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
오경석(
1846년 역과에 합격하여 한어(중국어) 역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853년 베이징 체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개항론을 주장하였다. 또 병인양요의 해결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전란 방지에 공헌하였고, 관직은 숭록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환재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더불어 초기 개화인사이자, 북학파에서 개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형 인물로 평가된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이상적(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831년(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한성부에서 한어 역관인 오응현(
그는 대대로 8대나 역관을 하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인유(
유소년기[편집]
오경석(
아버지 오응현은 자신의 친구였던 역관 이상적을 초빙하여 집안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오경석은 이상적에게 글을 배웠다.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박지원과 박제가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아버지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박제가의 저술들을 구해놓고, 자손들에게 이를 읽도록 했다. 오경석 또한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놓고 그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후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의 학문도 사숙하였다. 1846년(헌종 12년)에 역과의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관료 생활[편집]
관료생활 초반[편집]
1846년(헌종 12년) 역과(
청나라의 사행길을 여러번 수행하고 돌아온 오경석은 1840년대의 아편전쟁, 1851년의 태평천국 운동, 그밖에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등으로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베이징 현장에서 보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
훗날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해야 조선사회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오경석은 김옥균 등의 개혁적 성향의 북촌 양반들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는“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경석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은 이동인이 구해온 박물, 서양어 서적, 태엽기계, 거울, 망원경, 돋보기 등과 함께 유대치, 강위, 박규수 등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들을 통해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외교 활동[편집]
1860년(철종 11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 신석우(
사역원의 한학교수(
1872년(고종 9년) 12월 25일 상호도감 도제조의 청으로 상호도감 별간역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의 수행 수역관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아온 공로로, 1873년 1월 20일 홍순목의 청으로 절충장군에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다시 상호도감 별간역이 되었다가 7월 30일 당상역관으로 청나라 사행길에 참여하였다. 1874년 1월 7일 오위장이 되었으나 1월 19일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된다. 그해 8월 청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정원 외로, 한학 당상역관 자격으로 사행길에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동지사 수역(
대원군 실각 이후[편집]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도 그는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사역원의 한어 당상역관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청나라에서 미국, 유럽 열강의 신 문물을 접한 오경석은 개화의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항론을 주창한 이후 흥선대원군의 미움,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동생 오경연과는 달리 민씨 일파에 붙지 않았으므로, 그의 강직함은 대원군도 높이 샀다 한다.
그해 겨울부터 사역원에서 《통문관지 (
1875년 4월 12일 청나라의 사신이 도착하자 모화관에서 역관 통사(
생애 후반[편집]
개화 청년 양성[편집]
그는 유대치, 박규수, 강위 등과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개화파 청년들의 육성을 고민하였다. 조선의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자제들과 접촉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하고 발전시켜서 근본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1860년대부터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이 박규수와 유대치, 강위의 문하와 그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874년 박규수가 의정부우의정에서 사직한 뒤인 김옥균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면서 북학파의 학문과 해외사정에 대해 지도를 받았으며 이때 오경석과도 본격적으로 접촉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1877년 박규수가 죽자 이후 오경석과 유홍기, 강위 등의 문하에 출입하다가, 오경석 자신이 사망하는 1879년 이후에는 유홍기, 강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개화 사상을 수립하였다.
개항론과 개혁 운동[편집]
오경석은 또한 13차례나 청나라를 오가면서 서양 문물과 제도를 알 수 있는 물품, 곧 세계 지도를 비롯하여 자명종, 망원경 등을 조선에 들여왔다. 흥선대원군이 애용하던 회중시계도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사와서 선물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한국 최초로 초상 사진을 찍은 사람이며, 1853년 주청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왔다.
1876년(고종 13년) 1월 13일 강화도 조약 직전 일본의 선박이 인천항에 나타나 항의 시위를 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
1876년 3월 진하사 겸 사은사가 파견될 때 오경석은 한어 수역관으로 사행길에 포함되었으나 갑자기 병으로 가지 못하고 한문규로 대체되었다. 1877년 개항을 놓고 논쟁이 발생했을 때 그는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함께 개국(
최후[편집]
그러나 그는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일본의 군함이 되돌아간 직후인 1876년(고종 13년) 4월 쓰러졌으며, 이후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1877년 8월 그동안의 외교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주변의 반대 없이 종1품 숭정대부(
만년에는 풍증으로 고생하였다. 오경석의 벼슬은 지중추부사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그는 1879년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은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과로와 풍증, 콜레라 감염이 겹쳐 병석에 누웠다가 바로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편집]
시신은 경기도 양근군 북면 율곡리(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밤나무골 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소 근처에는 손자 오일룡과 증손자 오천혁의 묘소가 인근에 있다.
저서[편집]
- 《삼한금석록》
- 《삼한방비록 三韓訪碑錄》
- 《천죽재차록
天竹 齋 箚錄》 - 《양요기록
洋 擾記錄 》
천죽재차록과 골동품[편집]
골동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오경석은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에 대한 소장, 입수과정을 적은 천죽재차록(
그의 천죽재차록에 나온 일부 골동품에 대한 것은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 (
강건이 만들고 오경석이 소장했던 옥으로 만든 해시계가 발견되었다. 시계에는 강건이 제작하고 오경석이 소장했다는 글이 씌여 있다. 강건의 집안은 시계를 제작해 온 명문가의 후손으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냈고, 오세창과 가깝게 교류를 했다. 강건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의 강세황이고, 그의 아버지 강이오와 큰아버지 강이중은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2]
평가 및 영향[편집]
어려서부터 글씨와 그림을 즐겼으며 북경에 왕래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조선의 국제무대 등장을 주장했다. 그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해국도지(
오경석이 가지고 온 신서는 그의 친구인 유대치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대치는 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으며, 유대치를 따르는 이들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었다. 결국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초기 개화사상이 일어난 셈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 또는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족[편집]
- 고조부 : 오필검(
吳 弼儉)
- 외조부 : 이의무(
李 義 懋)
오경석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 [국회보 2012년 3월호] 조선청년에 개화사상 전파해 위기의 조국 구하려 한 역관 오경석 국회보 2012.03
- [https://web.archive.org/web/20131206080126/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37980 Archived 2013년 12월 6일 - 웨이백 머신 오경석·세창
父子 의 빼어난 감식 안목] 중앙일보 2004.05.18 - 오세창 관련 유물, 후손이 예술의전당에 기증 한겨레 2004.05.13
- 역관 주요가계와 인물
각주[편집]
- ↑ 가 나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0~192쪽. ISBN 9788985407359.
- ↑ 허윤희, 개화파 오경석이 지녔던 휴대용 해시계 발견,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