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
윤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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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0년 조선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노성 |
사망 | 1669년 4월 21일 조선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노성 |
사인 | 병사 (노환) |
거주지 | 조선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길보( |
학력 | 한학 수학 |
직업 | 문신, 사상가, 작가, 시인, 학자, 정치인 |
종교 | 유학 성리학 |
부모 | 아버지 윤황, 어머니 창녕 성씨 |
자녀 | 아들 윤증, 아들 윤추 |
친척 | 형 윤원거, 윤순거, 윤문거, 사위 박세당, 외할아버지 성혼, 외증조부 성수침, 사돈 권시, 사돈 송시열, 사돈 윤휴, 사돈 박세채, 외손자 박태보 |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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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
절친한 송시열(
죽은 후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윤증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
생애
[편집]생애 초기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미촌 윤선거는 1610년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 윤씨로 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윤황(
고려말 조선전기의 문신 윤곤의 10대손으로, 세종대왕의 서녀 정현옹주와 결혼한 윤사로는 그의 7대 방조였다. 역시 윤필상, 정현왕후 등도 그의 7대 방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따로 일명 노성윤씨라고도 부른다. 그의 증조(윤증의 고조)인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처음 정착해 '노성 윤씨'라는 별칭을 얻었다.[2]
형은 윤순거(
아버지인 윤황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신독재 김집(
성균관 수학
[편집]1633년(인조 1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기개와 절개가 뛰어나고 언론이 강개하여 사우들의 추앙과 존중을 받았다.[3] 성균관 유생 시절인 1634년(인조 12) 인조의 부친 정원군을 종묘에 모시기로 한 왕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상소를 성균관과 사학(
이번에 종묘에 들이는 예야 말로 옛날 제왕들이 행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여 융숭한 전례(
典禮 )를 거행하려 한다 하더라도 예법을 상고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행한다면, 이는 융숭한 이름을 갖게 되지만 도리어 융숭한 실상을 잃게 됩니다.[4]
이어서 그는 원종을 종묘에 모실수 없는 이유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대저 왕위에 서지 않았으면 종묘에 들이지 않는 것이 고금의 떳떳한 법인데, 원종은 이미 왕위에 선 적 없으니 이것이 종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첫째 이유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제사를 받으면 예경(
禮 經 )을 어지럽히는 일이 된다는 것이 명유들의 정론인데, 원종은 열성(烈 聖 )들에 대해 신하의 처지이니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5]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더구나 종묘는 조종의 종묘이고 전하의 종묘가 아닙니다. 원종 대왕이 아무리 전하를 낳아 길러준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조종에 대해서는 실제로 왕통을 잇고 작위를 이어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하 개인적으로 망극한 은혜가 있다고 하여 조종의 덕을 살피는 종묘에 마음대로 들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이에 인조는 "이번에 종묘에 들이는 예는 조금도 안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는 그대들이 간여해 논할 바가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에 열중하라"는 답을 내려 유생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6]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윤선거 등의 성균관 유생들은 재차 상소하여 종묘에 들이는 왕명을 거두시라 청했으나 인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6]
성리학 연구
[편집]병자호란과 학문 연구
[편집]1636년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청나라와의 협상을 요구하자 그는 청나라와의 수교를 강력하게 반대,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명나라에 대한 의(
이때 탈출하지 못한 아들 윤증과 딸이 1명 있었는데, 아들 윤증은 자신의 족보를 쓴 수첩을 누이에게 주고 외우게 하였다. 뒤에 여진족의 노비로 끌려갔다가 여러 사람 거쳐서 의주에서 노비생활을 하던 윤선거의 딸 윤씨는 남동생인 윤증이 준 수첩 덕에 구제될수 있었다.[7]
이해 3월 아버지 팔송 윤황이 척화(斥和)를 주장했다가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충북 영동으로 유배될 때 따라갔으며, 1638년 금산으로 옮겨 송시열·권시(
병자호란 이후
[편집]병자호란 이후 그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남도 이산(
1651년(효종 2) 이래 장령·집의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강화도에서 홀로 살아나온 데 대한 자책으로 관직을 맡지 않았다.
