비하였다." 라고 하여 발해에 10위 이외에도 각 부에 분명히 지방병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부병과 유사하여 변경의 대외 작전을 공고하게 하는 중요한 군사력이 되었다. 낭장·별장 등의 무관직은 모두 대무예 통치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이 시기 발해가 이미 당나라의 군제를 모방하여 금군과 지방군을 설치하여 군제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발해인은 본래 장정 3명이면 호랑이도 잡을 정도로 용맹함을 숭상하였으므로 군인이 된 자는 자연이 매우 용맹하였을 것이다. 그 군대의 수도 초기의 승병 수만에서 점차 후기의 수십만으로 확대되었다. 대무예 통치 시기에 발해의 병력은 고구려 30만 대군의 1/3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연히 생산과 정복이 상호 결합된 군사 통치 시기에는 노약자나 어린이나 모두 군사가 되었고, 심지어는 한 집안의 부자와 형제가 모두 군대에 포함되어 대외 전쟁의 수요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발해는 건국 이후에 확장된 강역에 행정적인 편제를 실시하였으며, 군사조직의 설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긴장 관계가 첨예한 부여부에는 항상 강병을 주둔시킬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을 집중시켰고, 초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사신단은 주로 무관이 그 중역을 담당했다. 이후 흑수말갈과의 전쟁,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군사적인 역량을 확장하였으며, 비로소 제도적인 정비가 완비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발해는 중앙 부서에 군사적 역량의 전반을 담당하는 지부와 그 산하에 융부, 수부를 설치하여 일원적인 제도를 마련하였다. 발해는 당의 부병제를 모방하여 10위를 설치하고, 더 나아가서는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그리고 120사로 군 체계의 개편을 도모하였다.[83]
외교[편집]
신라와의 관계[편집]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국제 정세 및 신라의 대당 관계에 따라 달라졌다. 대조영은 초기에 신라에 사절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을 것을 희망하였고, 신라는 이에 고왕에게 대아찬직을 수여하여 화답하였다. 또 다른 주장은 당시 신라가 나당전쟁의 앙금으로 당과의 국교가 일시 단절되는 상황도 이들 관계에 기여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신라는 발해가 자국의 영토를 침입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발해의 무왕당시 발해는 당과 신라 모두에게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었는데 신라 성덕왕(
당과의 관계[편집]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당이 발해 건국 초기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적 토벌을 강행하였지만 발해에게 계속된 패배에 의해 기존의 토벌방침을 바꾸어 발해를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주지역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맞물려 있었으며, 동북정책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당은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회유함으로써 발해의 토벌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그 결과 대조영은 왕자를 당에 파견하였고 당은 대조영을 책봉함으로써 국교를 수립하였다. 거란과 돌궐 등이 당의 변방지역을 공격하면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8년이 지난 713년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이후 무왕이 왕위에 올랐고 당과의 친선관계를 맺은 흑수말갈의 토벌을 위해 공격하려 하자 그의 동생 대문예는 당과의 전쟁을 걱정하여 토벌에 반대하게 되고 그 결과 대문예가 당에 망명하게 되는데 무왕이 당에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자 거절하니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당의 등주 등을 공격(장문휴로 하여금)하고 대문예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실패하여 무산되고, 당과 신라의 협공이 실패한 후 신라의 독자적인 공격, 거란의 당으로의 복속 등 국제정세가 발해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더 이상의 강경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736년 당과 발해는 상호간에 표류하고 있는 사신과 포로들을 교환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이후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두 차례 사신을 당에 파견하였으며 표서피 1000장과 건문어100구를 바치는 등을 통해 관계회복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문왕은 당의 책봉을 받게 되고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85]
일본과의 관계[편집]
727년 발해 무왕 때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이후 양국은 지속적인 교류관계를 유지해 왔다. 초기의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일본도'를 통해)이 발달하였다.하지만 초기에도 꼭 정치적인 외교로만 일괄된 것이 아니라 경제 및 문화 교류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으며 발해의 필요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의 필요성 역시 개입되어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의 예로 첫 번째 사절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고재덕 일행은 담비가죽 300장을 비롯한 교역물품을 가져갔는데, 이에 대해 일본은 비단수건10필, 거친명주 20필, 명주실100구, 면 200돈을 답례품으로 주었다고 되어있다. 이는 발해사가 가져간 모피가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이 자뭇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말하는 초기의 정치적 성격이란 당시 당/신라 등과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그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919년까지 발해는 일본을 총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은 발해를 13차례 방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총 47회에 이르는 교류는 양국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고려국왕이라는 호칭을 쓰며 자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알렸다. 일본 역시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정하며 견발해사를 파견하였다. 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종종 대립국면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여기에 대해 일본측은 자국을 방문해 오는 발해에 대해 일본이 주도적위치에서 외교적 요구를 내세웠고 발해는 이에 순응해왔다고 이해하고 있지만(군신의 관계성립), 이는 선점적인 권리를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의견이다. 743년 일본과 신라는 국교를 일시단절한 이후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우호적이었고, 일본은 후지와라 정권 때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는데 발해의 협조를 얻기 위해 발해에 사신을 더 많이 파견하기도 했다. 일본과 발해는 발해 멸망 직전까지 이러한 우호적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는 발해의 균형 외교책이 거둔 실리이기도 했다[86][87][88]
거란과의 관계[편집]
