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한 페이지
![]() A Page Of Madnes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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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의 가면'을 쓰고 춤추는 무희(연기: 미나미 에이코) | |
감독 |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
각본 | |
제작 |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
원작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출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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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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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
국가 | 일본 |
언어 | 일본어(무성 영화, 무자막) |
『미친 한 페이지』(
이야기는 마쓰자와 병원을 견학한 기누가사의 제안에 의한 것으로, 가와바타, 기누가사 이누즈카 미노루(
1920년대의 유럽의 전위 영화 운동의 조류라고 불리는 작품으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년) 등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나,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5].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조한 표현주의적인 조명, 짧은 숏을 리드미컬하게 이은 수법의 플래시, 플래시백, 오버랩, 클로즈업, 다중 노출 등의 영화적 기법이 구사돼[5][11], 순수한 영상만으로의 표현이 추구되고 있다. 영상의 순수성을 노린 요리미쓰의 제안에 따라, 무성 영화이면서 전편이 무자막으로 됐으나, 실제의 상영에는 변사의 설명이 함께 되었기에, 영상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되지 않고, 그 점은 공개 당시에 지식인에게서 비판당했다[12][13].
공개 후, 본작은 오래간 유실 영화로 생각돼왔으나, 1971년(쇼와 46년) 정월에 기누가사의 자택의 창고에서 우연히 필름이 발견됐다[6]. 기누가사는 스스로 이것을 재편집하고, 새롭게 반주 음악을 넣은 「뉴 사운드판」을 제작하고, 1975년(쇼와 50년) 10월에 이와나미 홀(
스토리[편집]
심야의 정신병원. 밖에서는 격하게 비가 내리는 중에, 여성 환자인 무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계속 춤을 춘다. 이 병원에서 용인으로 일하는 노인은 쇠창살이 있는 병실의 앞에 서서, 한 명의 미친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은 용인의 아내이나, 광기로 인해 남편을 식별하지 못한다. 용인은 본래 선원으로, 긴 항해 생활로 가정을 돌아보고, 그로 인해 아내는 고독에 괴로워하며, 어린 아이들과 투신 자살을 계획했지만, 아이들만 죽이고 살아남아 발광하고, 이 병원으로 수용됐다. 노인은 자책에 싸여 아내를 지키기 위해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나, 병원의 사람들은 전원, 그가 환자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다.
다음날 아침, 부부의 딸이 혼담을 알리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나,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경악과 분노를 느낀다. 딸은 병실로 향하지만, 아무 반응도 없는 어머니에게 실망하고, 어머니를 미치게 한 아버지를 용서할 기분도 들지 않고 병원을 떠난다. 병원에서는 아침 진찰이 행해졌고, 용인은 아내를 진찰하는 의사에게 그녀의 상태를 묻지만, 상대해주지 않는다. 한편, 딸은 병원으로 돌아와, 문지기 소년에게 용인에 대해서 묻는다. 용인은 딸과 재회하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결혼에 대해서 묻는다. 아침 산책을 허락받은 아내는, 잔디밭을 걸으면서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고, 용인과 딸은 살짝 떨어진 곳에서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환자 한 명이 딸을 덮치려하자, 딸은 달려서 병원을 빠져나온다.
이후, 병원에서는 무희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고, 그것을 본 다른 환자들이 흥분해서 소란을 피우자, 간수나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돌아오려고 한다. 그러는 중에 한 명의 미치광이가 용인의 아내를 잘못 때려, 격분한 용인과 싸움을 벌이고, 용인은 의사에게 질책당한다. 낮에 선잠을 자던 용인은, 거리의 제비뽑기에서 일등상인 장롱을 뽑아, 딸의 혼례의 축하 선물이 생겼다고 기뻐하며, 딸이 기쁜 듯이 아버지에게 달려오는 환상을 본다. 점심 시간 뒤에, 딸은 아버지를 방문해, 결혼 이야기는 어머니가 미치광이라는 것이 판명나 허물어지고 있다고 하였고, 용인은 결혼을 단념하듯이 타이르자, 딸은 반항적인 태도로 나가버린다.
그날 밤, 용인은 아내를 병원에서 탈출시키려 하고, 남의 눈을 피해서 아내를 병실에서 데리고 나오나, 아내는 어둠을 무서워해 병실로 돌아가버린다. 용인은 간수의 발소리를 듣고 방으로 도망가지만, 그때 문의 열쇠를 떨어뜨려버린다. 그 뒤, 용인은 다시 아내를 데리고 나오려 하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에서는, 용인이 원장이나 미치광이들을 죽이고, 그곳으로 신부 의상을 입은 딸과 신랑 같은 미치광이가 탄 자동차가 달려오며, 아내가 차 앞을 가로막자, 딸은 남편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더욱이 죽였을 터인 원장들이 영구차에 올라타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이어서 용인은, 미치광이나 아내의 얼굴에 차례차례 '웃음의 가면'(노멘 등)을 씌우고, 자신에게도 가면을 씌우는 환상을 본다. 다음날 아침, 아내는 편히 자고 있고, 무희도 여느 때처럼 춤추고 있다. 열쇠를 잃어버린 용인은 아내의 얼굴을 보러 갈 수 없게 되고, 여느 때처럼 묵묵히 복도를 청소한다.
출연[편집]
특별히 기술이 없는 한은 본편(뉴 사운드판)의 크레딧에 기반한다[19].
