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부대부인
용성부대부인 염씨(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본관은 용담으로, 1793년 7월 20일 사후 증 대광보국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염성화(
그녀의 친정 선조들의 묘소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일대와 강화군 송산에 있었다 하며, 증조할아버지 염상임의 묘소를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70-46에 안장하면서 조부와 친정아버지의 묘소도 인근에 조성되었다. 친정 오빠는 3명이 있었는데 그 중 염보길을 제외하고는 이름이 실전되었다. 그밖에 천안김씨 김경영에게 시집간 친 언니가 1명 있었다. 증조부 이후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녀의 외가는 불분명하였는데, 강화도 지역의 전승에 의하면 염씨는 생애 초년에 함바집 주모였다는 전승이 있다. 후일 왕실에서 작성한 왕실의 8고조도에서도 그의 외가쪽은 다소 불확실하였다. 외할아버지 상주지씨 지우영(
생애 후반[편집]
염씨는 은언군의 서자로 후일 전계대원군(
본래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이 상계군 사건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사건 등에 연루되어으므로 작위를 받지 못했다. 철종이 즉위한 뒤 남편이 전계군의 작위를 받은 뒤 다시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면서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에 용성부대부인에 봉작되었다. 강화지역 전설에 의하면 철종은 가난했던 그의 친외가에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전답 3천 평을 내려주었다 한다.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는 1853년(철종 4년) 철종이 강화유수 정기세(
처음 전계대원군의 장인과 처조, 처증조부를 영의정, 좌찬성, 판서로 각각 추증하는 일을 놓고, 한미했던 염씨의 친정 대신 이름있던 가문인 전계대원군의 본처 전주최씨의 친정만 증직하자는 논의가 나왔다가, 생가도 추증해야 한다는 반론이 나와 첩 염씨의 친정 3대도 증직이 내려졌다.
사후[편집]
처음 한성부 홍은동에 안장되었다가[2], 후에 경기도 양주군 수동면 답동리 경좌(
이후에도 그의 친정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종 때에는 그의 친정조카 염호관이 궁내부 주사를 지냈고, 종증조부 염상욱의 증손자이며 8촌 동생이 되는 염재흥(
가계[편집]
- 고조부: 염한수(
廉 漢 守 ),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 고조모: 광산김씨
- 종증조부 : 염상욱(
廉 尙旭)
- 종증조부 : 염상욱(
- 증조부: 염상임(
廉 尙任), 생전 관직은 통정대부, 외고손 철종에 의해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 증조모: 전주이씨, 감찰 이인언(
李 仁 彦)의 딸 - 할아버지 : 염덕석(
廉 德 碩 , 1754년 ~ ?) - 할머니 : 김해김씨, 김동악(
金 東岳 )의 딸 - 친정아버지 : 염성화(
廉 星 華 , 1795년 7월 12일 ~ ?년 6월 5일) - 친정어머니 : 상주지씨(1791년 10월 25일 ~ ?년 7월 20일), 지우영(
池 右 英 )의 딸 - 외할아버지 : 지우영(
池 右 英 ) - 진외증조부 : 김동악(
金 東岳 )
기타[편집]
그녀의 묘비명은 1851년(철종 3) 김좌근이 짓고, 훗날의 고종의 생부가 되는 흥선군 이하응의 글씨체로 썼는데 내용은 간략하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이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의 천주교 사건, 장남 상계군 추대사건 등에 연좌되었으므로 남편 이광에게는 생전에 작위가 없었다.
- ↑ [광복 70주년 기획 - 친일파 후손의 70년]일제에 특혜 받아 막대한 재산 챙겨… 손자는 호텔 사업가로 성공 경향신문 201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