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
원술(袁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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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때의 상상화 | |
중 황제 | |
재위 | 197년 ~ 199년 |
양책후 | |
재위 | 192년 ~ 197년 |
이름 | |
별호 | 자( |
신상정보 | |
출생지 | 여남군 여양 |
사망일 | 199년 음력 6월 |
국적 | 후한 → 중나라 |
경력 | 낭중 → 절충교위, 하남윤 → 호분중랑장 → 후장군 → 겸 남양태수 → 좌장군 |
자녀 | 원요(아들), 딸 |
원술(袁術, 155년 ~ 199년)은 중국 후한 말의 군웅으로 자는 공로(
명문 원가의 적자였는데 얼자인 원소와 대립하였다.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가장 큰 실적을 쌓았음에도 원소와 찢어져 서로 전쟁을 벌이다 양주로 쫓겨났다. 세력을 회복해서는 황제를 자칭하고 사치를 일삼았으며 여러 전투에서도 패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여 모든 기반을 거댈 냈다. 결국 원수처럼 여기던 원소에게 의지하려다 조조에게 저지당하고 객사하였다.
배잠(裴潛)은 원술에 대해 '협기(俠氣)가 있으며 의리있는 인물로, 어렸을 때 관직에 나섰으며 청렴하고 일잘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라 평했다.
생애
[편집]명문 원가의 적자
[편집]고조부 원안 이래 4대가 삼공에 오른[사세삼공,
189년(중평 6년)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원술은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여 환관들을 몰살하는 데에 기여하였다.[5]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잡고는 원술을 후장군에 임명하며 그 협력을 바랐지만 남양군으로 피하였다.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원술 역시 이름을 올렸다.[6] 마침 장사태수 손견이 같은 연합군이었던 남양태수 장자(
원술 연합 대 원소 연합
[편집]191년 정월, 연합군의 맹주인 원소는 동탁이 제멋대로 세운 헌제 대신에 명망 있는 유우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 원술은 신하된 마음이 없었음에도 좋은 군주가 서는 것을 꺼려 대의를 들먹이며 유우 옹립에 반대하고 동탁을 멸하는 데에만 집중하자고 하였다. 그럼에도 원소와 기주목 한복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유우 본인이 이게 웬 역모냐며 굳게 거절하였다.[8] 2월[7] 휘하에 있던 손견이 양인(
이 무렵 연합군은 완전히 갈라서서 원술은 분무장군(奮武
192년 양주자사 진온이 병사하였다. 원소가 그 후임으로 원유를 내려보냈기에 격퇴하고 대신 진우를 앉혔다.[17] 193년 유표가 군량 수송로를 끊었다. 원술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흑산적과 어부라의 도움을 받으며 진류군 봉구현(
양주에서의 재기
[편집]수춘현(
194년(흥평 원년) 손견의 장남 손책을 시켜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였다. 양주자사 유요에게 빼앗긴 단양군은 오경과 손분더러 수복하라 하였다. 195년 손책이 육강을 쳐부수고 지지부진했던 유요 전선으로도 장강을 건너 전진하였다. 혜구(
내보이는 역심
[편집]원술은 애초에 참위서의 ‘한나라를 대신할 자는 당도고(
마침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가면서 이각, 곽사 등에게 갖은 고초를 당했다. 원술이 부하들을 소집해 묻기를, “현재 해내는 솥에서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유씨(
할 말이 없어진 원술은 장범을 불렀다. 장범은 병을 핑계로 대며 동생 장승(
세력 확장과 칭제
[편집]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조홍으로 하여금 헌제를 맞이하려하자 장노(萇奴)를 보내 방해하는 한편[18] 서주목 유비와는 회수를 사이에 두고 하비국 우이현(盱眙
197년 기어이 부명(
거듭된 실정
[편집]대노한 원술은 장훈, 교유, 한섬, 양봉 등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일곱 길에서 밀고 올라갔지만 한섬과 양봉이 여포한테 붙으면서 참패하고 말았다.[24] 한편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駱俊)은 원술의 양식 원조 요청을 일축했었다. 9월, 휘하의 장개양(
군대가 쇠약해지자 이반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게다가 가뭄으로 인해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원술 밑에서 패국상으로 있던 서소가 군량미 10만 곡(斛)을 풀었다. 원술이 화가 나 참하려는데 서소가 “당연히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라 하였다. 원술이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며 “족하는 혼자만 천하의 명예를 누리려 하오? 나와 같이 누릴 수는 없었소?”라 푸념하였다. 원술이 명성은 소중히 여겼을지라도 천성은 오만방자하였다. 사치는 더욱 심해져 첩이 수백 명에, 비단을 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양곡과 고기를 질릴 정도로 먹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는데도 이를 보살피지 않았다.