- 용인: 이노우에 마사오(
井上 正夫 ) - 아내: 나카가와 요시에(
中川 芳江 ) - 딸: 이지마 아야코(
飯島 綾子 ) - 청년: 네모토 히로시(
根本 弘 ) - 의사: 세키 미사오(
関 操 ) - 미치광이 A: 다카세 미노루(
高勢 実 ) - 미치광이 B: 다카마쓰 교스케(
高松 恭助 ) - 미치광이 C: 쓰보이 데쓰(
坪井 哲 ) - 무희: 미나미 에이코
- 문지기의 아들: 다키구치 신타로(
滝口 新太郎 )(논크레딧)[20]
제작진[편집]
- 감독·제작: 기누가사 데이노스케[17]
- 원작: 가와바타 야스나리[19]
- 각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이누즈카 미노루(
犬塚 稔 ), 사와다 반코(沢田 晩 紅 )[21][주 1] - 촬영: 스기야마 고헤이(
杉山 公平 )[19] - 현상 주임: 아베 시게마사(
阿部 茂正 )[19] - 무대 장치: 하야시 가사쿠(
林 華 作 ), 오자키 지요(尾崎 千葉 )[19] - 배광: 우치다 마사오(
内田 昌夫 )[19] - 촬영 보조: 쓰부라야 에이이치[19]
- 감독 보조: 고이시 에이이치(
小石 栄一 ), 오스기 마사미(大杉 正巳 )[19] - 타이틀: 다케다 기요시(
武田 清 )[19] - 음악: 무라오카 미노루(
村岡 実 ), 구라시마 도루(倉嶋 暢 )(뉴 사운드판)[17]
제작[편집]
신감각파영화연맹의 결성[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b/b1/Teinosuke_Kinugasa_1923.png/150px-Teinosuke_Kinugasa_1923.png)
1925년(다이쇼 14년) 10월, 마키노 프로덕션(マキノ・プロダクション)에 소속돼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나오키 산주고(
기누가사는 먼저, 영화 제작에 필요한 카메라를 손에 넣기 위해, 지인인 독일인 청년 앨든버그에게 부탁해, 4000엔 정도의 영화 촬영기의 파르보 K형를 상하이까지 사러 가게 했다[27][28]. 파르보 K형은 4 개의 렌즈가 붙어있고, 400 피트의 필름을 장전 가능한 카메라로, 본작의 촬영에서도 사용됐다[29]. 더욱이 교토시의 자택에 현상소를 설치하고, 촬영소로 자택 근처의 차나무 밭의 공터를 빌렸다[28][30]. 기누가사가 처음 구상한 작품은 서커스를 무대로 한 노인의 이야기로[주 2], 순회 흥행 서커스의 좌석을 한 개월 전세 내, 차나무 밭의 공터에 서커스단의 천막을 펼치고, 그것을 촬영소 대신으로 촬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31].
1926년(다이쇼 15년) 3월, 기누가사는 새 영화 제작의 상담을 하기 위해, 아내의 간병을 위해서 하야마에서 머물러있던 요코미쓰에게 방문했다[32][33]. 기누가사는 이전부터 신감각파의 작가인 요코미쓰의 실험적인 소설에 관심을 드러내고, 예술적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32][34]. 요코미쓰는 기누가사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분게이지다이(
4월 10일, 세 명은 도쿄 스테이션 호텔(
시나리오[편집]
처음으로 기누가사가 구상하고 있던 서커스와 노인의 이야기는, 요코미쓰나 가와바타 등과 첫 회합을 하는 중에 미뤄지고, 대신 손이 비어있던 기사다 구니오가 『태엽의 장난(ゼンマイの
그런 어느 날, 기누가사는 요코미쓰 집을 방문하려고 역에서 내렸을 때 본, 정신병에 걸려있다는 어느 고귀한 사람의 일행에 기묘한 인상을 받은 것이 계기로, 문득 아시와라 장군(
그러나, 시나리오의 제1고는, 촬영이 시작할 즈음에 되어서도 완성되지 않았다[47][48]. 4월 29일에 가와바타는 도쿄에서 기누가사에게 집필 도중의 시나리오를 넘기고, 5월의 크랭크 인(촬영 개시) 후에 늦어져서 촬영 현장을 방문했고[49][50], '저 도쿄에서 기누가사 씨에게 도중에 그만 둔 시나리오를 넘긴 채로 되면,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교토로 와있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을 열흘 가까이나 질질 끄는 무책임에, 크게 혼날 각오도, 기누가사 씨가 사양하셔도,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정도도 좋습니다.'라고 서술다[51]. 각본이 미완성인 것은, '각본을 진짜로 완성하는 것은, 영화가 완성되고 난 후이다.'라고 생각하는 기누가사에게 있어서 문제가 아니었다[48]. 기누가사는 완성 도중의 시나리오를 받은 후에, 마키노 시대부터 팀으로 하고 있던 각본가의 사와다 반코(
촬영 종료 후, 가와바타가 촬영 대본과 메모를 기반으로, 가필이나 수정을 한 시나리오를 정리해, 7월 1일에 간행한 『에이가지다이(
제작진과 출연진[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b/Eiko_Minami_1931_1.jpg/150px-Eiko_Minami_1931_1.jpg)
본작의 제작을 위해 집결한 제작진은, '뭔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라는 강한 생각을 품은 20대의 청년뿐이었다[63][64]. 촬영 감독은 스기야마 고헤이(
주연의 용인 역에는, 미리 기누가사가 생각하고 있던 무대 배우인 이노우에 마사오(
외의 출연자로는, 기누가사의 닛카쓰 무코지마 촬영소(
촬영[편집]
촬영 장소에 대해서는, 스토리의 변경으로 당초 예정돼있던 차나무 밭의 공터에서의 촬영은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쇼치쿠 중역인 시라이 신타로(
당시의 시모가모 촬영소는 사용되지 않았고, 빈집과 다름없이 어질러진 채 방치되었기에, 먼저 기누가사와 제작진들은 촬영소의 제초를 하고, 5월 6일에 촬영을 개시했다[72][73]. 크루는 약 70명으로, 기누가사와 제작진들은 촬영소의 배우 방에서 합숙했다[48][74]. 이노우에의 스케줄이 5월 내내 밖에 비울 수 없어, 일정이 빡빡했고, 기누가사 등은 불면불휴로 일해, 촬영은 밤샘이 이어졌다[8][75]. 손이 비어있는 사람은 모두 일을 돕고, 제작진뿐만 아니라 이노우에를 포함한 배우들도, 무대 장치와 소품, 그 외 잡무까지 했다[51][64][76]. 니혼가미인 여자아이 역의 여배우가 다수 출연하는 제비뽑기 신의 촬영에서는, 하필 개최 중이던 아오이마쓰리 때문에 마을의 가미유이(
촬영소 내에 정신병원의 복도나 병실 등의 세트가 짜여졌지만, 저예산이기에, 전부 수제로 궁리해 만들어졌다[64][74]. 촬영소는 낮 동안에 자연광으로 촬영하기 위해 통유리로 돼있는 글라스 스테이지였고, 조명 기재도 낡은 카본 라이트 8대 정도 밖에 없어서 준비가 불충분했다[24][77]. 기누가사 등은 라이트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세트 벽에 화지를 초배하고, 그 위에 은가루를 바르는 것으로, 빛의 반사를 좋게 하는 방안을 궁리했다[77]. 더욱이 벽에 입체감을 내기 위해, 근처의 목욕탕에서 손에 넣은 유연(
당시의 무성 영화 표준 촬영 속도는 1초 16컷(16fps)이었으나, 본작은 1초 18컷(18fps)으로 촬영됐다[80]. 본작에서는 여러 촬영이나 편집 기술이 사용됐으나, 당시는 편집에서 사용하는 러시 프린트를 만들지 않아, 직접 네거티브로 편집을 하지 않으면 안 됐고, 또 무비올라처럼 편집 설비에서 화면의 흐름을 확인하는 것을 할 수 없었기에, 꽤 고생이 걸렸다. 기누가사는 촬영한 필름의 화면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 카메라에 촬영 완료한 필름을 장전하고, 렌즈를 보면서 카메라의 뒤쪽을 열어 빛을 넣고, 촬영 때와 같은 속도로 크랭크를 돌리는 것으로, 카메라를 무비올라의 대용으로 했다[81]. 촬영 조수인 쓰부라야는, 본작에서 빵 막대를 사용해 카메라를 상하좌우로 흔드는 촬영법을 발견하는 등, 여러 촬영 기법을 연구했고, 그것은 후의 특촬물 기술로 이어지는 것으로 되었다[82].