효종 3년(1652년)에 부교리 민정중(閔鼎
그가 사직하자 영중추부사 이경여(
예학과 사문난적 논쟁
[편집]남인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수 있느냐는 발언을 하여 서인과 사림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이는 윤휴와 같은 남인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653년(효종 4년) 윤선거는 황산서원(
1665년(현종 6) 공주 동학사(
윤휴 등 남인의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태도에 대한 서인 내부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한 송시열과의 갈등은, 뒷날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져 노소분당의 한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생애 후반
[편집]윤휴와 송시열의 갈등 중재
[편집]윤휴는 중용의 주석을 놓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주자의 주석에 오류[9] 가 많다고 선언했다. 윤휴는 서슴없이 자기 주장을 펴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큰소리쳤다.[10] 이 소리가 송시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송시열은 고향 회덕에서 가까운 논산군 연산의 황산서원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윤선거를 만났다. 송시열은 두 사람이 잘 어울려 지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10]
윤휴는 실로 사문(
斯文 )의 난적(亂 適 )이오. 혈기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죄를 성토해야 하거니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붙좇는 무리부터 다스리라고 하였으니 참임금이 일어난다면 그대가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오.[10]
그는 송준길과 함께 윤휴와 송시열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송시열에게 호된 비판을 듣게 된다.
황산서원과 동학사 모임
[편집]윤휴는 주희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오히려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의 오류를 찾아낸 윤휴는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거나,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 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윤휴에게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송시열과 이유태는 이 문제를 두고 1653년 황산서원에서 동료 친구들을 모아서 이 문제를 토론한다. 여기에는 윤선거, 권시, 유계(兪棨) 등이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년) 윤7월 송시열은 윤선거, 유계 등 10여명의 저명한 서인 학자들(대전 부근 지역 출신)과 황산서원(
그러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
그러나 윤선거는 계속 윤휴와 교제하였고, 송시열과 이유태 등은 동학사에서 또 한차례 친구 동료들을 모아 토론하였다.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등 몇 사람은 다시 공주 동학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시 윤휴에 대해서 종일 논쟁하다 해가 저물게 되었다. 이에 그날 저녁 토론이 끝나갈 무렵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길게 논쟁할 것 없다. 간단히 말해서,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한마디로 말하라며 추궁했다. 윤선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옳고 그름(
최후
[편집]1669년에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임금은 올라오기를 계속 하명했으나, 그는 끝내 상소만 올리고 나아오지 않았다.[11]
하찮은 인물에도 끼지 못하는 신의 실상을 조정의 위아래 인사가 이미 모두ㅜ 아는데 분수상 받을 수 없는 은전이 아직도 멈추지 않으며, 신의 자식 윤증(
尹 拯)애게도 격외의 특전이 배풀어져 아울러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지가 거듭 내려 영광이 매우 특별하니 신 부자의 외람됨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현우(賢愚 )를 구분하지 않고 형식을 갖추어 예우함으로써 우리 조정의 어진 이를 부르는 성대한 예를 한갓 사방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니 어찌 식자들이 탄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유사에게 명하시어 신 부자의 이름을 삭제하시고, 앞으로도 부르는 교지를 거두소서.[11]
효종과 현종은 여러 차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병자호란 당시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김집이 그를 용납하고 그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 하고 받아주었으나 그는 평생 이에 대한 자책감을 짊어지고 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아들에게 내려진 벼슬까지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12] 1669년(현종 10년) 4월에 사망하니 당시 나이 59세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애석해했다. 또한 참찬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간에 윤선거를 엄탄지신(
사망 직후
[편집]그는 죽기 전 송시열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남겼다. 이 편지에서 그는 남인 윤휴와 허적을 참람한 무리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폭넓게 생각하라며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면 그들 역시 감동하여 송시열을 따를 것이라며 화해를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발송 직전에 그가 사망함으로써 부치니 못했고, 이는 기유년에 썼다 하여 '기유의서'(
사후 그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12] 그에 대한 추증은 당시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송준길이 아뢴 바를 보면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
그의 장례식 때 윤휴가 찾아오자 윤선거의 문도들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윤휴의 문상을 받아들였는데, 윤휴는 제문에서 윤선거에게 '자기 주장을 세우지 못하고 송시열에게 끌려다니기만 했다'며 그를 조롱하는 제문을 남겼다. 윤증은 윤휴의 문상을 받아준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동시에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는 만나지 않겠다고 송시열, 이유태 등에게 약속했으면서도 따로 윤휴와 만난 사실이 알려졌고, 윤선거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은 오랜 친구에 대한 추모에서 증오로 변질된다. 그 뒤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이 추증되었는데 이는 아들 윤증의 영귀에 의한 것이었다.
