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8월 세조의 명으로 행 태일전직(行太一殿直) 윤기(尹沂)·전 사직(司直) 신선경(愼先庚)·수의 교위(修義校尉) 권치명(權致命)의 딸을 뽑아, 세자의 후궁인 동궁 소훈(東宮昭訓)으로 삼았다. ( 그러나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본 자녀들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4]도 했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였다. 병석에 누운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종이에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芍藥)이 주란(朱欄)에 가득찼네 / 명황(明皇)이 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楊貴妃)를 잃고 나니 / 빈장(嬪嬙)이야 있었건만 반겨 보지 않았네.(風雨無情落牡丹, 飜階紅(藥)蘂滿朱欄。 明皇幸蜀 楊妃死, 縱有嬪嬙不喜看)'라는 고시를 쓰기도 했다.
1457년(세조 3년) 9월 20일(음력 9월 2일)에 20살의 나이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가위눌림이라고 하나 불확실하다. 야사는 의경세자와 세조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문종비 현덕왕후의 원한을 샀다고 전하지만, 오히려 덕종이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이 전설이 허구로 추정된다.
그가 죽자 현덕왕후의 살을 맞고 죽었다는 도사의 말을 신봉한 세조는 형수 현덕왕후의 묘를 파내 시신을 쪼개고 강물에 던졌다. 또는 관곽을 강물에 던졌다고도 하는데, 관곽이 멈춘 곳의 주민들이 임시로 거두었다가 후에 다시 능으로 조성했다 한다.
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자는 용모와 의표(儀表)가 아름답고 온량(溫良) 공경(恭敬)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또 해서(楷書)를 잘 썼다. 양궁(兩宮)이 애도(哀悼)하니, 시종한 여러 신하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의경세자는 예의 바르고 학문을 좋아하고 해서를 잘쓴 세자였으며 의경세자의 죽음은 당시에 안타까운 죽음이였음을 알 수 있다.[5] 세조는 명을 내려 그의 상복은 7일상으로 치루게 하였다.
시신은 그해 11월 24일경기도고양현 동봉현(東蜂峴, 현 경기도고양시덕양구원당동서오릉 경내) 간좌 곤향(艮坐坤向)에 매장되고 표석을 세웠다. 덕종의 묘소는 세자의 예에 따라 조성되었고, 후일 묻힌 부인 소혜왕후의 묘는 대비의 예에 따라 조성되어 석물 구조의 차이가 있다. 세조는 9월 7일 어찰을 국장도감에 보내 나의 장남이라 해도 박하게 하고, 경상(卿相)급으로 간략하게 장례하도록 지시했다. 바로 의경(懿敬)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사당은 효정묘(孝靖廟)라 하고, 묘(墓)는 의묘(懿墓)라 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부인 한씨는 수빈(粹嬪)으로 봉했고, 궐내에서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세조의 배려에도 사가로 나가 살겠다며 출궁하였다. 수빈 한씨는 사저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냈지만, 한명회 등과 사돈이 되면서 둘째 아들 잘산군을 왕(王)으로 올리는 묵계를 체결한다. 후에 둘째 아들 잘산군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면서 1469년부터 추숭여론이 나타났고, 1470년1월 왕(王)으로 추존되었다가 1475년 다시 대왕(大王)으로 추존되었다.
1470년(성종 1년), 1월 18일에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숭하였다. 당시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친형인 정종은 사후 시호가 없었고 종묘에도 배향되지 않았으므로 '정종(定宗)'이 아닌 '공정왕(恭靖王)'이라 불렀는데[6], 의경왕(懿敬王) 또한 그러하였다. 아내 수빈 한씨 또한 '왕대비(王大妃)'가 아닌 '인수왕비(仁粹王妃)'로 진책되었다. 이때 그는 왕으로는 추숭되었으나 종묘에는 배향되지 않았다. 당시 그를 왕으로 추존한 뒤 황고로 부르느냐 황백고로 부르느냐를 놓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사당은 의경묘(懿敬廟)로 정해지고 제사는 월산대군에게 받들게 하였다. 1471년 온문(溫文)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475년(성종 6년), 1월 6일에 의경왕(懿敬王)을 의경대왕(懿敬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이때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춘추관(春秋館)에서 논의하여 올린 첫 시호는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었고 1월 21일(임술)에 최종적으로 예조(禮曹)에서 올린 시호가 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였다. 따라서 인수왕비(仁粹王妃) 또한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진책되었다. 그해 4월 23일부터 종묘에 부묘하자는 상소가 올라와 9월 16일 논의 끝에, 1476년(성종 7년) 1월 5일 종묘에 예종의 묘 앞으로 부묘되었다.
한편 그의 사후 아버지인 세조가 며느리뻘인 귀인 권씨(貴人權氏)와 귀인 윤씨(昭訓尹氏)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 귀인과 윤 귀인은 세조의 장남 덕종의 후궁들이었다.[9][10]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 자신도 희생되었다.[9][10]
김일손은 귀인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許磐)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9],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귀인 윤씨(昭訓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