거란족은 4세기 후반부터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초기부터 부여 및 고구려와 교섭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고구려에 대하여 종속과 비종속적 관계를 계속 이어왔으며 640년대 전반부터 종주국인 당나라를 대리하여 고구려 공격의 최선봉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4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반 경에 이르기까지 중국 왕조와 고구려 세력의 중간에서 끊임없이 공격과 위협으로 존망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발해가 건국하는데는 거란족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거란족이 당나라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틈을 타 대조영이 옛 고구려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서 발해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왕 시기에는 발해, 돌궐, 거란의 3세력이 연합해 마도산 전투에서 당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후 발해의 국력이 선왕 시기에 이르러 강대해졌을 때에는 거란도(
1998년에 발해 크라스키노 성의 우물 내부퇴적토에서 거란의 화병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화병모양이며 목 가운데와 목과 어깨의 경계 부분에 돌대가 각각 1줄씩 돌아간다. 동체 하단부에는 9줄의 문양대가 돌아가고 있는데 모두 너비가 약간 있는 짧은 선으로 채워져 있다. 바닥의 가운데에는 둥근 원이 하나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토기의 전체 높이는 24.2㎝이다. 발굴 보고자들은 이 토기를 거란 토기로 보고함과 동시에 동체 하단부의 문양과 바닥의 둥근 원은 거란토기에 특징적이라고 지적하면서 거란이 발해를 정복할 때에 거란 군대가 이곳까지 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90] 이 형태의 화병모양 토기는 실제로 거란 유적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었는데 동체 하단부에 상기한 것과 동일한 문양이 시문된 경우가 많다. 요녕성 조양시 야율연녕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를 그 대표적인 예를 제시할 수 있다. 또한 거란에는 이 형태의 자기 혹은 시유 토기도 사용되었다. 그 중의 한 예로서 내몽골 과우전기 백신둔 요묘에서 출토된 ‘백유병’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토기는 거란 토기임이 틀림없지만 요 건국 이전과 이후로의 구분이 아직 분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거란의 사슴무늬 대형 화병모양 토기가 상경성 2호 궁전 기지에서 출토되었다. 경부와 동체 기저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데 원래는 동일 개체의 토기였을 것이다. 대형의 호로 보고되었지만 동체 어깨 부분에서 크게
축약되는 목 부분의 그림을 통해 볼 때에 화병모양 토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수제이고, 니질의 회도이며, 표면을 삼탄(
돌궐과의 관계[편집]
돌궐은 6세기 중엽부터 약 2백년 동안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활약한 종족인데 이들은 후에 동과 서로 나뉘게 되고 고구려 및 발해와 관계한 세력은 주로 동돌궐이었다. 발해의 고왕은 건국 초 당에게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이용해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고왕이 건국 전후로 하여금 돌궐에 사신을 파견한것은 돌궐과의 관계는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 제2대 무왕 시기 발해가 당의 등주 등을 공격하면서 발해와 돌궐사이가 가까워졌지만 당과 발해 사이가 호전되고 당이 돌궐을 공격하면서 발해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92]
흑수말갈과의 관계[편집]
흑수말갈은 오늘날 아무르강 중류 일대의 나이펠드-동인문화로 비정되고 있다. 이 문화의 발해이전 시기 유적들을 중심으로 그 범위를 추정해 보면 흑수의 동서 1천리는 대체로 소흥안령에서 하바롭스크 사이, 남북 2천리는 대체로 의란 부근의 왜긍하에서 블라고베쉔스크 시와 비슷한 위도선까지가 된다.[93]
흑수말갈은 대당관계에서 그 이름이 752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또한 775년 무렵에는 평로절도사의 관할범위에서 흑수말갈이 제외되기 때문에 이는 곧 이 무렵 흑수말갈이 발해의 통 제 하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으로 이해된다.[94] 따라서 불열, 월희, 철리 말갈은 모두 문왕 치세의 전반기에 발해에 복속되었고, 흑수말갈 역시 문왕대에 일정 기간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무르 지역의 나이펠드-동인 그룹 주민들은 이후 8세기경 서(
교통[편집]
발해의 5도[편집]
- 조공도(대 당 교역로. 압록강을 이용한 수로.)[101]
- 일본도(대 일본 교역로. 동경용원부에서 동해를 거친다.)
- 영주도(대 당 교역로. 상경에서 장령부를 거쳐 당의 영주도독부에 이르는길.)
- 거란도(대 거란 교역로)
- 신라도(대 신라 교역로. 용원부와 남해부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간다.)
역대 국왕과 연호[편집]
걸걸중상 乞乞 | |||||||||||||||||||||||||||||||||||||||||||||
1 고왕 대조영 698-719 | 대야발 | ||||||||||||||||||||||||||||||||||||||||||||
2 무왕 대무예 719-737 | ? | ||||||||||||||||||||||||||||||||||||||||||||
3 문왕 대흠무 737-793 | 4 대원의 793 | ? | |||||||||||||||||||||||||||||||||||||||||||
대굉림 | 6 강왕 대숭린 794-809 | 10 선왕 대인수 818-830 | |||||||||||||||||||||||||||||||||||||||||||
5 성왕 대화여 793-794 | 7 정왕 대원유 809-812 | 8 희왕 대언의 僖王 812-817 | 9 간왕 대명충 簡王 817-818 | 대신덕 | |||||||||||||||||||||||||||||||||||||||||
11 대이진 830-857 | 12 대건황 857-871 | ||||||||||||||||||||||||||||||||||||||||||||
15? 대인선 906?-926 | 14? 대위해 894?-906? | 13 대현석 871-894? | |||||||||||||||||||||||||||||||||||||||||||
- 대현석 이후 왕의 가계는 불분명하다.
- 대현석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록의 분실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왕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수 | 시호 | 이름 | 연호 | 재위기간 |
---|---|---|---|---|
- | 걸걸중상(乞乞 |
- | ||
1 | 고왕( |
대조영( |
698년 ~ 719년 | |
2 | 무왕( |
대무예( |
인안( |
719년 ~ 737년 |
3 | 문왕( |
대흠무( |
대흥( 보력( |
737년 ~ 793년 |
4 | 대원의( |
793년 | ||
5 | 성왕( |
대화여( |
중흥( |
793년 ~ 794년 |
6 | 강왕( |
대숭린( |
정력( |
794년 ~ 809년 |
7 | 정왕( |
대원유( |
영덕( |
809년 ~ 812년 |
8 | 희왕(僖王) | 대언의( |
주작( |
812년 ~ 817년 |
9 | 간왕(簡王) | 대명충( |
태시( |
817년 ~ 818년 |
10 | 선왕( |
대인수( |
건흥( |
818년 ~ 830년 |
11 | 대이진( |
함화(咸和) | 831년 ~ 857년 | |
12 | 대건황( |
857년 ~ 871년 | ||
13 | 대현석( |
872년 ~ 894년? | ||
14? | 대위해( |
894년? ~ 906년? | ||
15? | 대인선( |
906년? ~ 926년 |
- 13대 왕인 대현석을 경왕 · 마지막 왕 대인선을 애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과거 일본인이 신라의 경애왕과 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오류이다.[102]
- 발해에는 현재까지 모두 15명의 국왕이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13대왕 대현석과 14대왕으로 추정되는 대위해 사이 그리고 대위해와 마지막왕 대인선 사이에 단명한 왕들이 더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103]
- 환단고기에서는 11대 왕인 대이진이 장왕 또는 화왕으로 기록되어있다.