추증과 추탈
[편집]1710년(숙종 36)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1711년 문경(
그의 유저에 효종을 모함했다는 내용이 시비거리가 되면서 치열한 논란 끝에 결국 문집은 압수되어 소각당하고 활자는 훼판(毁板)당하였으며 서원의 사액을 철거하며 선정(
1776년(정조 즉위년) 5월 정조의 특명으로 추탈되었다가 1782년(정조 6년) 다시 최종 복권되었다. 이후 계속 그와 그의 아들 윤증의 관작을 추탈하라는 노론계열의 상소는 고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후
[편집]그 뒤 아들 윤증이 송시열[14]에게 아버지의 묘갈(
영춘(
저서
[편집]저서 및 작품
[편집]- 《노서유고》 (魯西
遺稿 ) - 《계갑록》(
癸 甲 錄 ) - 《우계연보후설》 (
牛 溪 年譜 後 說 ) - 《노서일기》
공저
[편집]- 《가례원류》 (
家 禮 源流 , 유계와 공저)
작품
[편집]시
[편집]棲燕
가족 관계
[편집]우암 송시열과는 이중삼중으로 겹사돈이었는데, 윤선거의 손자 윤행교가 송시열의 친척인 송기후의 사위이고, 아들 윤증은 권시의 사위인데, 권시의 다른 딸이 송시열의 며느리가 된다. 또한 조카 윤박이 송시열의 사위였고, 사촌 누이는 송시열의 사촌형 송시형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고모부는 송희조인데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의 사촌형제였다.
- 할아버지 윤창세(
尹 昌世 ) - 아버지 : 윤황(
尹 煌),호 팔송(八 松 ) 대사간, 이조참의,諡 문정(文正 ) - 어머니 : 창녕성씨, 우계 성혼의
女 - 숙부 : 윤전(
尹 烇, 세자시강원필선) 호 후촌(後 村 ),諡 충헌(忠 憲 ) - 숙모 : 해평윤씨, 해평부원군 윤근수의 손녀, 윤환(
尹 晥)의 딸 - 부인 : 공주이씨 이장백
李 長 白 의女 - 사돈 : 송기후(
宋 基 厚 , 우암 송시열의 5촌 조카) - 외할아버지 : 성혼(
成 渾) - 외증조부 : 성수침
- 외종증조부 : 성세순
- 사돈 : 윤근수
평가
[편집]성리학에는 당대의 대가였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절친한 송시열(
사상과 신념
[편집]윤휴와의 관계
[편집]백호 윤휴는 그의 사돈이었다. 그의 누이가 안동권씨 권준과 결혼했는데 권준은 경주 부윤(
윤휴는 광해군 정권때인 소년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다. 그러나 윤휴가 사물의 도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느냐며 성리학에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이를 경계하였다.
처음 윤휴와 토론하다 논쟁이 벌어지자 윤선거는 그의 주장이 과격하다며 조심할 것을 권고하였다. 윤선거는 몇번의 서신을 보내 윤휴를 설득하였으나 윤휴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윤선거는 절교를 선언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윤휴 사이에 적대적으로 돌변하자 그는 송시열에게 꾸준히 서신을 보내고 설득하여 윤휴와 허목 등을 등용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과의 관계
[편집]오랜 친구였다가 원수로 돌변한 송시열과도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은 윤선거와 개인적으로 친구였고, 윤선거의 아들 윤증이 송시열의 제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 혼자 생존했던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송시열이 윤선거를 경멸하면서 윤선거와 송시열의 관계가 멀어진다. 이는 송시열과 윤증과의 관계 악화로까지 이어져 회니논쟁과 노론, 소론 분당의 원인이 된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윤선거는 송시열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그런데 윤선거의 할아버지 윤창세(
윤황(
행력
[편집]- 광해군 2 1610 1세 5월 28일, 부친의 임소인
靈光 官衙 에서 태어나다. - 인조 4 1626 17세
公 州 李 氏 와 혼인하다. - 인조 11 1633 24세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다.
- 인조 12 1634 25세 태학생으로서
元宗 祔廟禮 에 반대하는 소를 올리다. - 인조 14 1636 27세 태학의 疏頭가 되어
後金 의 사신을 목베고和議 를 배척할 것을 상소하다. ○ 12월,胡亂 이 일어나자 모친을 모시고江 都 로 들어가다. - 인조 15 1637 28세 1월 23일, 부인 이씨가 순절하다. ○
權 順 長 ,金 益 兼 ,金 尙容 등과城 牒을 지키며死守 를 약속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홀로 빠져나와南 漢 山城 으로 가다. ○ 3월, 부친八 松 公 尹 煌이永 同 으로 유배가자 따라가다. - 인조 16 1638 29세
永 同 에서 돌아온 후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를 포기하고錦山 에 은거하다. - 인조 17 1639 30세 부친상을 당하다. 형제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다.