크랭크 인으로부터 8일 후인 5월 14일, 기누가사에게 완성 도중의 시나리오를 넘긴 채로 하고 있던 가와바타가 촬영소에 들어와, 10일간 정도 현장에서 만났다[51][83]. 그 사이, 가와바타는 촬영을 견학하고, 촬영 대본의 회의에서 참가하는 등, 클라이맥스에서 미치광이들에게 가면을 붙인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해, 사와다와 교고쿠(
공개[편집]
시사와 극장 공개[편집]
촬영은 5월 31일 즈음에 종료되고, 6월 6일에 기누가사는 완성된 필름을 가지고 상경했다[72][87]. 기누가사는 요코미쓰가 작품을 봐줄 것이라 생각하고, 휴대용 영화기를 가지고, 요코미쓰가 아내의 간병을 위해 머물러 있던 하야마(
6월 17일에는 도쿄 아사히 신문(
완성으로부터 약 3개월 후인 9월, 신주쿠의 양화 전문관에서, 예술적 작품을 상영하는 고급 아트 시어터로 알려진 신주쿠 무사시노관(
무사시노관에서의 상영은, 9월 24일부터 1주간에 걸쳐 행해졌고, 인기 변사였던 도쿠가와가 설명을 담당했다[96]. 신문 광고에서는 기누가사를 '일본의 조셉 폰 스턴버그'라고 소개하고, '아연!! 일본 영화계를 뒤흔드는 대예술편' 등의 캐치프레이즈가 더해졌다[96]. 무사시노관과 동일한 24일은, 아사쿠사의 파라마운트 직영의 도쿄관(
흥행 실패와 연맹의 해산[편집]
무사시노관에서의 수익은 1500엔으로, 히트로는 되지 못 했지만, 관에 있는 고급 영화 팬을 유지하고, 그런대로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93]. 그러나, 다른 영화관에서의 흥행 성적은 저조했고, 또 당시의 일본 영화가 국내의 대부분의 영화관에서 수 개월에 걸쳐 상영되는 것으로 사익을 얻고 있던 중, 본작은 상영관이 적고, 일본 안에서 넓게 상영된 것도 아니었기에, 전체적 흥행으로는 성공하지 못 했다[103][104]. 전체로의 배급 수입은 7500엔이었으나, 이는 2만 엔 이상이나 한 제작비를 회수하는 것에는 부족했고, 결과로 1만 엔을 넘는 손실을 냈다[96][103].
기누가사가 도쿄에서의 공개 중에도 팔러 가는 등으로 분주했던 사이, 제작진들은 기누가사가 계속해서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믿고, 교토의 합숙처 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105][106]. 수익은 개봉이 결정돼 상영되고, 수수료 인상에 따라 번번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제작진들에게 송금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105][107]. 빚에 더해서 그들의 생활도 업고 있던 기누가사는, 다음 영화 제작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무일푼으로 다음 일에 착수하는 것은 할 수 없었고, 어려움이 계속됐다[106][107].
그때에 쇼치쿠 사장인 오타니 다케지로(
한편, 신감각파영화연맹은, 1926년(다이쇼 15년)에 본작에 이어지는 제2회 작품으로 기누가사 감독인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소설 『다락방의 산책자(
필름의 재발견과 뉴 사운드판[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2/Iwanami_Jinbocho_Building_ac.jpg/180px-Iwanami_Jinbocho_Building_ac.jpg)
그 후, 본작의 필름은 1950년의 쇼치쿠 교토 촬영소(
기누가사는 스스로 이 필름을 재편집하고, 새로 무라오카 미노루(
1971년(쇼와 46년) 4월 27일, 도쿄의 이와나미 홀에서 뉴 사운드판의 특별 시사회가 행해졌고, 가와바타를 시작으로, 조감독을 맡은 고이시 에이이치(
뉴 사운드판은 일본 국외에서도 상영돼, 유럽에서는 일본보다도 먼저 일반 공개가 행해졌다[17]. 프랑스에서는, 1972년에 기누가사 자신이 16밀리의 프린트를 파리로 가지고 가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시사를 한 뒤, 1975년 3월에 극장 공개됐다[121][122]. 이탈리아에서는, 1972년의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작은 시사가 행해진 뒤, 페사로 영화제에서 상영됐다[121]. 영국에서도, 1972년 즈음에 런던의 아트 시어터에서 공개돼, 그 후에도 각지의 시네클럽이나 대학, 아트 시어터 등에서 상영됐다[121]. 포르투갈에서는, 1973년에 기누가사가 리스본의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Fundação Calouste Gulbenkian)과 국립 영화학교에서 초대됐을 때에, 굴벤키안 재단의 극장에서 상영됐다[123]. 그 외에, 1975년까지 소련이나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에서도 상영됐고, 독일에서는 TV 방영됐다[121].
그 후의 상영과 홈 미디어[편집]
![]() |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블라인드 맨 (악단)에 의한 연주가 있는 상영[124]이며,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본작의 오리지널 프린트는, 일본 국립 영화 아카이브(
2010년(헤이세이 22년) 3월, 헤이조 천도 1300년 기념 사업(
2017년 6월, 미국의 홈 비디오 회사 Flicker Alley는, 본작의 16밀리 프린트를 소재로 하는 Blu-ray를 발매했다. 이 디스크에는 Henwar Rodakiewicz의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소년의 초상화(Portrait of a Young Man)』 (1925-1931년)도 수록돼있다[135][136]. 2018년 3월에는 프랑스의 영화 회사 랍스터 필름이 프랑스어 자막판 DVD를 발매했다[137]. 일본과 한국에서는 DVD는 발매되지 않았으나, YouTube나 니코니코 동화 등의 동영상 공유 서비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127].
