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
신해박해(
정조는 관대한 처결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윤지충이 남인에 속했던 탓에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서인 조차 신서파와 공서파로 분열되었다.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은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 되자 배교하였다.[1] 그 공백은 중인들이 메우며 교세는 성장했으나 제사거부라는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천주교는 정치세력간에 정적 숙청의 희생양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2] 신해박해를 필두로 하여 시작된 탄압은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가 자행되어 수많은 천주교 성직자와 천주교도들이 '천주학 죄인' 또는 '천주학 쟁이'라고 비난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는 불행사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편집]
천주교 전래[편집]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서학(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3] 이런 연유로 인해 18세기에 조선 사대부의 서가에는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가 꽂혀 있었다. 점차 천주교가 종교로 받아들여지며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다.[4] 성리학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관직사회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학인들이 보유론(
문화 충돌[편집]
정조(1776~1800)는 정도(
조선 천주교[편집]
남인 소장파 학인들은 천주학 연구모임을 열기도 했는데[14] 항상 자료 부족으로 탐구의 한계를 절감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던중 1783년(정조 7년) 이승훈의 부친이 사절단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자[15] 이 소식을 접한 이들은 이승훈에게 사절단에 동행하도록 설득했다.[16] 여비를 모아 주며[17] 교리를 자세히 살피고 천주교 서적을 많이 구해 올 것을 부탁했다.[18] 북경에 간 이승훈은 교리를 배우던중 끌림이 발생하여 세례를 받은 후 많은 자료를 가지고 귀국하였다.[19]
1784년, 이승훈은 정기모임을 만들어 지인들과 교리를 학습했는데, 이듬해 발각되어 곤욕을 치른후 모임은 와해되었다. 1786년 이승훈을 중심으로 자치교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790년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사도적 계승을 받은 성직자 없이 가성직제하에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교회법 위반이라는 것과 함께 조선 천주교도들에게 제사금지령을 내렸다.[20] 이는 지난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제사가 우상숭배라는 선언을 근거로 한 초치였다.
영조 때에 천주교가 해서(
전개[편집]
폐제분주(廢 祭 焚主)[편집]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은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후 상경하였다. 이때 그의 고종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한 뒤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는 '명례방공동체'에도 참여하였으며 1787년에는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윤지충은 1789년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는데[23] 천주교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조용히 지내며 제사금지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
당쟁비화[편집]
윤지충의 처사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당쟁으로 비화되었다.[27] :32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인 또한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
체포 심문[편집]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31]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32]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33]
윤지충의 항변[편집]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모든 것을 토설한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30] :79~80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7]:33
처결[편집]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이들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정조는 사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사교를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다.[34][35] 이때 윤지충의 피가 튀어 붙은 전주성의 돌을 주춧돌로 삼아 전주에 전동성당을 건축했다.[1] 이승훈과 권일신이 구속되었는데 이승훈은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수용되어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다.[36][37]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함에 따라[38][39] 귀양지가 제주에서 예산으로 변경되었으나 예산으로 이동중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
극형의 명분[편집]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런 무부무군(
영향[편집]
당파 다툼[편집]
정조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이런 조처는 자신의 측근중에 천주교에 가까인 간 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6] 아울러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한역 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과는 달리 조정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
전교 활동[편집]
신해박해로 인해 천주교가 정치적 종교적 박해의 대상이 되자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이 동요하여 배교후 떨어져 나갔다.[1] 그 공백은 중인계층이 메워나갔는데,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4년 무렵 신도수가 4천여 명으로 증가하자 중국 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신해박해로 인해 보류되었던 선교사 파견을 다시 추진하였다.[46] 1795년 초에 서울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이내 체포령이 떨어져[47] 은밀히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완숙 등의 도움에 힘입어 5년후 교세는 1만명을 육박하게 되었다.[48]
전동성당[편집]
현재 전주 전동성당은 윤지충, 권상연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순교터 위에 자리잡고있다. 1908년 보두레 신부가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서 순교터 위에 전동성당을 건축하였다. 일제강점기중 도로를 개설하며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을 철거했는데, 이때 윤지충이 참수될 당시 피가 튀었던 돌을 가져와 주춧돌로 삼았다고 한다.[49][50][51] 전동성당은 국가 기념물 사적 288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성당 한쪽에는 윤지충의 순교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되어 있다.[52]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복자로 서품하였다.[53]
기타[편집]
이번 사건으로 정약용의 집안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배교하며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으나 윤지충과 친척이라는 사실과 윤지충에게 천주교를 소개한 자가 정약용이었기 때문에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54]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집안 제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55]