198년 여포가 뒤늦게야 원술과 협동하여 조조에 저항했다. 여포는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당했고 원술의 구원 시도는 실패하였다.[24] 단양군 방면으로는 조랑 등에게 인수(
몰락과 유랑
[편집]199년 여름, 물자가 바닥나 자립조차 어려워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궐을 불사른 뒤 첨산(灊山)으로 갔다. 첨산에는 원술의 수하인 진란과 뇌박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바람에 더더욱 곤궁에 빠지고 사졸들은 흩어졌다. 근심과 번민에 휩싸인 원술은 어쩔 수 없이 원소에게 편지를 썼다. “한나라는 천하를 잃은지 오래되어, 권신의 가문이 정사를 행하며 영웅호걸들은 서로 강역을 나눠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는 주나라 말기의 전국 칠웅과 다를 바가 없어 종국엔 강한 자만이 거머쥘 것입니다. 원씨는 왕이 된다는 천명을 받아 그 상서로운 조짐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청주, 기주, 유주, 병주의 4주를 옹유하여 인가가 백만으로 이처럼 강대하고 격이 높은 자가 없습니다. 조조가 아무리 쇠락한 한 황실을 지탱하고자 한들 어떻게 끊어진 명을 잇고 이미 망한 것을 구하겠습니까? 군깨서는 삼가 천명에 응하십시오.”[30]
원소는 내심 그 말이 옳다 여겼다. 청주자사로 있던 원술의 조카 원담이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 하였다. 원술은 하비를 통해 청주로 가려했으나 조조가 유비와 주령을 파견해 가로막는 바람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춘으로 발길을 돌렸다.[18] 6월, 수춘이 80리 남은 강정(
평가
[편집]호탕한 기상이 있어 원소와 마찬가지로 하진에게 중용받았다.[5] 다만 방자한 데다 사치까지 심하여 그 영화가 끝까지 가지는 못하였으니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이를 자업자득이라 하였다.[32] 배송지는 “솜털만한 공도, 검부러기만한 선행도 없으면서 미친 듯이 날뛰어 멋대로 황제를 칭했으니 의로운 사내들이 분기탱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귀신들까지도 이를 증오하였다. 근검절약했어도 파멸을 어찌하지 못했을 텐데 단지 ‘사치가 심하여 끝까지 가지 못했다’는 평은 그 크나큰 죄악을 드러내기엔 부족하다”고 혹평하였다.[33] 참칭하기 전인 194년 도겸이 세상을 떴을 때도 진등은 원술이 교만한 데다 제멋대로라 난을 다스릴 자가 아니라 보았고, 공융 역시 그가 명문가임에도 우국충정이 없다며 도겸의 후임자로 유비를 내세웠다.[23]
원술의 후손 중 여자들은 대부분 손견의 가문에 첩으로 시집갔다. 대표적으로 원술의 딸이 손오 천자 손권의 후궁이다.
섬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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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후한서》45권 열전 제35 원안
- ↑ 원산송(袁山
松 ), 《후한서》 ; 이현 주석, 《후한서》74권上 열전 제64上 원소에서 인용 - ↑ 화교(
華 嶠), 《한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원소에서 인용 - ↑ 왕침 등, 《위서》(
魏 書 )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원소에서 인용 - ↑ 가 나 《후한서》69권 열전 제59 하진
- ↑ 가 나 《후한서》74권
上 열전 제64上 원소 - ↑ 가 나 다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 ↑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2년
- ↑ 왕찬, 《영웅기》 ; 배송지 주석,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에서 인용
- ↑ 《강표전》(
江 表 傳 ) ; 배송지 주석,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에서 인용 - ↑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
- ↑ 羣豎
不 吾 從 而從吾 家 奴 乎 - ↑ 《후한서》공손찬전·원술전은 주흔, 《삼국지》공손찬전과 《전략》(배송지 주석, 《삼국지》공손찬전에서 인용)은 주앙, 《오록》과 《회계전록》(배송지 주석, 《삼국지》손견전에서 인용)은 주우라고만 하여 동시가 아니거나 인명의 오기일 수도 있다.
- ↑ 《회계전록》(
會 稽典錄 ) ; 배송지 주석, 《삼국지》51권 오서 제6 손정에서 인용 - ↑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2년에서는 주앙, 배송지가 《삼국지》손견전에 인용한 장발(
張 勃)의 《오록》에서는 주우라 하여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다. - ↑ 《삼국지》공손찬전에서는 손견의 패배라 하였으나 《후한서》원술전, 《자치통감》60권, 배송지가 《삼국지》손견전에 인용한 《회계전록》을 따른다.
- ↑ 《후한서》원술전과 《삼국지》원술전에서는 진온이 193년에 원술에게 죽었다고 하였으나 배송지가 《삼국지》원술전에 인용한 왕찬의 《영웅기》와 《삼국지》여범전에 인용한 사마표의 《구주춘추》를 따른다.
- ↑ 가 나 다 라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 ↑ 사마표, 《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56권 오서 제11 여범에서 인용
- ↑ 《삼국지》51권 오서 제6 손분, 《삼국지》50권 오서 제5 오부인
- ↑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
- ↑ 《논어》태백편(
泰 伯 篇 )에三 分 天下 有 其二 , 以服事 殷 (삼분천하유기이 이복사은)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 ↑ 가 나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 ↑ 가 나 다 라 《후한서》75권 열전 제65 여포
- ↑ 《자치통감》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원년
- ↑ 사승, 《후한서》 ; 이현 주석, 《후한서》50권 열전 제40 진경왕(
陳 敬 王 ) 유선(劉 羨 )에서 인용 - ↑ 《후한서》50권 열전 제40 진경왕 유선
- ↑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우금.
苦 縣 은 고현이 아니라 호현이라 발음한다. - ↑ 《자치통감》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3년
- ↑ 배송지가 《삼국지》원술전에 인용한 《위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 ↑ 위소 등, 《오서》(
吳 書 )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원술에서 인용 - ↑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
-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
- ↑ 《후한서》54권 열전 제44 양진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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