2021년(레이와 3년), 기누가사 집에서 발견된 35밀리의 가연성 포지티브 필름이, 청색으로 염색된 것이 발견됐다. 뉴 사운드판을 포함한 재발견 이후에 상영돼온 필름은 흑백판이기에, 오래간 본작은 단색 영화로 추정됐으나, 이 발견으로 1926년(다이쇼 15년) 당시는 청색 염색으로 상영됐음이 판명됐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 국립 영화 아카이브와 IMAGICA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서비스(IMAGICAエンタテインメントメディアサービス)는 청색 염색을 재현한 '염색판' 필름을 작성하고, 2022년(레이와 4년) 5월에 일본 국립 영화 아카이브에서 행해진 상영 기획 '발굴된 영화들 2022(
주제[편집]
본작은 일본 영화에서 처음으로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작품으로, 병원 측의 관리 체제나 병동의 공간적 분할, 치료의 광경, 혹은 식사나 노동 작업, 실내 산책 등의 환자들의 생태가 현실적으로 그려졌다[139]. 한편, 정신병원의 권력과 환자들로의 억압과 감금, 이에 저항하는 환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영화 평론가인 요모타 이누히코(
본작은 과거의 잘못으로 가족을 불행하게 한 전 선원의 남편과, 그 때문에 정신에 이상이 온 아내, 어머니의 병으로 고민하는 곧 결혼해야 할 딸을 등장인물로 하는 가정 비극이, 기본적인 이야기로 전개된다[142][143].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의 일본의 영화나 무대의 현대극의 주류였던 신파극 비극에 흔히 있는 것이다[97]. 요모타도, 본작은 '참신한 수법과 감상적인 멜로 드라마의 결합물이라는 형태'를 잡고 있고, 부녀가 결혼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는 신이나, 가난한 딸과 브르주아 청년과의 사랑이라는 설정 등으로, 신파 멜로 드라마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144]. 공개 당시의 신문이나 영화관의 프로그램 등의 줄거리에도, 비이야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이러한 신파 비극적인 이야기가 소개되었고, 일본 영화 연구자인 아론 제로는 그것이 '이 작품의 특질의 양식을 무시하고 보통의 영화와 다름없는 이야기적인 쾌락을 선전하는 작전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97].
기누가사는, 이러한 이야기로 전 선원인 주인공을 설정한 것에 대해서, 다이쇼 시대는 아직 일본 국외로 나가는 것이 힘들었기에, 그런 시대에 국외로 자유롭게 가는 선원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남자의 명리(
문학 연구자인 도에다 히로카즈(
이 가면을 씌우는 신에 대해서, 기누가사는 자서전에서, 마쓰자와 병원을 견학했을 때에, 환자들의 대부분이 무표정이었으나 결코 개성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에서 떠올랐다고 서술했다[148]. 한편, 가와바타는 온화한 웃음의 가면으로 고민이나 광기를 감싸, 용인이나 환자들을 구해주고 싶었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서술했다[75]. 이 신의 해석에 대해서, 미나구치는 '아버지가 남성 환자에게 가면을 장착시키는 치유 행위가, 병원 조직의 부권 제도에 대한 저항의 꿈'을 표현했다고 했다[149]. 요모타는, 용인이 스스로 솔선해서 가면을 쓴 것으로, 아내의 광기를 나누어 가지면서, 아내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고, 이는 병동에서 사는 환자들의 공동체로 돌아간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봐, '과거의 소행이 원인으로 깊은 후회에 사로잡혀있던 주인공은, 이 회귀를 통해서 스스로 광기 쪽으로 이동하고, 오래간 도달하지 못 했던 구제에 결국 도달했다'라고 서술했다[150].
비교 문학 연구자인 에릭 카즈딘(Eric Cazdyn)은 『자본의 섬광: 일본의 영화와 지정학(The Flash of Capital: Film and Geopolitics in Japan)』(2002년)에서,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작을 정치적 우의로 해석했다. 카즈딘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사회에 있어서 근대화가 '외부로부터 얻은 심적 외상'이라고 인식했고, 이 외상에서 20세기 전반의 일본에서는 국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주변 제국으로의 식민주의가 야기됐다는 주장을 전제로 하고, 본작이 '규율이 주어지지 않은 채 확장된 몸이, 병든 정신과 같이, 규율 하에 제도화돼 가는' 이야기이고, '외부(세계 시스템)가 국수주의적인 내면을 쌓아올려 가는' 과정으로 우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가면을 씌우는 신은, '외부에서 강요된 근대가 아닌, 서구의 "진짜" 근대와 일본의 "가짜" 근대의 사이에 가로놓아진 차이로의, 도발적인 제언'으로 해석했다[151].
스타일[편집]
전위 영화로의 스타일[편집]
본작은 일본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전위 영화(아방가르드 영화)이다[113][152]. 20세기 초반의 유럽에서는 [[야수파], 입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기존의 질서나 규범을 타파하려는 전위 예술 운동이 성행했다[153][154]. 그것은 영화에도 파급됐고, 1920년대에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 순수 영화, 절대 영화, 소비에트 몽타주파 등의 전위 영화 운동이 일어나고, 구래의 영화가 가진 이야기성이나 지각 등의 틀을 해체해서, 새로운 영화적 표현의 가능성이 추구됐다[92][153][155]. 본작은 이들의 전위 영화 운동의 조류와 호응하는 것으로, 종래의 일본 영화의 상식을 타파해, 새로운 영화 표현을 수립하려고 시험하고, 동시대에 일본에서 공개된 전위 영화의 실험에 영향을 받으면서 만들어졌다[92][156][157][158].
본작에서도 영상 표현의 순수성과 가능성이 추구됐고, 여러 영화적 기법이 구사됐다[159]. 기누가사도 카메라를 자유롭게 구사해, 영화 표현이나 영화 기술 상의 실험을 거의 다 해냈다고 서술했다[160]. 이러한 실험을 하면서, 무성 영화이면서 무자막으로, 영상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거기에 정신병자의 주관적 이미지도 더해져, 제정신과 광기가 서로 섞여 혼돈의 인간의 내면 세계가 순수하게 영상만으로 전개된다[18]. 이 때문에 이야기를 정연히 파악할 수 있게 작품이 돼있지 않고, 이야기 이해에 난해함을 동반하나, 어디까지나 이야기는 이차적인 의미 밖에 갖지 않고, 영상의 이미지 방법이 중시된다[18][143][157][161].