발해와 역사 인식[편집]
발해와 역사서[편집]
유득공(
- 《규원사화》의 토대가 된 《진역유기(
震域 遺 記 )》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대기》를 근거로 쓰였다고 한다. - 《단기고사》는 그 서문에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그러나 조대기, 진역유기를 토대로 후대 쓰여진 것이므로 ㅣ단계만 걷어내고 또 크로스 체크를 통해 충분히 한국사로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다.
발해사 인식[편집]
발해 스스로의 인식[편집]
무왕과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금의 인식[편집]
여진족 사람들이 자신의 선조의 사적을 기술한 《금사》세기 태조본기가 있는데, 금나라 사람들의 기록 중에서 《실록》에서 나온 것은 비교적 믿을 만하다.[104]
《금사》본기에는 금의 조상은 말갈(靺鞨)씨로 말갈의 본래 호칭은 물길(勿吉)이고, 물길은 옛 숙신(肅愼) 땅이었으며, 북조 시대에 물길에는 7부가 있었는데, 속말부(
또한 《금사》고려열전에는 당나라 초엽에 말갈에 속말(
금나라를 건국한 완안 아골타는 야율사십(耶律
청의 인식[편집]
청 제국 초기 문자옥(
청대 만주족의 정체성에 대한 시도의 정점[113]으로 만주족에게 처음으로 논리정연한 국사를 제공한[114]《흠정만주원류고》(
ᡩᠠ
ᠰᡝᡴᡳᠶᡝᠨ ᡳ
ᡴᡳᠮᠴᡳᠨ
ᠪᡳᡨᡥᡝ Hesei Toktobuha Manjusai Da Sekiyen-i Kimcin Bithe) 권6 부족 발해에서는 발해는 흑수말갈의 남쪽에 처했기에 말갈(靺鞨)의 속말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식[편집]
1919년, 발해사 연구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시기별·주제별 연구 현황, 발해사 연구의 동인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1,240편이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는 단연 고고학 분야가 가장 많고 발해사의 귀속 및 성격에 관한 연구가 뒤를 이었다.[117]
발해사는 청대의 《만주원류고》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사가 아닌 ‘만주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해사가 중국사로 편입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만주 침략 때부터였다. 역사지리학자이자 역사 전략가로도 평가받는 김육불은 일제에 항거하여《동북통사》를 집필하면서 ‘만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지역은 오직 중국의 ‘동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자주성이 전혀 부정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의 주민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인이 되었기에 중화인민공화국사의 일부라고 하는 비교적 학문적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118]
중국 학계에서 발해사 연구가 활성화된 계기는 건국 이후 논의되기 시작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해사 입장에서 보면, 이 두 시기에 종족 및 국가 성격에 관한 성과가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중원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건립한 정치체를 ‘지방정권’ 또는 ‘할거정권’이라고 인식하면서, 역사상의 각 민족관계를 ‘중앙과 지방’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발해사를 포함한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근본이론으로, 1949년 논의가 시작된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중국의 각 민족들이 스스로를 다민족국가 중국의 일원임을 인정하도록 하고, 과거 대한족주의자(
중국 학계는 한국 고대사만이 아니라 소수민족 역사를 영토적 관념에 그
뿌리를 두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동북공정(
몽골의 인식[편집]
발해가 멸망하자 유민들이 몽골 지역으로 이주하여 여러 곳에서 활동했 던 유적이 드러나고 있어 몽골에서도 발해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2008년 7월 2~3일에 걸쳐 ‘발해와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국내외 발해사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국제학술대회를 개
최했는데, 여기서 몽골의 국제유목문명연구소의 오치르(A. Ochir) 교수는 몽골에서 다수의 발해 유적이 발굴됐다고 하였다. 그리고 10세기 이후 발해 문화가 몽골로 전파돼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120] 발해 유적을 통해 그 문화가 몽골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전에 오운달뢰(
러시아의 이블리예프(A. Ivliev) 박사도 몽골 내 발해 유민과 관련된 유적에 대해 답사자료를 공개하기도 하였다.[122]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발해 유민 관련 유적을 조사하였다.[123]
러시아의 인식[편집]
1852년에 V. 고르스키가 〈만주 왕조의 시작과 첫 번째 일들〉이라는 논문에서 발해에 대해 언급하였고, 발해 왕국 시기를 ‘만주 역사의 황금시대’로 생각하였다.[124]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로 넘어간 뒤 현대 러시아의 발해사 전공자들은 모두 말갈족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곧 러시아 극동 역사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발해와 여진 시대 전문가인 E. V. 샤프꾸노프는 지금의 나나이족, 울치족, 우데게족, 오로치족, 만주족 그리고 일부 니브흐족의 역사가 발해와 이에 선행한 말갈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125] 러시아의 발해학계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말갈이 사회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룩한 독립 주권국가였다고 주장한다.[126]
신라의 인식[편집]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이 신ㄹ 국왕의 청원서의 형식을 빌어 당나라 황제에게 바친 《사불허북국거상표(
고려의 인식[편집]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고 배척하였으며 발해의 유이민을 대거 수용하였다. 또한 거란의 사신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였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 발해를 최초로 언급한 우리 나라의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그리고 북국(
조선의 인식[편집]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두 가지 흐름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지만,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128][129]
첫째 단계는 1484년에 간행된 《동국통감》의 역사인식으로서, 여기서는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하였던