천주교의 제사거부 교리가 널히 알려졌고 이후 천주교가 탄압을 받는 명분으로 십분활용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 ↑ 가 나 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33
- ↑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
辛 亥 迫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7
-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신유박해 [
辛 酉 迫害 ]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Ricci, Matteo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백민관).....(
天主 實 義 , 1595)이라는 저서이다. 이 책은 중국어로 썼는데...(중략)...그의 전교 방법은 서양식의 하느님 개념이 없이 천주교와는 다른 종교의식에 가까운 조상숭배를 하는 중국인들을 이해시키려고 소위 보유론적(補 儒論的 ) 입장을 취했다. -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정조 [
正 祖 ] (두산백과) - ↑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56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9
- ↑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434
- ↑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423
- ↑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
辛 亥 迫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6
-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신해박해(
辛 亥 迫害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 교의적(敎義 的 )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 的 )인 잠정적 변법(暫定 的 辨 法 )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 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7
- ↑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36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7
- ↑ 일중당편집부 <대한국사 4권, 조선시대> 청화 1983년 p103
- ↑ 샤를르 달레 (1874) 247~48쪽 "Son fils Seng-houn-i, l'un des amis intimes de Piek-i, devait l'accompagner dans ce voyage."
- ↑ 한영국 <한국사대계, 6 조선후기> 삼진사 1973년 p134
- ↑ [카톨릭 평화신문]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2009년 3월 8일
- ↑ 가 나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62
- ↑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
辛 亥 迫害 ]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 ↑ [네이버 지식백과] 윤지충 [
尹 持 忠 ]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윤지충 [
尹 持 忠 ]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32
-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4
- ↑ 가 나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 ↑ 채제공은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체제가 3년간 지속되며 정사를 좌우했다.
- ↑ 신복룡, 《전봉준 평전》, 지식산업사 (1996) 27쪽
- ↑ 가 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1》 기독교문사(1989)
- ↑ [네이버 지식백과] 권상연 [
權 尙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그 해 10월 무군무부(無 君 無 父 )의 역도로 몰려 윤지충이 체포되었으며,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진산관아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들이 믿는 교는 무군무부의 도가 아님을 교리를 들어 설명하면서 항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윤지충 [
尹 持 忠 ]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사건 [
珍 山 事件 ] (두산백과) - ↑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카톨릭 평화신문
- ↑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3) 권상연, 카톨릭 평화 신문
- ↑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
- ↑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 그 아버지의 사행(
使 行 )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 書 )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 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 - ↑ [네이버 지식백과] 권일신 [
權 日 身 ] (두산백과)...권일신은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노모의 회유로 옥중에서 회오문(悔悟 文 )을 쓰면서 예산(禮 山 )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권일신(
權 日 身 )...유배지로 출발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매부 이윤하(李 潤 夏 )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행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정조의 명령을 받은 별감이 와서 당시 80세가 된 어머니와 유배지인 제주의 거리를 다시금 환기시키며 천주교와 유교에 대한 애매한 글귀를 내놓고 수결(手 決 )주 02)하기를 권하자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유배지가 예산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달레(Ch.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 的 ) 사랑 때문에 배교했다고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 ↑ [네이버 지식백과] 권일신 [
權 日 身 ] (두산백과) - ↑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김영사 2004년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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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봉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가람기획 1993년 p210
-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0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신해사옥〉
- ↑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46
- ↑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47
- ↑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54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33
- ↑ [카톨릭 평화신문] 전주교구 전동성당(상) 순교 1번지에 우뚝 선 신앙의 요람
- ↑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 전동성당 역사, 역동성당의 유래...성전의 주춧돌로는 전주성의 성벽 돌이 사용되었는데, 일부 돌은 참수된 순교자들의 머리가 성벽에 매달렸을 때 피가 스며든 돌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두네 신부는 당시 당국에서 신작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성벽을 허물면서 버리던 돌을 구입하였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윤지충 [
尹 持 忠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 평화신문. 2009년 3월 8일. 2016년 9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16일에 확인함.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사건 [
珍 山 事件 ] (두산백과) - ↑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김영사 2004년 p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