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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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심즉리(
역사
[편집]양명학 이전
[편집]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09년 4월) |
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풍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되었고, 송나라 때 이르러 두 성인들이 지은 문장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따라서 학자들은 수, 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것은 훈고학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던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수 많은 주석서들과 탁본들을 교차 비교 검증하여 문장의 본의미에 맞게 해석하고 책들을 새롭게 편집 새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이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세월이 흘러 주자학에 대한 주석서가 만들어지고 주자학을 근본으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이 만들어져 학풍은 오히려 훈고학이 성행하던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어버린 것이다.
양명학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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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은 군주들의 황권, 왕권 강화의 재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다.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3], 주석학[4], 윤리학[5], 방법론[6]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유교에서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던 만큼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던 학파였다.
전개
[편집]중국
[편집]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공자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방식을 따라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
양명우파
[편집]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
양명좌파
[편집]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
[편집]박상(
일본
[편집]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
[편집]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심즉리
[편집]심즉리(
치양지
[편집]치양지(致
지행합일
[편집]지행합일(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
[편집]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
[편집]사상마련(
격물(格 物 )
[편집]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
양명학이 연 지평
[편집]사람의 욕구
[편집]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
[편집]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양명학 주요 학자
[편집]중국
[편집]조선
[편집]일본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
- ↑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송·명의 사상 > 송·명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리·기설
- ↑ 「사서집주」등
- ↑ 「성 즉리」설
- ↑ 「거경궁리」설
- ↑ 배영동 (1992년 4월 30일). 《명말청초사상》. 서울: 민음사. 45쪽쪽.
-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송·명의 사상〉
- ↑ 박상(
朴 祥 , 1474~1530), 눌재집(訥齋集 ) > 눌재선생집 부록 제2권(訥齋先生 集 附錄 卷 第 二 ) > <서술(敍述 )> 한국문집총간 제19권 p.102c : "王 陽明 守 仁 文字 。東 來 未 久 。東 儒莫知 其爲何 等 語 。先生 與 金 十 淸 。世 弼公碩 見 其傳習 錄 。斥謂禪學 。有 酬 唱三 絶 。先生 詩 。有 曰却恐 人 驚異 所 云 之 句 。而餘皆 逸 。十 淸和 詩 曰。紫 陽 人 去 斯文 喪 。誰 把 危微考 舊聞 。學 蹈象山 多病 處 。要 君 評 話 復 云云 。" - ↑ 김세필(
金 世 弼, 1473~1533), 십청집(十 淸 集 ) > 十淸先生集卷之二 > 7언절구(七言 絶句 ) > 우화눌재(又 和 訥齋) 한국문집총간 제18권 p.221b - ↑ 오종일, 〈양명전습록전래고〉, 《철학연구》 4집,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1978, 75쪽
- ↑ 이병도 (1987년 12월 24일). 《한국유학사》. 서울: 아세아문화사. 357~358쪽.
- ↑ 송환기, 《성담집》 권 19, 동강 남 공 묘갈명; 남구만, 《약천집》 권24, 고중조(
高 仲 祖 ) 통정대부 수 전주부윤 전주진병마절제사 공 유사; 이익, 《성호전집》 권 68, 정재 남 선생 소전 - ↑ 장유, 《계곡만필》 권1, 우리나라의 경직된 학풍[
我國 學風 硬直 ] - ↑
大 學問 維基文庫 ,自由 的 圖書館 - ↑ 가 나 다 이종란 (2006년 2월 17일). 《왕수인이 들려주는 양지 이야기》. 자음과모음.
- ↑ 풍우란 (1989년 8월 10일). 《중국철학사》. 번역 정인재. 서울: 형설출판사. 385~386쪽.
- ↑ 왕양명 (2000년 7월 21일). 《전습록》. 번역 정차근. 서울: 평민사. 416쪽.
참고 문헌
[편집]-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한겨레 21 2006년12월14일 제6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