역사로 파악하였다. 고려 태조가 거란에 대해 행한 정책을 두고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하여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130]라는 사론을 달아 비판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15~16세기를 지나 17세기까지 근간을 이루고 있었으며 박상의 《동국사략》(16세기초)을 비록하여 오운(
둘째 단계는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하였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하였으니, 한백겸의 《동국지리지》(1615)가 그 선구를 이루었다. 한백겸이 이 책을 저술한 동기 중의 하나가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는 데에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찾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져서 설명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허목의 《동사(
그러나 전기에는 발해사가 조선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정적 시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와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조선사의 일부로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신경준의 《강계고(疆界
이종휘의 이러한 발해사 인식은 《동사세가(
한편 후자는 유득공의 《발해고》(1784)가 큰 역할을 하였다. 유득공은 대씨는 고구려인이라 하고, 대씨가 소유한 땅은 고구려 땅이라 하고 있다. 유득공은 “대조영은 고구려인, 발해의 땅은 고구려 땅!”이라고 외치며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대조영에게 고구려 시민권을 주었고 고구려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131]또한 《발해고》 서문에서 고려가 발해를 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새로운 의식을 담았다. 이러한 의식은 김정호의《대동지지(
일제강점기, 70년대 이후[편집]
일제강점 독립운동기가 되어서는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발해사를 한국사로 정립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1880 ~ 1936)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를 독사신론에서 양국된 시대로 보았는가 하면, 장도빈(1888~1963)이 국사에서 양국을 남북국이라 하였고, 권덕규(1890~1950)와 황의돈(1890~1964) 도 조선유기에서 양국을 남북조라 하여 한국사에서 발해를 신라와 대등하게 다루었으며, 단군을 강조하는 대종교 계통에서도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의 일반적인 서술은 실증사학적 삼한정통론에 입각해 통일신라론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해방후의 발해사는 북한이 주도했다. 북한은 1960년대에 이미 만주지역을 중국과 공동으로 발굴해나가면서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라와 발해를 조선사의 양국시대로 적극이해했다. 그러나 연구사적으로 보았을 때 ,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70년대에 침체기를 겪게된다. 대한민국에서 발해사는 1980년대부터 수용하기 시작한다. 1980년부터 발해사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한국사에서 18세기 말, 유득공에 의해 탄생한 남북국시대론도 자리잡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고조된 정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분단 시대론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와 발해가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다는 즉 고구려가 발해사 중국사의 일부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이 확산되면서 다시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주민구성에 있어서 남북한은 80년대 말까지 공통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아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해 지배계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계층은 말갈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과 별개로 말갈이란 고구려의 변방유민을 멸시하여 부른 것이었기에 발해는 근본적으로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모두를 고구려유민으로 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발해사의 한국사적 의미를 더욱 굳혔고, 북한도 1990년대부터는 발해 피지배층이 말갈이란것에 대해 번복하였고 옛 고구려땅에 있던 사람들은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모두를 고구려유민이라고 주장했다. 남한은 문헌 중심의 정치,종족, 문화적 연구를 하였고 북한 고고학 측면에서 고구려의 계승성에 대해 집중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는 북한과 남한 사학계가 발해가 한국사인 것에만 집중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의 인식[편집]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대체로 1945년을 경계로 전·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에 앞서 19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 근대 역사학이 태동하면서 황국사관에 입각하여 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야시 다이쓰케(
그러나 일본 학계의 일각에서는 한국 고대사에서 발해를 배제시킨 점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카 미치요(
이후 일본에서 한국사의 위치에 발해사를 취급하여 개설류에 반영한 것은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의 역사(
발해 유민들의 활동[편집]
발해 유민은 거란 통치자의 폭위에 핍박당하다 수종들을 거느리고 고려, 후당 및 이후의 북주(
거란은 발해인들을 각 지역으로 이주시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요사》 지리지 중에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대규모의 이주는 크게 두 차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929년 발해의 도성 홀한성의 발해인들을 요하 유역의 임황부(臨潢
발해 유민의 고려 유입은 대체적으로 10~20만여 명 정도가 망명했다고 추정되며[144][145], 20만여 명을 초과한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146] 1011년에 거란은 고려에 정착했던 발해 유민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가 귀주(
양바오룽은 여진으로 투항한 인구수는 고려에 투항한 수보다 많지 않더라도 역시 수만으로 기록되거나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 밖에 《발해국사(渤海
금나라 지배 하의 발해인[편집]
