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춘추 전국)
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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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년경 초나라의 강역. | ||||
수도 | 단양( 영(郢) 진( 수춘(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11세기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기원전 223년 ~ 기원전 222년 | 육웅(초대) 웅려 웅계(말대) | |||
국성 | 미성(羋姓) 웅씨( | |||
지리 | ||||
위치 | 후베이성 | |||
인문 | ||||
공통어 | 초어, 상고 한어 | |||
데모님 | 초족 |
초(중국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그 군주의 처음 작위는 자작이었으나, 기원전 704년에 무왕이 왕을 자칭했고 전국 시대 말기 기원전 223년에 진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 기원전 208년에 회왕의 후손인 의제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나, 기원전 202년에 초한전쟁에서 전한에게 패배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역사
[편집]사마천의 사기 초세가에 초나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은 창의의 아들이고, 그 후손 육종은 축융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때 화정(
육웅의 증손자인 웅역에 이르러 주 성왕은 주나라 건국시에 주 문왕과 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에 봉했다. 하지만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주었다.[2]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3]으로 정했다.
서주 이왕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
기원전 841년에 서주 여왕이 국인폭동으로 쫓겨나자, 주나라는 잠시 공화기가 되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초나라는 그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822년에 웅순이 자작이 되자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은 가라앉았고, 내부 분쟁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로 돌리니 초나라는 마침내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약오, 소오와 분모가 자작이 되니 초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근방에 있던 당시에 가장 강한 국가인 수나라와 어깨를 겨뤘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이 분모의 세자를 죽이고 자작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초 무왕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7]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은 도성을 단양에서 영으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 양공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8]에 소집하자 초 성왕(
기원전 614년 려(
역대 군주
[편집]대수 | 칭호 | 성명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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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웅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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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웅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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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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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웅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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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웅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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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웅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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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웅지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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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웅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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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웅용( |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 |
10 | 웅엄( |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 |
11 | 웅상( |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 |
12 | 웅순( |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 |
13 | 웅악( |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 |
14 | 약오( |
웅의( |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
15 | 소오(霄敖) | 웅감( |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
16 | 분모(蚡冒) | 웅순( |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
17 | 무왕( |
웅철( |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
18 | 문왕( |
웅자( |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
19 | 장오( |
웅간( |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
20 | 성왕( |
웅운( |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
21 | 목왕( |
웅상신( |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
22 | 장왕( |
웅려( |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
23 | 공왕( |
웅심( |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
24 | 강왕( |
웅소( |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
25 | 겹오(郟敖) | 웅균( |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
26 | 영왕( |
웅건( |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
27 | 자오(訾敖) | 웅비( |
|
28 | 평왕( |
웅거( |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
29 | 소왕( |
웅임( |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
30 | 혜왕( |
웅장( |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
31 | 간왕(簡王) | 웅중( |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
32 | 성왕( |
웅당( |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
33 | 도왕(悼王) | 웅의( |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
34 | 숙왕(肅王) | 웅장( |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
35 | 선왕( |
웅량부( |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
36 | 위왕( |
웅상( |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
37 | 회왕( |
웅괴( |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
38 | 경양왕( |
웅횡( |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
39 | 고열왕( |
웅완( |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
40 | 유왕( |
웅한( |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
41 | 애왕( |
웅유( |
기원전 228년 |
42 | - | 웅부추( |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
43 | 창평군( |
웅계( |
기원전 223년 |
초나라의 공족 가문
[편집]- 약오씨(
若 敖氏) : 약오의 아들들에게서 갈려나온 집안이다. - 굴씨(
屈 氏 ) : 무왕의 아들 굴하(屈 瑕 )를 시조로 삼는 집안이다. 연원은 오래됐지만, 한참 후에 갈려나온 소씨·경씨와 함께 삼려대부를 맡아 초나라 후기 3왕족을 이룬다. - 위씨(蔿氏, 薳氏) : 분모의 아들 위장(蔿章)을 시조로 삼는 집안이며, 薳의 음이 위, 원 둘이므로 원씨라고도 한다. 위고(蔿賈)·손숙오·위자빙(蔿子憑) 등이 있다.
- 경씨(
景 氏 ) : 경평왕 곧 평왕의 아들 자서(子 西 )를 시조로 삼아 경평왕의 시호 중 경을 씨로 쓴 집안이며, 굴씨·소씨와 함께 삼려대부를 맡아 초나라 후기 3왕족을 이룬다. - 소씨(
昭 氏 ) : 소왕의 아들 자량(子 良 )을 시조로 삼아 소왕의 시호를 씨로 쓴 집안이며, 굴씨·경씨와 함께 삼려대부를 맡아 초나라 후기 3왕족을 이룬다. - 유씨(
柳 氏 ) : 초한쟁패기 시기 항량, 항우에게 옹립된 의제(義 帝 ) 웅심의 후예라 전한다.
각주
[편집]- ↑ Zhang, Zhengming. (2019) A History Of Chu (Volume 1) Honolulu: Enrich Professional Publishing. p. 46-47
- ↑ 이를 자남지전(
子 男 之 田 )이라고 한다. 주나라가 이민족들을 제후국에 봉할 때 그들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주 썼던 이민족들을 배척하는 방법이다. - ↑ 초 나라의 첫 번째 도읍지로써 지금의 후베이성 자귀현(秭歸
縣 ) 동남쪽의 고을로써 장강의 강안(江 岸 ) 도시로 쓰촨성과의 경계에 있다. - ↑ 지금의 후베이성 죽산현(
竹山 縣 )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 ↑ 양우(楊雩) 혹은 양월(
陽 越 )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후베이성 강릉현(江 陵 縣 ) 일대 - ↑ 지금의 후베이성 악성현(鄂城
縣 ) 부근 - ↑ 지금의 후베이성을 가로 지르는 한수(
漢 水 )의 하류 지방을 말한다. - ↑ 송나라 영지로써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서북
- ↑ 초 나라와 동성인 제후국으로 호북성 자귀현(秭歸
縣 ) 동남에 있었던 군소 제후국 - ↑ 성복대전(
城 濮大戰 ), 기원전 636년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 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의 결과 진 문공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 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은 당진이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