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미코
히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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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왜왕 | |
야마타이국 여왕 | |
재위 | 189년 ~ 248년 |
전임 | ? |
후임 | 도요 |
이름 | |
휘 | 히미코 |
봉호 | 친위왜왕( |
신상정보 | |
출생일 | ? |
출생지 | 야마타이국 |
사망일 | 248년 |
사망지 | 야마타이국 |
국적 | 야마타이국 |
성별 | 여성 |
히미코(일본어:
사서의 기술
[편집]『삼국지』의 비미호
[편집]「위지 왜인전」의 비미호
[편집]「위지 왜인전」(
일본 후쿠오카현(
이미 나이가 많았던 데다 남편도 없어(
비미호가 죽고 왜인은 직경 백여 보(이 시기 중국의 백 보는 일본의 2백 보에 해당하였다)가 되는 큰 무덤을 만들었고, 노비 백여 명을 순장하였다(
「위서 제기」의 비미호
[편집]『삼국지』(
연보
[편집]『삼국지』
[편집]- 시기 불명 - 왜국은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70~80년간) 이후 왜국이 어지러워져서 서로 싸우다가(5~6년간), 이윽고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였다(비미호 즉위). 귀도를 신봉하며 많은 무리를 홀렸다. 나이는 이미 고령으로 남편이 없었고 남동생이 나라의 통치를 보좌하였다.
- 경초(
景 初 ) 2년(238년) 12월 - 비미호, 처음으로 난승미(難 升 米 ) 등을 위에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바쳤다. 위에서 친위왜왕(親 魏 倭 王 )이라는 금인(金 印 )과 구리 거울 1백 매를 하사하였다.[1] - 정시(
正 始 ) 원년(240년) 대방군(帯 方 郡 )에서 위의 사자가 왜국을 방문하여 위나라 황제의 조서와 인수(印綬 )를 받들어 왜왕으로 책봉되다. - 정시 4년(243년) 12월 - 왜왕의 대부(
大夫 ) 이성기(伊 聲 耆)、액사구(掖 邪 狗 ) 등 8인을 다시 사신으로 위에 파견, 액사구 등은 솔선중랑장(率 善 中 郎 将 )의 인수를 받았다. - 정시 6년(245년) 난승미에게 황당(
黄 幢)을 수여하다.[2] - 정시 8년(247년) - 왜는 재사(
載 斯)、오월(烏 越 )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구노국(狗 奴 国 )과의 전투를 보고하다. 위는 장정(張 政 )을 왜로 보내어 난승미에게 조서와 황당[3]을 수여하다. - 시기 불명 - 비미호가 사망하고, 무덤을 조성하였다. 남자 왕이 섰으나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고 주살된 자가 1천 명이나 되었다. 비미호의 종녀(
宗 女 )인 「일여」(壹 與 )의 13세에 왕으로 세워 나라 안이 마침내 진정되었다. 왜의 여왕 일여는 액사구 등 20명에게 장정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도록 하였고, 액사구 등은 그대로 위의 낙양에 남녀 생구 30인과 백주(白 珠 ) 5000개, 책대구주(青 大 句 珠 ) 2개, 무늬가 기이한 잡금(雑 錦 ) 20필을 바쳤다.
『후한서』(後 漢書 )
[편집]- 건무중원(
建 武 中元 ) 2년(57년) - 왜노국(倭 奴 国 )이 금인(金 印 )을 수여받았다. - 영초(
永 初 ) 원년(107년) - 왜국왕 수승(帥 升 )이 안제(安 帝 )에게 배알을 원하였다. - 환제(桓帝)와 영제(
霊 帝 ) 사이(146년 - 189년) - 왜국대란(倭国 大乱 ) - 189년 전후? - 한 사람의 여성이 있어서 이름을 비미호라 하였다. 나이가 들도록 혼인을 하지 않고 신귀도(
神 鬼道 )를 섬겨 으레 요술을 부려 대중을 홀렸다.
『진서』(晋 書 )
[편집]- 태시(
泰 始 ) 2년(266년) - 왜의 견사(遣 使 )가 입공(入貢 ). 사마대국(邪馬台国 )으로부터의 최후의 입공이다.
『삼국사기』(三 国史 記 ) 신라본기(新 羅 本紀 )
[편집]- 173년 - 왜의 여왕 비미호(
卑弥呼 )가 신라에 사자를 보내 오다. - 193년 - 왜인이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걸하러 신라까지 넘어왔다.[4]
- 208년 - 왜인이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신라는 이벌찬(
伊 伐 飡) 석이음(昔 利 音 )을 보내어 이를 막았다. - 232년 - 왜인이 신라를 쳐들어 와서 수도 금성(
金城 )을 포위하였는데, 신라왕이 몸소 출진하여 왜병을 몰아냈다. 신라는 경기병을 보내 이를 추격하였고 죽이고 잡은 왜병이 모두 1천 명이나 되었다. - 287년 - 왜인이 신라로 쳐들어 와서 일례부(
一礼 部 )를 습격하고 불살랐으며 신라 병사 1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삼국사기』 석우로전
[편집]- 233년 - 왜병이 신라의 동쪽으로부터 쳐들어 왔다. 신라의 이찬(
伊 飡) 석우로(昔 于老)가 사도(沙 道 )에서 왜군과 싸웠다. 석우로는 화공의 계책을 써서 왜군의 배를 불사르고 왜병은 물에 빠져 전멸하였다. - 249년 - 왜국 사신이 신라의 서불한(舒弗邯) 석우로를 죽였다.