11세기에 요가 점차 쇠퇴하였고, 변방의 여진가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내 요의 통제를 벗어나 금을 건국하였다. 스스로 왕조를 개창하지 못한 발해인은 여진이 건국할 때뿐만 아니라 요동을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협력적인 태도를 취했으므로 금대에서 특수한 정치사회적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여진은 발해인과의 친연성을 중시했으므로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금 초기에도 몽골제국과 유사한 종족등급을 구분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정황을 조자지(
- 해석
병권과 전곡을 소유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여진에게 베풀었고, 다음은 발해, 다음은 거란, 다음은 한인 순이었다
그러나 발해인이 세력을 형성하여 통제의 어려움이 있을까봐 해마다 연경의 발해인을 수백 가(
금 초에 요양의 발해인 망족(
여진 황실과 혼인을 맺은 자는 주로 요양 대씨(
발해인의 소멸[편집]
금 후기에 발해인은 정치적으로 여진 통치자에게 배척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발해 상층 인물과 여진 통치 집단의 갈등으로 인해 이들 양 종족이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며 금 치하에서 발해인은 줄곧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발해인은 피지배층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단이 분산되어 다른 종족과 융합되거나 출신지역의 명칭으로 바뀌어 발해인이라는 족칭이 점차 사라졌다. 마침내 몽골제국 시기에는 극소수의 발해인이라는 족칭이 사적에 보이다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152]
왕칭례(
같이 보기[편집]
- 한국의 역사
- 한국의 군주 목록
- 발해의 행정 구역
- 발해어
- 룽터우산 고분군
- 대조영 (드라마)
- 보덕국
- 만주의 역사
- 멸망 이후
- 말갈족
- 만주족
- 고구려어
- 고구려
- 소고구려
- 후고구려
- 고려
- 신발해시대
각주[편집]
한국의 역사 |
---|
만주의 역사 |
---|
내용주[편집]
- ↑ 문어
참조주[편집]
- ↑
上田 雄 (2001년 12월). 《『渤海使 の研究 』明石書店 》. ISBN 4750315079. - ↑
劉 毅 (1997년 7월). 《渤海国 の族 源 について-中国 ・日本 ・朝鮮 関連 史料 の考察 -》.国学院 雑誌 .國學院大學 . 60쪽. - ↑
庚午 帝 臨軒高 麗 使 揚 承 慶 等 貢 方 物 奏 曰高麗 國王 大 欽茂言 承 聞在 於日本 照 臨八 方 聖 明 皇帝 登遐 天宮 攀 號 感 慕不能 默止 是 以差 輔國將軍 揚 承 慶 歸 德 將軍 揚 泰 師 等 令 齎表文 幷常貢物 入朝 詔 曰高麗 國王 遙 聞先朝 登遐 天宮 不能 默止 使 揚 承 慶 等 來 慰 聞之感 通 永 慕益深 但 歲月 旣 改 海 內從吉 故 不 以其禮 相 待 也又 不 忘舊心 遣 使 來貢 勤 誠之 至 深 有 嘉 尙, (속일본기) - ↑
甲 寅 天皇 御 中宮 高 齊 德 等 上 其王書 幷方物 其詞曰武藝 啓 山河 異域 國土 不同 延 聽風猷但 增 傾 仰 伏 惟 大王 天朝 受命 日本 開基 奕葉重光 本 枝 百 世 武藝 忝 當 列國 濫摠諸 蕃 復 高 麗 之 舊居 有 扶餘之 遺 俗 但 以天崖 路 阻海 漢 悠悠 音 耗未通 吉凶 絶 問 親仁 結 援 庶協前 經 通 使 聘隣始 乎今日 謹遣寧 遠 將軍 郞 將 高 仁義 游 將軍 果 毅 都 尉 德 周 別 將 舍 航 等 廿 四 人 齎狀 幷附貂 皮 三 百 張 奉送 土 宜 雖賤用 表 獻 芹 之 誠 皮 幣 非 珍 還 慙掩口之 誚主 理 有限 披瞻未 期 時 嗣音徽永 敦 隣 好 於是高 齊 德 等 八 人竝 授正六 位 上 賜 當 色 服 仍宴五位已上及高齊德等賜 大 射 及雅樂 寮 之 樂 宴 訖賜祿 有 差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속일본기)》요로 4년 정월 병자조 기사,
遣 渡 嶋 津輕 津 司 従 七位上諸君鞍男等六人於靺鞨国,観 其風俗 。 이 기사에 대해서는 일본 홋카이도 북부의 아시와세(粛慎)설과 등이 발해를 가리켰다는 설이 대립 중이다. - ↑ 송기호 (2011).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99쪽. ISBN 9788952111470., 발해 건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당나라는 713년에 발해에 '말갈을 위로하는 사신'을 보냈다. 또한 발해에 정식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도 '진국'을 사용하지 않고 '말갈'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최흔이 대조영을 책봉하고 귀국한 뒤로부터 '말갈' 대신에 '발해'라 부르게 되었다.
- ↑ 송기호(1988), 〈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면적 인식과 그 배경〉, "한국사학" 19 발해말갈(渤海靺鞨)을 하나로 볼지 발해(渤海)와 말갈(靺鞨)로 구분하여 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조영(
大 祚榮)이 건국한 발해를 말한다고 본다. - ↑
契 丹 文 dan gur與 〈東 丹 國 〉國號 (─兼 評 劉 浦江 〈再 談 “東 丹 國 ”國号 問題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해 사회구성”. 2020년 11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9월 12일에 확인함.
- ↑ 우리역사넷
- ↑ 노태돈(
盧 泰 敦 ) 서울대 교수에 의하면 박혁거세(朴 赫居世 )에서 비롯한 신라 진골 귀족의 성씨로만 나오는 박씨 성이 고려 태조 8년과 21년(938년) 각각 1,000호와 3,000호를 이끌고 고려로 건너온 발해 유민 박어(朴 漁 )와 박승(朴 承 )에서 발견되었다. - ↑ 동아A 남-북-러시아 학자들 ‘동북아 고대국가’ 학술회의
- ↑ 동북아역사재단 편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2007). 《새롭게 본 발해사》. 동북아역사재단. 62쪽. ISBN 978-89-6187-003-0.
- ↑ “진단(
震 檀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2월 6일에 확인함. - ↑ 송기호, 1995, "渤海
政治 史 硏究 ", 일조각 - ↑ 장국종(1997), "발해사연구", 사회과학출판사
- ↑ 장국종(2001), "발해국과 말갈족", 사회과학원
- ↑ 가 나 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쪽~454쪽
- ↑
金 香 (1989) , 〈關 于渤海國 的 若干 民族 問題 〉, "社會 科學 戰線 " 1期 ("高句麗 渤海硏究 集 .成 "), 渤海 권1 27쪽 - ↑ 김종복(2005), 〈渤海
國號 의 성립 배경과 의미〉 "韓國 史 硏究 "128쪽 - ↑
金 毓黻(2007), "김육불의東北 通史 下 " 권5, 동북아역사재단, 573~574쪽 - ↑
趙 評 春 ( 1987), 〈'渤海國 '名 源 考 辨 〉, "學習 與 探索 " 5期 ("高句麗 渤海硏究 集成 " 渤海.卷 1, 哈爾濱 出版 社 , 39쪽~41쪽 - ↑ 일설에는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을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 ↑ 육정산(
六 頂山 ) - ↑
金 香 (1989) , 〈關 于渤海國 的 若干 民族 問題 〉, "社會 科學 戰線 " 1期 ("高句麗 渤海硏究 集 .成 "), 渤海 권1 27쪽 - ↑ 《구당서》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 祚榮驍勇
善用 兵 , 靺鞨之 眾及高麗 餘燼 ,稍 稍 歸 之 .聖 曆 中 ,自立 為 振 國王 ,遣 使 通 於突厥. - ↑ 《구당서》 212권 북적 발해말갈
中 宗 即位 ,遣 侍 御 史 張 行 岌往招慰之 . 祚榮遣 子 入 侍 ,將 加 冊立 ,會 契 丹 與 突厥連 歲 寇邊,使命 不 達 . - ↑ 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쪽 홀한주는 당의 문서에만 언급되는 명목상 주임이 틀림없는데, 발해의 수도를 지나 흐르는 목단강의 옛 명칭 후르하(Hurha)와 상응한다.
