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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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荀彧, 163년 ~ 212년)은 중국 후한 말 조조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문약(
배잠(裴潛)은 순욱은 조조의 삼모사(
생애
[편집]조부 순숙(荀淑)은 순자(荀子)의 11세손 이라고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양기(
순욱은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위장부(
순욱이 4살 때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
중평 6년(189년),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때,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
그런데, 순욱이 기주에 도착할 때쯤 기주는 원소(袁紹)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원소는 순욱을 크게 예우하였으나, 순욱은 원소가 대업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뿌리치고, 조조에게로 왔다. 순욱을 맞이한 조조는 [나의 자방(
그 후 조조의 곁에서 정치와 전략 양쪽을 넘나들며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흥평 1년(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때, 순욱은 정욱과 더불어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의 수비를 담당하였으나,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자, 연주는 대부분이 여포의 손에 넘어갔다. 순욱이 지키는 성에 [여포가 조조의 원군으로 왔으니 성문을 열어라]라는 사자가 왔는데, 순욱은 이미 모반을 간파하고, 하후돈에게 사자를 보내 합류하고 조조진영에 남겨진 3개의 성을 조조의 귀환 때까지 사수했다. 만약 이때 이 3개의 성도 빼앗겼다면 조조군은 완전히 의지할곳 없는 군대가 되어 얼마안가 사라져 버려 역사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귀환한 조조는 근거지를 빼앗기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고 했으나, 순욱은 [고조 광무제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자신의 근거지였던 관중, 하내를 확실하게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즉 주공의 근거지인 연주를 확실하게 다스리는 것이 먼저입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여포와 대결하여 그를 격파하고 연주를 평정하였다.
건안 1년(196년), 헌제가 장안(
건안 5년(200년), 관도 전투에 이르러, 공융이 원소군의 강력함을 이야기하자 순욱은 원소군에 있었던 경험에서 그들의 약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실제 관도 전투에서 순욱이 이야기한 대로 진행되었다. 순욱은 관도 전투에서 본거지의 수비를 맡았는데, 조조가 전쟁도중 약세라고 느껴,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에게 문의할 때가 있었다. 순욱은 이것에 반대하고 조조를 격려했다. 또 조조가 원소에게 일단 승리한 후에 원소와의 결전은 중지하고 남쪽의 유표와 싸우려고 하자, 순욱은 "원소가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 빈틈을 이용한다면 공은 성공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이 진언에 따라 조조는 황하를 두고 원소와의 대치를 계속했고, 원소가 죽은 뒤 원소의 세력이 내분에 빠지자 이 틈을 공격하여 하북의 대부분을 세력권에 넣을 수 있었다.
건안 8년(203년), 이때까지의 공적으로 만세정후(
건안 17년(212년), 조조의 손권 정벌에 따라 함께 출정하여 시중(
장남 순운이 조조의 3남인 조식과 친하여 조비가 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친교를 끊지 않고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조비가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비의 누이 안양공주가 순운의 아내가 된 일도 있어, 조비는 역시 순씨를 특별히 총애했다고 [위지] 순욱전에서 적혀 있다.
평가
[편집]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와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 이 세 사람을 같은 권에 넣었다.(삼국지 위서 10권). 진수의 순욱에 대한 평가는 순욱은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풍격, 그리고 선견지명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당시 난세를 평화로 이끌었던 조조에게 협력한 것밖에는 없었다. 이 일로 인해 한나라는 살아나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구할 수 있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배송지는 가후를 싫어하여 순욱이란 인물을 가후 등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범엽은 순욱을 후한왕조에게 순사한 충신으로 평가하여 후한서에 순욱의 전기를 따로 싣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조조의 패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다. 조조 휘하에 뛰어난 책사는 많았지만 순욱은 단순히 수하 중 한 사람을 넘어 패업의 공동설계자이자 좀 더 나아가 말하면 동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순욱의 친족관계
[편집]관련 인물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외부 링크
[편집]위키미디어 공용에 순욱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