다음 세 가지 중국 정사에도 관련 기사가 있으나, 모두 왜국의 역사를 개괄한다는 문맥에서의 기술로 사료로써의 가치는 낮다.
- 『양서』(
梁 書 )
- 『수서』(
隋 書 ) -
- 환제와 영제 사이(146년 - 189년) - 왜국대란
- 189년 전후? - 비미호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어 귀도를 써서 으레 대중을 미혹시켰으며 이로 해서 국인이 함께 왕으로 세웠다.
- 『북사』(
北 史 )
기록
[편집]삼국지
[편집]其
國本 亦 以男子 爲 王 ,住 七 八 十 年 ,倭國 亂 ,相 攻 伐 歷年 ,乃共立 一 女子 爲 王 ,名 曰卑彌呼 ,事 鬼道 ,能 惑衆,年 已 長大 ,無 夫 婿 ,有男 弟 佐治 國 。自 爲 王 以來 ,少 有 見 者 。以婢千 人 自 侍 ,唯 有 男子 一 人 給 飲食 ,傳 辭 出入 。居 處 宮室 樓 觀 ,城 柵 嚴 設 ,常 有人 持 兵 守衛 。— 삼국지 권 30 원문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야마타이 국은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80년을 지나 왜국이 어지러워져서 몇 해 동안이나 서로 싸우다가, 이윽고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였다. 중국 위나라 황제인 조예에게 손자인 난승미를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이 때부터 야마타이국은 위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다음은 그를 보는 사람은 적었고, 단지 한 명의 남자만이 음식을 올리고 동시에 그의 곁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 궁전은 누각이나 성벽을 위나라 낙양성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렵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가 죽고, 왜인은 그의 무덤을 직경 백여보가 되는 큰 무덤을 만들었고, 노비 백여 명을 순장하였다.
삼국사기
[편집]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173년 왜(
二 十 年 ,夏 五 月 ,倭 女王 卑彌乎,遣 使 來 聘.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 왜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히미코의 사망
[편집]위지왜인전에는 비미호의 죽음이 기록되어있다.
倭 女王 卑彌呼 與 狗 奴 國王 卑彌弓 呼 素 不和 ,遣 倭 載 斯·烏 越 等 詣 郡 ,說 相 攻撃 狀 .遣 塞 曹掾史 張 政 等 因 齎詔書 黃 幢,拜 假 難 升 米 爲 檄 告諭 之 .卑彌呼 以死,大作 冢,徑 百 餘 步 , 狥葬者 奴婢 百 餘人 .
왜의 여왕 비미호가 구노국(狗 奴 國 )의 왕 비미궁호(卑彌弓 呼 )와 본디 불화하였는데, 왜의 재사(載 斯), 오월(烏 越 ) 등을 보내 군(대방군)으로 나아가게 해서 서로 치고 싸우는 모습을 설하였다. 새조연사(塞 曹掾史 ) 장정(張 政 ) 등을 보내어 조서와 황당을 가지고 난승미에게 맡겨 격문으로 고하게 하였다. 히미코가 사망하여, 직경 100여 보의 큰 무덤을 만들어서 노비 100여 명을 순장시켰다.
기록은 정시 8년(247년)에 야마타이국과 쿠나국(
「以死」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통설에서는 「以」에 무언가 깊은 뜻은 없다고 보아 「사망하고」 즉 「사망해서」 무덤이 조성되었다, 내지는 「곧 사망하였다」고 풀이해서 서술 직전의 「난승미가 조서와 황당을 받아 격문으로 고유하였다」(
천문학자 사이토 구니하루(
히미코의 무덤
[편집]히미코가 죽었던 시기는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훈 시대로 가는 시기로, 야마타이국 기나이 소재설은 하시하카 고분(
만세일계와 관련된 논란
[편집]일본에서는 천황가의 혈통을 만세일계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히미코와 그의 일족에 의한 일본 통치 기록을 삭제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증거로 일본서기에서는 제10대 스진 천황에서부터 제16대 닌토쿠 천황까지 각각의 천황들이 모두 수십년(40년~99년)의 치세와 100살이 넘는 수명(100살~140살)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히미코 일족의 120년에서 200년 이상의 통치를 삭제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주갑인상)으로 행해진 것이며 당시 고대 일본의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터무니없는 기록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각주
[편집]외부 링크
[편집]전 임 - |
제1대 야마타이국의 여왕 ? ~ 247년 또는 248년 |
후 임 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