- ↑ 《구당서》 212권 북적 발해말갈 睿宗
先天 二 年 ,遣 郎 將 崔 昕往冊 拜 祚榮為 左 驍衛員外 大將軍 、渤海郡 王 , 仍以其所統 為 忽 汗 州 ,加 授忽汗 州都 督 ,自 是 每歲 遣 使 朝貢 . - ↑ 《책부원귀》봉책 선천 2년 3월
玄 宗 先天 二 年 (713)二 月 拜 高 麗 大 首領 高 定 傅 爲 特進 是 月 封 靺鞨大 祚榮爲 渤海郡 王 (大 祚榮,聖 曆 千自立爲振國王在營州東二千里.兵 數 萬 人 ,至 是 ,遣 郞 將 崔 訢往冊 命 祚榮左 驍衛員外 大將軍 渤海郡 王 . 仍以其所統 爲 汗 州都 督 ,自 是 每歲 遣 使 朝貢 . - ↑ 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454쪽
- ↑ 산동성 봉래
- ↑ 가 나 정당성·중대성·선조성(
正堂 省 ·中臺 省 ·宣 詔 省 ) - ↑ 가 나 충·인·의·예·지·신부(
忠 ·仁 ·義 ·禮 ·智 ·信 部 ) - ↑ 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
- ↑ 므일니꼬바 L.N., 네스쩨로프 S.P. / 정석배 옮김,〈
西 아무르 유역의 말갈 뜨로이쯔끼 그룹 토기와 민족문화사〉, "고구려발해연구" 32집, 고구려발해학회, 2008, 260쪽. - ↑ 대한민국국립문화재연구소; 러시아과학원(2008), 《트로이츠코예 고분군》 -서아무르 유역 한.러 공동연구 1.
- ↑ 기껏해야 요나라의 역사서인 요사에 발해 멸망 역사가 언급될 정도다. 그래서 발해의 멸망 이유에 대해선 많은 이유가 거론되고 있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으로 주장하고, 또 다른 일부 학자들은 발해 귀족들의 지도층 내분을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수도 급습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단, 백두산 폭발 시기가 발해 멸망 시기와 20년 정도 차이가 있다.
- ↑ <요사(
遼 史 )>권2 태조본기己 巳 , 諲譔請降 - ↑ “발해 (渤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12월 17일에 확인함.
- ↑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
- ↑ 중국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 ↑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신창군 토성리 청해토성
- ↑ 중국 길림성 임강시
- ↑ 김종복(2010), 《발해의 서남쪽 경계에 대한 재고찰》, 한국고대사학회
- ↑ 나성
- ↑ 황성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 ↑ 정석배(2016),〈발해의 북방경계에 대한 일고찰〉, "
高句麗 渤海硏究 第 54輯"第 54輯, 고구려발해학회. - ↑ 정석배(2016),〈발해의 북방경계에 대한 일고찰〉, "
高句麗 渤海硏究 第 54輯"第 54輯, 고구려발해학회, 117쪽. - ↑ 러시아 아무르강 북쪽 평원서 ‘발해 토기 조각’ 발견
- ↑ 이종욱(2005), 《고구려의 역사: 왜곡되고 과장된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한다》, 김영사
- ↑ 동북아역사재단(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 ↑
李 成 市 (1988),〈渤海史 硏究 における國家 と民族 -〈南北 國 時代 〉論 の檢討 を中心 に->≪朝鮮 史 硏究 會 論 文集 ≫ 25쪽 - ↑ 송기호(1991), 〈
大 祚榮의出自 와 발해의 건국과정〉"아시아문화"7,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 ↑ 이종욱(2005), 《고구려의 역사: 왜곡되고 과장된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한다》, 김영사
- ↑ 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55쪽
- ↑ 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20쪽
- ↑ 림호성(2004), 〈발해의 기본주민은 고구려유민〉, "고조선·고구려·발해 발표 논문집"
- ↑
王 承 禮 ·宋 基 豪 (1987),"발해의 역사", 춘천, 한림대학출판부, 126~127쪽 - ↑ 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18~119쪽
- ↑
魏 國 忠 ,朱 國 枕 (2006), "渤海國史 ",中國 社會 科學 院 出版 社 , 226쪽 - ↑ 이성시 (2001). 《만들어진 고대》. 삼인. ISBN 9788987519586.
- ↑ 송기호 (2011).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0, 36~37쪽. ISBN 9788952111470.
- ↑ 송기호 (2011).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7~39쪽. ISBN 9788952111470.
- ↑ 송기호 (2000).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72~76쪽. ISBN 9788933701775.
- ↑ 송기호 (2011).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42쪽. ISBN 9788952111470.
- ↑ 정영진(2009), 발해토기연구, 백산학회
- ↑ Frederick W. Mote, 《Imperial China 900-1800》(Cambridge, Ma. und London: Harvard uP, 1999), 2003, 33쪽
- ↑ 동북아역사재단, 한규철 (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36-240쪽.
- ↑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2~253쪽.
- ↑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4~255쪽.
- ↑ 가 나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6~257쪽.
- ↑
金 在 善 (2003), "渤海文字 硏究 ",民族 文化 社 ;尹 善 泰 (2007), 〈渤海文字 資料 의現況 과課題 〉, "大東 漢 文學 " 26 ; 고광의(2007), 〈발해의 언어·문자·문학〉,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 김무식(2008a), 〈발해 문자와 문자론적 특징〉,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8 국제학술대회 발표요지 ; 김무식(2008b), 〈발해 문자의 성립과 그 특징〉, "고고, 문자, 문화로 본 동아시아 문명", 경성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국제 학술대회 발표집 - ↑
童 萬 侖, 《洞北 史 綱要 》,黑龍江 人民 出版 社 , 182쪽 - ↑ Гоcударcтво Бохай(698-926 гг.)(1996), C. 172~204쪽
- ↑ 최의수, 《渤海
文字 에 대해 이강선생과 상론함》 - ↑
川崎 保 研究 メモ "〈渤海〉文字 資料 からみた女 真 文字 の起源 に関 する一 考察 - ヴォヴィン論文 (2012)を中心 として -" "古代 学 研究 202"古代 学 研究 会 2014년 7월, 34쪽 - ↑
詔 百官誥命女直、契 丹 、漢人 ,各 用 文字 , 渤海同 漢 人 . - ↑
王 承 禮 , 《渤海的 歷史 與 文化 》,延 边人民 出版 社 , 308쪽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 ↑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군사제도. 《발해의 역사와 문화》.
- ↑ 동북아역사재단 2007, 142 ~ 148쪽.
- ↑ 동북아역사재단 2007, 134 ~ 143쪽.
- ↑ 이이화 1999, 143-149,180쪽.
- ↑ 동북아역사재단 2007, 151쪽.
- ↑ “발해와일본의 관계”. 《네이버지식백과》.
- ↑ 동북아역사재단 2007, 165 ~ 170쪽.