제로는, '인식론의 틀――무언가에 관한 지식을 지지하는 구조――을 구축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부수는 것으로 되는 정석적인 전략'을, 본작에서 가장 지배적인 양식의 하나로 봤고, 그 전략의 누적 효과로 '현실과 환상, 제정신과 광기 사이의 경계를 부수고, 인식의 본질로의 의문'이 던져졌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초반부의 무희의 신에서, 처음에 관객은 현실의 댄스 리뷰로 인식하나, 그 뒤에 창문의 쇠창살이 비치고,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녀의 망상을 함께 보고 있던 것이 암시되는 효과이다[162].
영상 표현의 순수성[편집]
본작에는 프랑스의 순수 영화나 독일의 절대 영화에 가까운 영상 스타일이 나온다[163]. 이들의 운동에서는, 영화가 문학이나 연극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나 연기 등의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한 영상 표현에 철저히 하려는 시험이 이루어졌다[92][153][163]. 순수 영화로는 르네 클레르 감독의 『막간』(1924년)이나 페르낭 레제 감독의 『기계적 발레』(1924년), 만 레이 감독의 『에마크 바키아』(1926년) 등이, 이야기를 가지지 않고 영상의 운동과 리듬으로 작품을 전개했다[153][164]. 절대 영화로는 한스 리히터의 『리듬(Rhythmus)』 시리즈(1921년-1925년)나 비킹 에겔링의 『대각선 교향곡』(1924년) 등이, 추상적인 선과 모양의 움직임만으로 영상을 시험했다[153][163]. 1920년대 일본에서도, 영화 잡지 등에서 순수 영화나 절대 영화의 이론은 소개됐다[87].
본작에서도 순수한 영상만으로의 표현이 추구되고 있으나, 그것은 순수 영화나 절대 영화 정도로 과격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면, 초반부의 호우 신에서 비와 홍수와 천둥만의 리드미컬한 몽타주나, 거의 극적인 의미는 가지지 않는 순수한 움직임과 그 몽타주의 재미로 보이는 무희의 댄스 신 등, 부분적으로 순수 영화 같은 요소를 볼 수 있다[165]. 또, 용인의 아내의 주관적 시점의 영상으로, 볼록 거울이나 오목 거울에 의해 크게 왜곡돼 비치는 무희의 영상이 등장하나, 이것도 기하학 모양의 운동을 소재로 한 『에마크 바키아』 등에서 보이는, 영상을 현실의 표상에서 가능한 한 분리해, 추상적인 도형의 운동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실험적 시험과 방향성은 같다[166].
본작에서 빈번히 나오는 회전하는 둥근 고리와, 그것을 나누는 수직선이라는 추상적인 도형의 이미지(주제를 참조)도, 순수 영화나 절대 영화에 영향을 준 입체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떠올리게 하며[140][153], 문예 평론가인 후쿠시마 료타(
무자막의 시험[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e/Emil_Jannings_in_The_Last_Laugh.jpg/220px-Emil_Jannings_in_The_Last_Laugh.jpg)
무성 영화에서는, 숏과 숏의 사이에 대사나 상황 설명 등을 적은 인터타이틀(중간 자막)을 삽입하는 것이 보통이나, 본작에서는 영상 표현의 순수성을 추구하기 위해 전편이 무자막으로 돼있다[18][169]. 제작 당초는 '아버지', '병든 어머니', '어느 날―' 등과 같이, 등장인물이나 일시의 설정을 드러내는 자막이 몇 가지 삽입됐으나, 시사 단계에서 요코미쓰가 무자막을 제안하고, 기누가사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자막 전체를 할애해, 전부 영상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88][90].
무자막의 시험은 결코 본작이 처음은 아니고, 이미 독일 영화에서는 카를 그루네 감독의 『거리』(1923년)나 루푸 픽 감독의 『섣달 그믐날』(192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감독의 『마지막 웃음』(1924년) 등이 무자막으로 상영됐다[88][90]. 특히 유명한 작품이 『마지막 웃음』으로, 마지막 신에서 한 부분만 자막이 들어가는 외에는, 전부가 무자막으로 돼있다[88][158]. 이 작품이 1926년(다이쇼 15년) 9월에 일본에 공개되자, 자막을 영화적 화법의 활용을 방해하는 불순물로 보는 자막 폐지론이 일본 내에서 소리가 높아질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112]. 기누가사는 『분게이지다이(
그러나, 자막 없이 복잡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어렵고, 관객에게 있어서도 영화 이해의 방해가 되기 때문에, 무자막은 이상론으로 쉽게 시험되는 것은 아니었다[163][169]. 또, 본작의 상영에는, 당시 일본 영화의 통상 상영 상태였던 변사에 의한 설명이 동반됐기에, 무자막으로 한 것으로, 완전히 영상의 순수성을 유지하지는 못 했다[169]. 변사는 본작의 무대나 주인공의 내력 등, 영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미를 관객에게 설명해, 관객의 영화 이해를 도왔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본 관객은, 본작으로부터 신파 비극적인 이야기(주제를 참조)를 읽어내고, 용인의 깊은 슬픔에 감동하거나, 어머니의 병 때문에 결혼이 파혼될지도 모르는 딸의 운명에 마음을 움직이거나 하였다[170]. 무자막으로 영상의 순수성을 추구하면서도, 관객의 이해를 보증하기 위해 변사의 설명 추가로 상영된 것은, 반대로 본작을 영화로 보다 불순한 것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공개 당시부터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첫 공개 시의 평가를 참조)[12][13].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영향[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9/Untitled_%28Cesare_-Conrad_Veidt-_Carrying_Jane_-Lil_Dagover-_across_Rooftops%29_LACMA_M.82.287.1e.jpg/220px-Untitled_%28Cesare_-Conrad_Veidt-_Carrying_Jane_-Lil_Dagover-_across_Rooftops%29_LACMA_M.82.287.1e.jpg)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a/A_Page_of_Madness_-_1926.jpg/220px-A_Page_of_Madness_-_1926.jpg)
1920년대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는,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년)에서 대표되듯이, 과장한 조형이나 빛과 그림자를 강조한 조명 등에 의해, 불안이나 혼돈 등의 어두운 심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적이다[171][172]. 일본에서도 1921년에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공개되자 큰 화제로 되고, 그것을 계기로 표현주의 영화가 유행하고, 일본 영화에도 영향을 줬다[145][173]. 본작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형식이나 내용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고[174][175], 문학 연구자인 구리쓰보 요시키(
특히 정신병원을 무대로 해, 정신병자의 환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부터의 영향이 크다[145][175]. 영화 연구학자인 야마모토 기쿠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외의 표현주의 영화로부터의 영향으로는, 가면을 씌우는 신의 아이디어가, 칼 하인츠 마르틴 감독의 『아침부터 밤까지』(1920년)에서의 줄무늬가 강조된 분장에서 유래하고, 용인의 아내가 벽을 거울로 보고 화장 흉내를 하는 신이, 아르투르 로비슨 감독의 『그림자』(1923년) 등의 벽에서 거울이 생긴다는 묘사와의 관련성이 인정된다[176][177].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하나로 되는 『마지막 웃음』도, 무자막의 시험 이외로의 영향이 지적됐다[158][176]. 도에다는, 『마지막 웃음』 초반부의 격하게 비가 내리는 화면과 비옷을 입은 호텔 도어맨의 모습이, 본작 초반부의 뇌우에 의해 점멸하는 화면과 병원의 앞에 서있는 비옷을 입은 노인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초반부 신의 이미지가 서로 겹친다고 지적했다[158][11].