- 인조 19 1641 32세 복을 마치고
錦山 으로 돌아오다. - 인조 20 1642 33세
市南 兪棨와麻 霞 山 에山泉 齋 를 짓고講 學 에 전념하다. ○ 兪棨와 「家 禮 源流 」를 편차하다. - 인조 22 1644 35세 여름,
宋 時 烈 ,李 惟 泰 , 兪棨와新 安寺 에 모여古 禮 를 연구하고 「心 經 」을 강하다. - 인조 23 1645 36세 아들
尹 拯의冠 禮 를 「家 禮 」에 따라 행하다. ○ 조정으로 돌아가는 兪棨를 전송하다. - 인조 24 1646 37세
尼 山 石江 에 새 거처를 정하다. ○愼 獨 齋 金 集 을 찾아 뵙고宋 時 烈 ,李 惟 泰 와 遯巖書院 에서 만나다. - 인조 25 1647 38세
墳 菴에서宗 會 를 열다. ○金 集 을 찾아가外舅 인牛 溪 成 渾의碑文 을 수정하다. - 인조 26 1648 39세
牛 溪 年譜 를 편차하다.栗谷 年譜 와 한질로 묶어서 후에江 陵 松 潭書院 에서 간행하다. ○安 邦俊 의 「混 定 錄 」과鄭 澈의 「觀 時 錄 」을 참고하여宣 祖 年間 黨爭 과倭 亂 의 시말을 적은 「癸 甲 錄 」 4책을 편차하다. ○ 9월, 모친상을 당하다. - 인조 27 1649 40세
愼 獨 齋 에게牛 溪 의墓表 를 부탁하다. - 효종 1 1650 41세 兪棨와
宋 時 烈 에게 편지를 보내兩 賢 從 祀 에 대해 의논하다. ○鄭 澈年譜 를 교정, 산삭하다. - 효종 2 1651 42세 3월, 전설사 별검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兪棨에게 편지를 보내
後天 說 을 논하다. ○ 왕자 사부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효종 3 1652 43세
淸 陰 金 尙憲을 곡하다. ○學 行 으로 천거되어 召命이 내리다. - 효종 4 1653 44세
丙 子 胡亂 때江 都 에서 죽지 못한 일로 引咎하여 체차되다. ○龍西 公 尹 元 擧 와 함께 兪棨를 찾아가 「周 易 」을 강하다. ○ 5월,尼 山 魯西書院 에서 鄕約을 강하다. ○宋 時 烈 과黃 山 書院 에서 만나尹 鑴의 배척 문제로 갈등이 생기다. ○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효종 5 1654 45세 兪棨,
宋 時 烈 ,李 惟 泰 등과 臯蘭寺 에 모여虎 巖 에서 뱃놀이를 하다. ○美 村 에 새로 거처를 정하다. - 효종 6 1655 46세 「
疑 禮 問 解 」를 교정하다. ○浦 渚 趙 翼 을 곡하다. ○ 10월, 지평으로 소명이 내리자果川 에 올라가 상소하고 돌아오다. - 효종 7 1656 47세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윤5월,
愼 獨 齋 金 集 을 哭하다. - 효종 8 1657 48세
朴 知 誡의 아들朴 由 淵 이 찾아와 受學하다. ○ 6월, 시강원 진선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차되다. - 효종 9 1658 49세 소명이 있자 闕下에 나가
陳情 疏를 올리다. ○ 4월,姜 沆의 「睡 隱 集 」을 교정하다. ○宋 浚吉에게 편지하여鄭 介 淸 의 일을 의논하다. ○ 7월, 兪棨와七山 書院 에서 만나 「近 思 源流 」를 편차하다. - 효종 10 1659 50세
司 業 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조정에黨爭 의 조짐이 있자李 惟 泰 와 兪棨에게 편지를 보내 경계하다. ○ 5월,孝 宗 이 승하하자 달려가 곡하고 돌아오다. ○宋 時 烈 과 거취의 문제로 편지하다. ○ 상의원 정에 제수되어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현종 1 1660 51세 慈懿
大 妃 服 制 문제에 대해尹 鑴에게 답하다. ○尹 鑴가宋 時 烈 의四 種 說 에 반대하여宗 統 說 을 지지하자 송시열이 윤휴와 절교할 것을 종용하다. - 현종 2 1661 52세
尹 鑴의 배척에 관한 문제를宋 時 烈 ,權 諰와 편지로 의논하다. ○ 「近 思 後 錄 」과 「淵源 錄 」을 편차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다. - 현종 5 1664 55세
市南 兪棨를 곡하다. ○金剛山 ,頭陀 山 ,太白山 을 유람하고龜 潭,島 潭을 둘러보다. - 현종 6 1665 56세
鄭 澈 遷葬時 挽詞를 짓다. ○ 4월, 상이 온천에 행차하자行宮 에 나가拜辭 하고 돌아오다. ○ 閔維重 의 부탁으로重 峯 趙 憲 의遺稿 를 교정하다. - 현종 7 1666 57세