- ↑ Болдин В.И., Гельман Е.И., Никитин Ю.Г., Ивлиев А.Л., 44쪽
- ↑ 정석배, 《유물로 본 발해의 문화교류》
- ↑ 동북아역사재단 2007, 171 ~ 172쪽.
- ↑ 정석배(2016),〈발해의 북방경계에 대한 일고찰〉, "
高句麗 渤海硏究 第 54輯"第 54輯, 고구려발해학회, 97쪽. - ↑ 김종복(2007),〈발해사의 전개와 영역 변천〉, "발해 5경과 영역 변천", 동북아역사재단, 90, 92쪽.
- ↑ 《
遼 史 》권38 〈地理 志 〉2東京 道 興 遼 縣 :唐 元和 中 渤海王 大仁 秀 南 定 新 羅 北 略 諸 部 開 置 郡 邑... - ↑ 《
新 唐 書 》〈渤海傳 〉:仁 秀 頗能討伐 海 北 諸 部 開 大境 宇有功 . - ↑ 김종복(2007),〈발해사의 전개와 영역 변천〉, "발해 5경과 영역 변천", 동북아역사재단, 106쪽.
- ↑ 정석배(2016),〈발해의 북방경계에 대한 일고찰〉, "
高句麗 渤海硏究 第 54輯"第 54輯, 고구려발해학회. - ↑ Нестеров С.П.(1988), Народы Приамурья в эпоху раннег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Новосибирск.
- ↑ 정석배(2016),〈발해의 북방경계에 대한 일고찰〉, "
高句麗 渤海硏究 第 54輯"第 54輯, 고구려발해학회, 114쪽. - ↑ 사료상 조공도라 되어 있으나,발해의 입장에서 등주도, 압록도라 부를 수 있다고 함
- ↑ 김육불, 《김육불의 동북통사, 하》,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09, 2007, 577~578쪽.
- ↑ 송기호, 《발해를 다시본다, 개정증보판》, 주류성출판사, 2008, 64~65쪽.
- ↑
金 毓黻, 동북아역사재단 번역, 《김육불의東北 通史 》상,"동북아역사재단번역총서" 동북아역사재단, 2007, 104쪽 - ↑ 《금사》본기1 태조1 세기,
金之 先 ,出 靺鞨氏 . 靺鞨本號 勿吉. 勿吉,古 肅愼地 也.元 魏 時 , 勿吉有 七 部 , 曰粟末 部 , 曰伯咄部, 曰安車 骨 部 , 曰拂涅部, 曰號室 部 , 曰黑水 部 , 曰白山部 .隋 稱 靺鞨, 而七 部 並 同 .唐 初 ,有 黑水 靺鞨·粟 末 靺鞨, 其五部 無 聞.粟 末 靺鞨始 附 高 麗 ,姓 大 氏 . - ↑ 《금사》열전 외국 하 고려,
唐 初 , 靺鞨有 粟 末 ·黑水 兩部 ,皆 臣 屬 于高麗 .唐 滅 高麗 ,粟 末 保 東 牟山漸 彊 大 ,號 渤海,姓 大 氏 ,有 文物 禮樂 .至 唐 末 稍 衰 ,自 後 不 復 有 聞.金 伐 遼 , 渤海來 歸 ,蓋 其遺裔也.黑水 靺鞨居 古 肅愼地 .有山 曰白山 ,蓋 長 白山 ,金 國之 所 起 焉. - ↑ 《금사》본기 1 태조 1 세기, 及太
祖 敗 遼 兵 於境上 ,獲 耶律謝 十 , 乃使梁 福 、斡荅刺 招諭渤海人 曰:"女 直 , 渤海本 同 一家 ."蓋 其初皆 勿吉之 七 部 也. - ↑ 《발해와 주변민족의 역사와 문화》 - 고구려발해학회 후원 학술회의 자료집 "제1부 발해와 주변민족의 역사"〈임상선, 북방지역 민족의 계통인식 재검토〉
- ↑
王 世 蓮 (1983), 〈渤海遺 民 與 金之 勃興 〉, "求 是 學 刊 " 1983-4, 100쪽, “事實 淸楚 表明 ,對 渤海遺 民 的 抗 遼 復 國 鬪爭 ,高麗 ,女 眞 採取 了 兩 種 截然 不同 的 立場 .前者 是 坐 山 觀 虎 鬪 , 以待兩 敗 俱傷,從 中 漁 利 .可 見 ,當時 的 高麗 臣民 並 不承認 渤海遺 民 是 自己 的 ‘同族 ’兄弟 , 也不承認 渤海是 ‘我 們祖先 的 國家 ’ ,更 不 想 充當 渤海遺 民 抗 遼 復 國 鬪爭 的 同盟 者 .與 高麗 相反 ,女 眞人 始終 如一,不 分 彼此 ,甘 冒 風 險 爲 ‘渤海遺 黎 ’上表 求 援,無條件 地 同 渤海人 一 起 ‘與 契 丹 人相 攻 ’ 其所以 如此,金太 祖 阿 骨 打 有 個 確 切 的 解釋 ‘女 眞 , 渤海本 同 一家 .” - ↑ 이용범,"
中世 滿 洲 ·蒙 古史 의硏究 ",同和 出版 公社 , 1988 - ↑
朱 國 忱 ·朱 威 , "渤海遺 迹",文物 出版 社 , 2002, 14~21쪽. - ↑ 김진광, 《중국의 발해사 연구 동향과 검토》, 머리말
- ↑ Crossley, Pamela Kyle. “《Manzhou yuanliu kao》 and the Formalization of the Manchu Heritage”. 《Journal of Asian Studies》. JSTOR 2057101.
- ↑ Elliott, Mark C. “Emperor Qianlong: Son of Heaven, Man of the World”. 《Library of Biography》. ISBN 978-0321084446.
- ↑ 장진근 역주. 《만주원루고》. 파워북. 226쪽. ISBN 978-89-8160-110-2.