독일 표현주의 영화 특유의 밝음과 어두움 또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조한 조명 효과는, 본작에서도 특징적인 표현 수법의 하나로 사용된다[178]. 도에다는, 정신병원의 복도 신에서,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사용됐다고 지적했고, '원근법에 의해 복도의 안길이가 드러나고, 거기에 더해서 쇠창살에 드는 빛과 그림자의 인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뿐만 아니라, 용인이나 아내의 그림자도 효과적으로 사용됐다'라고 서술했다[178]. 요모타는, 용인이 병동에 잠입하는 신 등에서는, 영상에 먼저 인물의 그림자만이 비치고, 그 다음으로 본체인 인물이 등장하듯이, 그림자가 흡사 독자적으로 의지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본체에서 독립한 형태로 등장하는 수법이 보이나, 이러한 그림자의 연출도 『그림자』나 무르나우의 『파우스트』(1926년) 등의 표현주의 영화에서, 그림자가 또 하나의 등장인물로, 독자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듯이 보이게 하는 수법과 같다고 지적했다[179].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의 영향[편집]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는, 여러 새로운 영화적 기법을 구사해, 이야기보다도 등장인물이 안는 기억, 사고, 환상 등의 인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적으로, 특히 감정의 흐트러짐을 표현하기 위해, 짧은 숏을 리드미컬하게 잇는 '플래시'라고 불리는 편집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180][181][182][183]. 일본에서는 1925년(다이쇼 14년) 전후에 아벨 강스 감독의 『철로의 백장미』(1923년)나 알렉산드르 볼코프(Александр Волков) 감독의 『킨』(1923년), 자크 카틀렝 감독의 『괴물들의 갤러리』(1924년) 등의 인상주의 영화가 공개되고, 그 수법의 토대로 된 레옹 무시낙 등의 영화 이론이 소개되자, 일본 영화에서 플래시가 대유행하는 등, 대부분의 작품이 영향을 받았다[180][184]. 본작도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이다[176][180].
미야모리 난지로(
숏 기법[편집]
본작은 플래시의 기법에 더해서, 복수의 영상을 같은 화면 상에 겹치는 다중 노출, 회상 등 과거 장면의 영상을 삽입하는 플래시백, 이미지의 출현이나 소실의 기법인 오버랩 등과 같은, 숏을 잇는 영화적 편집 기법이 사용된다[125][159][188]. 특히 다중 노출은 작품 전체에 걸쳐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예시로, 가면을 씌우는 신에서는 시종일관 그 영상에 쇠창살의 영상이 겹쳐 나온다[189]. 오쿠보 미카(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것도 있고, 본작은 전체로 800 이상의 숏으로 구성돼있다. 무성 영화 시대의 할리우드 영화의 숏 길이는 평균 5.7초인 것에 반해, 본작의 1숏의 길이는 평균 3.3초이고, 요모타에 의하면 이는 '상궤를 넘어 빠르다'고 한다[125]. 처음 1권(약 9분)만으로 숏 수는 220이나 있고, 그 중에는 0.5초나 1초 정도의 길이 밖에 없는 숏도 포함돼있다[190]. 당시 일본 영화 제작자는, 변사가 장황하게 설명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한 개의 숏을 오래간 이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많고, 짧은 숏으로 잇는 것에 소극적이었기에, 본작의 숏 수의 많음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125].
『미친 한 페이지』와 신감각파[편집]
신감각파와 영화[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2/Bungei_Jidai_first_issue.jpg/180px-Bungei_Jidai_first_issue.jpg)
본작은 일본의 문학가가 영화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선구적 사례의 하나이고[191][주 9], 새로운 예술을 생산하려는 문학가와 영화인의 협력의 결과가 드러난 작품이다[188]. 본작으로 기누가사와 손을 잡고, 신감각파영화연맹을 결성한 『분게이지다이(
1920년대의 일본에서는, 영화가 신흥 예술로 지식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으나, 신감각파의 문학가들도 본작 이전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신감각파의 문학과 영화는 하나로 되어있었다[42][197]. 요코미쓰는 단편 소설 『파리(
신감각파 문학가의 제작 상의 공헌[편집]
신감각파영화연맹 결성의 호소인인 요코미쓰는, 병이 악화된 아내를 간병하기 위해, 영화 제작에 직접 종사하는 것을 할 수 없었으나, 연맹의 정신적 지주로 되는 존재였다[32]. 요코미쓰가 본작의 창조 면에서 큰 공헌을 한 것은, 제목의 변경과 무자막으로의 상영을 제안한 것이다[34]. 제목에 대해서는, 당초는 현재형인 『미치는 한 페이지(
무자막으로의 상영은, 순수 영화나 절대 영화의 동향을 감지하고 있던 요코미쓰가, 영상의 순수성의 추구를 노린 것으로 주장한 것이다[87][159]. 도에다에 의하면, 요코미쓰는 '자막을 배제하는 것으로 영상의 순수성을 철저하게 하고 무성 영화 표현의 고유성을 중시하는 것이, 새로운 일본 영화의 실험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200]. 이러한 요코미쓰의 이념은, 신감각파영화연맹의 안에서도 공유되고, 본작이 무자막으로 상영되자, 『분게이지다이』 동인들의 의견으로 현재화하고, 신감각파의 한 사조를 형성했다[202]. 예를 들면, 가와바타는 신감각파영화연맹이 '문예적인 영화'가 아닌 '영화적인 영화'를 지향한다고 표명했고[41], 가타오카는 '영화는 질릴 때까지 움직이는 그림과, 그것을 보는 감각의 사이에서만 만들어지는 상호 이해의 진행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발언했다[203]. 기누가사에 의하면, 요코미쓰뿐만이 아니라, 기시다도 무자막으로 하는 견해를 서술했다고 한다[204].