李 元祿 이 왕명으로 찾아와 「小學 諺 解 」의 개찬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다. - 현종 8 1667 58세 「
朱子 書 節 要 」를 하사받다. ○ 「牛 溪 續 集 」을 편차하다. ○ 滄浪成文 濬의 문집을 교정하다. - 현종 9 1668 59세
仲兄 尹 商 擧 의喪 을 당하다. ○ 滄江趙 涑과鄭 弘 溟의 조카인鄭 瀁을 곡하다. ○ 왕이 온천에 행차하여 부르자 상소하여 사양하다. - 현종 10 1669 60세 중형
童 土 公 尹 舜 擧 를 哭하다. ○ 〈擬 與 懷 川 書 〉를 짓다. ○ 4월, 병으로竹 里 에서 졸하다. 왕명으로喪 需와役 軍 을 지급하다. ○ 이조 참의에 추증되다. ○ 8월 24일, 交河縣 法 興 鄕에 장사 지내다. - 현종 12 1671 - 아들
尹 拯이年譜 를 짓다. - 숙종 1 1675 - 魯岡
書院 에 배향되다. - 숙종 36 1710 -
領 議 政 에 추증되다. - 숙종 37 1711 - ‘
文 敬 ’이란 시호를 내리다. - 숙종 38 1712 - 아들
尹 拯이 문집을 간행하다. - 숙종 42 1716 - 문집 중에
孝 宗 을 무함한 글이 있다는 이유로文集 의 훼판,賜 額 書院 의 철거,先 正 칭호의 금지라는 ‘병신처분’이 내렸으며, 다음 해 아들尹 拯과 함께 관작이 추탈되다. - 경종 2 1722 - 관작이 회복되고,
書院 이 다시 설치되다. - 영조 52 1776 - 정조가 즉위한 후 다시 관작 추탈,
賜 額 書院 의 철거, 문집 훼손을 명하다. - 정조 6 1782 - 아들
尹 拯과 함께 관작이 회복되다
각주
[편집]- ↑ 송시열은 서인, 윤휴는 남인이었고, 논쟁 중 처음에 송시열에게 윤휴의 생각도 존중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윤휴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송시열과 관계가 틀어진다.
- ↑ 최효찬,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위즈덤하우스, 2008) 222페이지
- ↑ 가 나 다 라 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198페이지
- ↑ 인조실록, 인조 12년(1634) 8월 15일(무진) 2번째 기사
- ↑ 위와 같음.
- ↑ 가 나 다 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0페이지
- ↑ 윤씨는 부임하는 부사나 선비들에게 자신의 족보를 보여주며 자신의 신분을 알렸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가 의주에서 만난 어사(
御 史 ) 이시매(李 時 煤 )가 윤선거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이시매가 대신 몸값을 지불해 풀려난뒤 보내주었다. - ↑ 가 나 다 라 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1페이지
-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122
- ↑ 가 나 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123
- ↑ 가 나 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6페이지
- ↑ 가 나 다 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7페이지
- ↑ 현종실록, 현종 10년(1669) 4월 23일(을유) 4번째 기사
- ↑ 송시열은 아들 윤증의 스승이기도 했다.
- ↑ 송구수-송응광-송희조, 송구수-송응기-송갑조-송시열
- ↑ 송시열의 백부 송방조(
宋 邦 祚)의 아들 - ↑ 가 나 박태보의 졸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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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편집]- 인조실록
- 효종실록
- 현종실록
- 연려실기술
- 송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