- ↑ 한규철,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연구》, 인문학논총13, 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2008, 맺음말
- ↑ 김진광, 《중국의 발해사 연구 동향과 검토》, 맺음말
- ↑ 한규철,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연구》, 인문학논총13, 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2008, 맺음말
- ↑ 김진광, 《중국의 발해사 연구 동향과 검토》, 맺음말
- ↑ A. Ochir(2008), 〈몽골과 동아시아의 교류(10~11세기)〉, "渤海와
東 아시아",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학술회의 발표논문집 - ↑
烏 雲 達 賚(1998), 〈渤海唐 朝 的 覊縻國 ·西 渤海軼事 〉, "卾溫克 的 起源 ", 內蒙古 大學 出版 社 ; 윤은숙譯 (1998),〈〈西 발해〉와 몽골〉와 몽골〉, "博物館 誌 " 4·5합, 강원대학 교 박물관 - ↑ 이블리예프(2007. 6. 14), 〈러시아 학계의 발해사 연구 성과〉, 동북아역사재단 발표문
- ↑ 동북아역사재단(제2연구실)에서는 2008년 6월 9일부터 6월 14일까지 몽골 내 발해 유민 관련 유적지를 조사하였다.
城 가운데 친톨고이(Chintolgoi)성과 엠겐트(emgent)성이 대표적이라 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2007. 7), "동북아역사재단 News" 7호, 16쪽 - ↑ Горский, В., Начало и первые дела Маньчжурского дома // Тр. членов Российской духовной миссии в Пекине, Спб, Т. 1,1852
- ↑ Шавкунов, Э. В., Государство Бохайи памятники его культуры в Приморье, Ленинград, 1968, 4~5쪽
- ↑ Ивлиев, А. Л., Очерк истории Бохая //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Владивосток, 2005, 453~454쪽
- ↑
臣 謹按渤海之 源流 也。句 驪未滅 之 時 。本 爲 疣 贅 部落 。靺羯之 屬 。 - ↑
李 萬 烈 ,〈朝鮮 後期 의 渤海史 認識 〉(《韓 㳓劤博士 停年 紀 念 史學 論叢 》, 지식산업 - ↑ 가 나 다 라 마 바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30~234쪽. ISBN 9788961870177.
- ↑ 《
東國 通 鑑 》권 13, 고려 태조 25년史論 . - ↑ 이종욱 (2005). 《고구려의 역사: 왜곡되고 과장된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 한다》. 김영사. ISBN 9788934917625.
- ↑
林 泰 輔(1912), "朝鮮 通史 ",富山 房 , 12쪽 - ↑
朝鮮 總督 府 朝鮮 史 編修 會 (1938), "朝鮮 史 編修 會 事業 槪要", 76쪽 - ↑
那珂 通世 (1906), 〈古 の滿 洲 (1·2)〉, "地學 雜誌 " 205·206 - ↑ 다키자와 노리오키(2003), 〈
稲葉 岩吉 과 ‘滿 鮮史’〉, "한일관계사연구" 19, 116~121쪽 - ↑
朝鮮 總督 府 (1936), "朝鮮 史 のしるべ", 55쪽 - ↑
白鳥庫吉 (1933), 〈渤海國 に就 いて〉, "史學 雜誌 " 44-12 - ↑
朝鮮 史 硏究 會 編 (旗 田 巍 )(1974), "朝鮮 の歷史 ",三省堂 - ↑
三上 次男 (1968), 〈半 拉 城 出土 の二 佛竝 坐像 とその史的 意義 〉, "朝鮮 學 報 " 49 - ↑
酒寄 雅志 (2001년 3월). 《渤海と古代 の日本 》.校倉 書房 . 19쪽. ISBN 978-4751731703. - ↑ “
韓国 渤海を確固 たる韓国 史 にしようと〈官民 総動員 体制 〉に”. SAPIO. 2013년 3월. 2015년 11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31쪽. ISBN 9788961870566.
- ↑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34~235쪽. ISBN 9788961870566.
- ↑ 나영남 (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신서원. ISBN 9788979405538.
- ↑ 발해 유민(
遺 民 )과 꼬마 난민(難民 ) ‘쿠르디’ - ↑ 김위현, 渤海
遺 民 의再建 運動 :後 渤海와大 渤海 - ↑ "
遼 史 "권38,地理 2,東京 道 . - ↑ 박홍갑 (2007년 6월). “발해 유민
大 氏 의 한반도 정착 과정 -영순현과 영순태씨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16). 동북아역사재단: 114~115, 119. - ↑
魏 國 忠 ・朱 國 忱 ・郝慶雲 , 《渤海國史 》,中國 社會 科學 出版 社 . - ↑ 나영남 (2017). 《요 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신서원. 159~160쪽. ISBN 9788979405538.
- ↑ 김우순 (2012). 《발해국 멸망 후의 발해인 : 고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학위논문). 서강대학교 대학원.
- ↑ 가 나 다 라 나영남(2017), 《금대(
金代 ) 발해인(渤海人 )의 존재양태(存在 樣態 ) 및 정치적(政治 的 ) 위상(位相 )》, 중국사학회. - ↑ 《
三朝 北 盟 會 編 》卷 98, 〈靖 康 中 帙 七 十 三 ㆍ諸 綠 雜記 〉 (上海 古 籍 出版 社 , 2008), p.725. - ↑ 《
松 漠 紀 聞》,金 人 慮 其難制 ,頻 年 轉 戍山東 ,每 徙不過 數 百 家 ,至 辛 酉 歲 盡 驅 以行。 - ↑ 《
契 丹 國 志 》,至 辛 酉 歲 ,盡 驅 以從,其人大 - ↑ 《
金 史 》兵 志 , 熙宗皇統 五 年 ,又 罷 遼東 漢 人 、渤海猛 安 謀 克 承 襲 之 制 ,浸 移 兵 柄 於其國人 ... - ↑
王 承 禮 , 《渤海的 歷史 與 文化 》, 53쪽 - ↑
劉 浦江 , 《遼 金 史論 》,遼寧 大學 出版 社 , 109쪽
참고 문헌[편집]
- 일연, 《삼국유사》
- 유득공, 《발해고》, 1784.
- 진위푸, 《발해국지장편》
- 《발해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 조이옥 영산대 교수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ISBN 9788961870177.
외부 링크[편집]
- 〈해동성국 발해, 그 자취를 찾아서〉 Archived 2007년 12월 27일 - 웨이백 머신,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주)오픈에스이
- 박현배의 발해사
- 신라 5등급 벼슬 받은 발해 대조영의 '굴욕' 조선일보 2010년 4월 10일
- 발해의 성립과정
- (러시아어) 발해사
- 발해 유민이 고향을 버린 이유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 주간조선 2014년 11월 24일
- 발해, 동북아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