가와바타는 영화인과 공동으로 촬영 대본을 작성하고, 그것을 정리한 시나리오를 잡지 상에 발표하는 등, 본작의 제작에 밀접하게 관계됐다[205]. 가와바타는 시나리오에서, 영상의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언어화할지를 시험했다. 예를 들면, 초반부 신은 시나리오에서 '밤. 뇌병원의 지붕. 피뢰침. 호우. 번개.'라고 쓰고, 장면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를 추출해, 그 단어만을 나열하는 수법을 잡는 것으로, 짧은 숏의 연속으로 영상의 리듬이 만들어지는 실제 영상을 언어화하고 있다[206]. 또 '용인'의 아버지와 딸이라는 설정에서도 가와바타의 발안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는 가와바타가 전 연인인 이토 하쓰요(
그 뒤의 창작으로의 영향[편집]
요코미쓰는 본작에 있어서, 언어를 배제하는 것으로 영화 고유의 표현 형식을 추구했으나, 그것은 문자가 언어에 의한 예술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하는 계기로 되었다[205]. 요코미쓰는 본작의 제작에 관련된 것을 계기로, 문학의 형식주의를 주장하게 됐고, 영화의 표현에 접하는 새로운 문학적 표현을 시험했다[210]. 그 구체적인 실천 예는 『상하이(
가와바타는 본작의 촬영 장소에서의 실체험을 밑바탕으로, 단편 소설 『혼례와 장례(
본작에서의 각본 참가 경험은, 그 후의 가와바타 소설의 문체에도 영향을 줬다[10]. 가와바타는 본작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이전보다 더욱이 영화 표현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의 창작을 시험했고, 그 예로 『어두운 거리(
평가[편집]
첫 공개 시의 평가[편집]
본작은 흥행적으로 실패했지만, 영화 비평론가나 지식인들에게는 큰 기대와 주목을 기반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전위성이나 고상한 예술성 등이 높게 평가됐다[157][200][217]. 본작을 지지하는 평론가 대부분은 엘리트주의적 입장을 표방했고, 설령 일반 대중이 작품의 숭고함을 이해 못 했다고 해도, 그것은 작품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해, 세속에 아첨하지 않는 순수한 영화라는 것을 칭찬했다[217][218]. 1926년도의 키네마 순보 베스트 텐(
이와사키 아키라(
『주쿄 키네마(
후지모리 세이키치(
그런 한편, 무자막으로 인한 작품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217][232]. 『에이가지다이(
나오키 산주고(
후년의 평가[편집]
그 뒤, 본작은 뉴 사운드판의 공개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아방가르드 영화의 선구적 작품으로 역사적으로 평가돼, 많은 영화사 연구자에 의해서, 세계 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된다[157][236]. 사토 다다오(
본작은 일본 국외에서도 잘 알려져있는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113][239]. 1970년대에 뉴 사운드판이 공개됐을 때, 영국의 영화 잡지 『사이트 & 사운드』의 존 질레트(John Gillett)는 '그〔기누가사〕의 추상적 이미지 사용은 오히려 급진적이고, 혁신적이다'라고 평했고[240], 『옵저버』의 조지 멜리(George Melly)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나 『전함 포템킨』 등의 고전적 작품과 비교하면서 본작을 소개했고,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아벨 강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함께 영화적 창조자의 판테온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121]. 『뉴욕 타임스』의 노라 세이어는, 1975년 뉴욕 공개 시에 '이 최면술적인 작품은, 50년 가까운 옛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강렬함과 스마트함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했다[241].
포르투갈의 영화 감독인 파울루 호샤에 의하면, 1972년에 리스본에서 상영됐을 때에는, 국립 영화 학교의 학생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다고 했고, '『미친 한 페이지』와 같은 "새로운" 작품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1920년대의 영화에 대해서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우리들의 낡은 개념을 전부 타파하고, 놀라움과 흥분을 일으켰다'라고 서술했다[123]. 호샤는 본작에 대해서, '이 기적의 영화 안에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미래주의라는, 그 시대의 제일 좋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했고, '그 때문에, 이 『미친 한 페이지』는,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신선하고, 시대를 초월해, 영화 그 자체의 순수함을 가지고, 미래로의 영화 예술의 길을 과시한다'라고 서술했다[123].
그 후의 일본 국외의 영화 비평가의 반응으로는, 1985년에 『시카고 리더』의 조나단 로젠바움이, 작품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이나 이미지, 광기의 묘사를 '놀랄 만큼 매력적'이라고 칭찬했고[242], 2016년에는 『Ozus' World Movie Reviews』의 데니스 슈워츠(Dennis Schwartz)가 본작에 'A' 평가를 내리고, '큰 감정적인 힘이 있고, 활기로 차면서도 불안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했고[243], 2002년에는 『미드나이트 아이』의 재스퍼 샤프(Jasper Sharp)가 '『미친 한 페이지』는 당시 영화 제작자가 알고 있는 모든 영화 기술을 구사한, 놀라운 영상의 연속으로 당신을 압도한다. 오늘날에도 기누가사의영화는 데이지처럼 신선하게 보인다'라고 평했다[244]. 동년에는 『타임 아웃』도 작품을 칭찬했고, '여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도전적인 일본 영화 중 하나이다'라고 평했다[245]. 2021년에는 『슬랜트 매거진』이 발표한 「사상 최고 호러 영화 베스트 100(The 100 Best Horror Movies of All Time)」에서 51위에 올랐다[246].
일본 국외의 영화사 연구에 있어서, 본작은 1920년대의 일본 영화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논해진 작품이다[247]. 요모타에 의하면, 본작에 대해서 언급한 문헌은, 관계자의 증언을 따로 하면, 일본어보다도 영어로 집필된 것이 많다고 한다[247]. 미국의 일본 영화 연구자인 아론 제로는, 2008년에 본작을 상세하게 고찰한 연구서 『미친 한 페이지: 1920년대 일본의 영화와 현대성(A Page of Madness: Cinema and Modernity in 1920s Japan)』을 미시간 대학교에서 간행했다[248].
