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삼국지)
왕릉(
행적
[편집]치적
[편집]왕윤이 동탁을 주살하고, 이각, 곽사가 장안으로 쳐들어와 왕윤의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때, 형 왕신(
문제가 황제가 된 후 산기상시가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연주자사가 되었다.[1] 여범과 싸워 이긴 후에 임지를 청주로 옮겼다.[1] 당시, 바닷가 지방은 동란이 있은 후 법도가 정비되지 않았다.[1] 왕릉은 정령을 반포하고 교화를 베풀었으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해 기강을 확립해 나갔다.[1] 왕릉은 왕기를 천거하여 별가로 삼아, 그의 협력과 보좌를 받아 통치했으며, 백성들은 왕릉을 칭송했다.[1][2] 양주자사, 예주자사를 지냈으며, 모든 군민의 환심을 샀다.[1] 예주에 처음 이르렀을 때, 선현의 후예를 정표하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선비를 찾았다.[1] 왕릉은 연주자사를 역임한 사마랑, 예주자사를 역임한 가규와 좋은 친구였고, 연주와 예주에서 저희의 명성과 업적을 이었다.[1][3]
대오 전쟁
[편집]문제가 황제가 되고, 장료 등과 함께 광릉에서 손권을 쳤다.[1] 마침 오나라의 장군 여범 등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북쪽 강안에 이르렀다.[1] 왕릉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맞아 싸워, 많은 적을 사로잡고 베었으며 그 배를 획득하여 공을 세웠다.[1] 이로써 의성정후에 봉해졌고, 또 건무장군을 겸하고, 청주자사로 옮겼다.[1]
228년, 오의 파양태수 주방의 계책에 속은 조휴를 따라 오를 정벌했는데, 조휴 군은 협석에서 오와 싸워 불리했다.[1][4] 왕릉은 힘을 다해 싸워 포위를 뚫었으므로, 조휴는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1]
231년, 오의 장수 손포가 거짓 투항하여, 왕릉이 직접 영접하러 나올 것을 요청하여 왕릉을 유인했다.[5][6] 정동장군 만총은 거짓 투항인 것을 간파하고 왕릉이 가지 못하게 말리고 군사도 주지 않았으나, 왕릉은 독장 한 명과 보기 7백을 이끌고 손포를 영접하려고 했다.[5] 손포가 밤에 매복하여 습격하였으므로 독장은 도주하였고,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5] 왕릉은 손권이 대군을 부릉 등에 잠복시킨 것을 알고는 달아났다.[6] 이 이전에, 왕릉은 만총과 함께 일을 처리했는데 어그러지게 되었다.[5] 만총은 왕릉의 지지자들의 비난을 받아 마음이 상했다.
정시 초년(240년), 왕릉은 정동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가절·도독양주제군사가 되었다.[1][7]
이듬해(241년), 오나라 대장 전종이 쳐들어와 작피를 점령하자, 왕릉은 군사를 이끌고 치러 나와 오군과 제방을 두고 다투었다.[1][8] 위군과 오군은 여러 날 동안 치열하게 싸웠으며, 전종이 이끄는 오군이 불리해져 결국 패퇴했다.[1][8] 왕릉은 오의 장수 장휴, 고승, 전서(
황제 폐위 모의
[편집]정시 9년(248년) 9월, 사공으로 임명되었다.[1][7] 이때 왕릉의 외조카 영호우가 연주자사로 있었다.[1] 정시 10년(249년) 정월, 사마의가 고평릉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7] 연호를 바꾸어 가평 원년으로 삼았다.[7] 왕릉은 영호우와 비밀리에 상의하여, 현 황제 조방은 어려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여기고, 초왕 조표를 새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1] 왕릉은 사인 노정을 낙양으로 보내 아들 왕광(
가평 2년(250년), 형혹성이 남두의 위치로 진입했는데, 왕릉은 이를 보고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릉은 동평의 백성 호상(
가평 3년(251년) 봄, 오나라에서 도수를 막았다.[1] 왕릉은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더 청했으나 중앙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1] 왕릉은 장군 양홍을 보내 연주자사 황화에게 폐립할 일을 알렸는데, 황화와 양홍이 이를 태부 사마의에게 알렸다.[1] 사마의는 왕릉을 사면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대군을 이끌고 왕릉이 있는 곳으로 나아왔다.[1] 왕릉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사마의를 맞이하고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보냈으며, 스스로 결박하고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1] 사마의는 조서를 내려 왕릉의 결박을 풀고, 인수와 절월을 돌려주고 보기 6백을 보내 왕릉을 수도로 돌려보냈다.[1] 왕릉은 항 땅에 이르러서, 약을 먹고 죽었다.[1] 사마의는 수춘에 이르러 이 일을 철저히 조사했다.[1] 영호우의 장수로 조표와 왕래한 장식은 자수했다.[1] 조표는 사형을 당했고, 이 일에 연좌된 자는 삼족을 멸하게 되었다.[1] 춘추 시대, 제나라에서는 최저가 죽은 후 그 죄상이 밝혀지자 형벌을 내려 시신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고 관을 부수었으며, 정나라에서도 공자 귀생이 죽은 후 그 죄상이 밝혀지자 이와 마찬가지로 형벌을 내렸다. 조정은 이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서 관을 자르고, 시신을 부근 시장에서 3일간 말리고, 인수와 조복을 불태우고,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었다.[1]
가계
[편집]관련 인물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전임 고유 |
조위의 사공 248년 9월 ~ 249년 12월 9일 |
후임 손례 |
전임 장제 |
조위의 태위 249년 12월 9일 ~ 251년 |
후임 사마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