시나리오 수록 간행물[편집]
- 『키네마 순보 별책 일본 영화 대표 시나리오 전집 제2권(
キネマ旬報 別冊 日本 映画 代表 シナリオ全集 第 2巻 )』(키네마 준포샤(キネマ旬報社 ), 1958년 3월) -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 제1권 이즈의 무희(
川端 康成 全集 第 1巻 伊豆 の踊子 )』(신초샤, 1959년 11월 30일) - 『키네마 순보 별책 일본 영화 시나리오 고전 전집 제1권(
キネマ旬報 別冊 日本 映画 シナリオ古典 全集 第 1巻 )』(키네마 준포샤(キネマ旬報社 ), 1965년 12월) -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 제1권 이즈의 무희(
川端 康成 全集 第 1巻 伊豆 の踊子 )』(신초샤, 1969년 5월 25일) -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 2대 작품 미친 한 페이지/십자로(
衣笠 貞之助 監督 2大 作品 狂 った一 頁 /十字路 )』(이와나미 홀(岩波 ホール), 1975년 10월 10일) -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 제2권 소설 2(
川端 康成 全集 第 2巻 小説 2)』(신초샤, 1980년 10월 20일)
같이 보기[편집]
주해[편집]
- ↑ 뉴 사운드판(1975년)의 본편 크레딧에서는 「원작자•가와바타(
原作 者 ・川端 )」라고만 돼있고, 각본가의 이름은 크레딧돼있지 않다[19]. 이누즈카는 저서 『영화는 아지랑이와 같이(映画 は陽炎 の如 く)』(2002년)에서, 기누가사가 후년에 영화 본편과 관련한 인쇄물에서 이누즈카와 사와다의 이름을 지우고, 가와바타를 원작자로 세워, 기누가사가 양립하려고 해, 흡사 『미친 한 페이지』를 가와바타와 기누가사만의 작품으로 발표했다고 비판하고 있다[22]. - ↑ 그 이야기는 '비바람이 거센 밤, 한 명의 노인이 사람이 없는 서커스 오두막을 방문하고, 좌중의 사람들과 노인과의 극적인 운명을 회상한다'는 신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다[31].
- ↑ 기시다의 『태엽의 장난(ゼンマイの
戯 れ)』은, 『가이조(改造 )』 1926년 7월호에 게재돼[44], 1989년에 간행한 『기시다 구니오 전집 제1권(岸田 國士 全集 第 1巻 )』에도 수록됐다[45]. - ↑ 당초는 수도원을 무대로 해 『미치는 성(
狂 へる聖 )』 『미치는 성지(狂 へる聖地 )』라는 타이틀로 구상됐다고 한다[11]. - ↑ 이누즈카는 『영화는 아지랑이와 같이(
映画 は陽炎 の如 く)』에서, 요코미쓰와 가타오카도 교토에서 시나리오 작성에 참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55][54]. 이것에 대해서 문학 연구자인 도에다 히로카즈(十 重田 裕一 )는 요코미쓰가 교토로 향했다는 기록이 없고, 임시로 시나리오 작성에 참가했다고 해도, 아내의 간호를 하고 있었기에 장기 체재는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56]. 영화 평론가인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 犬 彦)는 요코미쓰가 아내의 간병으로 하야마를 벗어날 수 없었고, 교토행이 결행됐는가는 의문인 데다가, 이누즈카의 주장이 101세일 때에 한 것으로, 그 신빙성에 의문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57]. 고야노 아쓰시(小谷野 敦 )에 의하면, 요코미쓰나 가타오카도 참가했다는 이누즈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학자도 있으나, 꼭 이누즈카의 증언이 신용되는가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54]. - ↑ 이누즈카는 『영화는 아지랑이와 같이(
映画 は陽炎 の如 く)』에서, 『에이가지다이(映画 時代 )』에 게재된 가와바타의 명의의 시나리오는, 이누즈카가 작성한 내무성에 제출하기 위한 검열용 대본으로, 가와바타가 퇴고 가필을 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59]. - ↑ 『키네마 순보 별책 일본 영화 시나리오 고전 제1권(
キネマ旬報 別冊 日本 映画 シナリオ古典 全集 第 1巻 )』의 저자 표기는 '원작•가와바타, 각본•가와바타, 기누가사, 이누즈카, 사와다'로 돼있으나, 이와나미 홀의 팜플렛의 저자 표기는 '각본•가와바타, 각색•기누가사, 가와바타, 이누즈카, 사와다'로 돼있다[16][61]. - ↑ 각 개봉관에서의 병영 작품은, 무사시노관은 콜린 무어 주연의 『아이린』(1926년), 도쿄관과 고메이관(
光明 館 )은 할버트 브레논(Herbert Brenon) 감독의 『노래와 춤추는 남자』(1926년), 시바조노관은 프랭크 터틀(Frank Tuttle) 감독의 『매니큐어 소녀』(1925년), 교토 쇼치쿠자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검은 해적』(1926년), 고베 키네마 클럽(神戸 キネマ倶楽部 )은 윌리엄 A 세이터(William A. Seiter) 감독의 『롤링 홈』(1926년)이다[96][101][102]. 오사카 쇼치쿠자에서는 MGM 작품의 『미로의 여자(迷路 の乙女 )』(1924년) 쇼치쿠 악극부(松竹 楽劇 部 )에 의한 실연 『파랑새』를 같은 프로그램으로 넣어서 흥행시켰다[101]. - ↑ 문학의 영화계와의 교류는, 본작 이전에도, 1920년에 다이쇼 가쓰에이(
大正 活 映 )에 참가해 『아마추어 클럽(アマチュア倶楽部 )』 등의 각본을 담당한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연합영화예술가협회(聯合 映画 芸術 家 協会 )에 참가한 나오키 산주고(直木 三十五 ) 등의 예가 있다[34][192]. - ↑ 시나리오에서는, 결말은 '청년의 밝은 서양식 방. 아무도 없다. 그 방의 아름다운 꽃다발이, 딸과 청년의 내일의 결혼을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돼있다[16].
출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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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
- (일본어)
狂 つた一 頁 -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 - (영어) A Page of Madness – 올무비
- (영어) A Page of Madness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 (영어) A Page of Madness – 로튼 토마토
- (영어) A Page of Madness - TCM 영화 데이터베이스
- A Page of Madness at SilentEra Archived 2014년 8월 27일 - 웨이백 머신
- A Page of Madness: The Lost, Avant Garde Masterpiece from Early Japanese Cinema (1926) in Film | January 17th, 2019
- Midnight Eye En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