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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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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조씨
かんちょう
나라한국
관향서울특별시
시조조지수(ちょうことぶき)
집성촌경기도 연천군
함경남도 북청군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경기도 시흥시
주요 인물조휘, 조양기, 조인옥, 조소생, 조온, 조광조, 조경, 조수삼, 조병옥, 조병화, 조지훈, 조종호, 조세형, 조윤형, 조순형, 조근해, 조성욱, 조성태, 조진형, 조길형, 조태열, 조명균, 조준희
인구(2015년)332,580명
비고한양조씨정통대종회

한양 조씨(かんちょう)는 서울특별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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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しそ) 조지수(ちょうことぶき)는 덕원부(とくみなもと) 용진현(りゅうけん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해 온 토착 사족(士族しぞく)의 후예로 고려 조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ちょうじゅん大夫たいふ 僉議中書ちゅうしょごと)를 지냈다.

1258년(고종 45년) 조지수의 아들 조휘(ちょうあきら)가 군사를 일으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 등을 죽이고 화주(かずしゅう)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투항함으로써 그 공으로 초대 쌍성총관이 되어 대대로 세습했다.

1356년(공민왕 5년) 조휘의 증손이자 조양기(ちょうりょう琪)의 손자인 조소생(ちょう小生しょうせい)이 4대째 쌍성총관으로 있었는데, 조양기의 아들이자 조소생의 숙부인 조돈(ちょう暾)이 공민왕의 명을 받은 동북면병마사 유인우(やなぎひとし)에게 협조하여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고려가 철령 이북의 옛 땅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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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을 지낸 조휘의 아들 조양기(りょう琪)는 총관 겸 부원수를 지냈으며, 손자인 조돈(ちょう暾)은 원나라에 협조하였던 조상들의 과거사를 청산하고 고려에 귀의한 이후 고려의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三重大みえだいただし)에 올랐으며, 조선 태조의 처남을 비롯 증손들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활약하였다. 조인벽은 사도도지휘사(よんみち指揮しき使), 조인경(ひとし瓊)은 검찬성을 지냈고, 셋째인 조인규(ちょうひとし珪)는 검한성을 지냈다. 또 넷째인 조인옥(ひとし沃)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내고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또 조선 개국공신인 조온(あつし)은 찬성사를, 좌명공신인 조연(ちょう涓)은 우의정을, 조사(ちょう)는 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정암(せい菴) 조광조는 개혁 정치가로 특히 유명하다.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きのえさるたんまき)를 편수한 문절공(文節ぶんせつこう) 조원기(元紀もとのり)와 두 번째 족보인 신묘삼권보(からしさんかん)의 서문을 쓴 문간공(ぶん簡公) 조경(絅)은 청백리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ぎへいしょう)인 백기당(白旗しらはたどう) 조웅(くま), 산서공(山西さんせいこう) 조경남(慶男よしお) 등이 있다.

현대 인물 중에서는 시인이자 교육자인 조병화(ちょう炳華), 조지훈(ちょうしばかおる), 독립운동가 조병옥(ちょう炳玉)과 그의 아들들인 국회의원 조윤형(ちょういん衡), 조순형(ちょうしゅん衡),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ちょう衡), 헌법재판관을 지낸 조승형(ちょうのぼる衡), 국방부장관을 지낸 조성태(ちょうしげるだい), 제22대 공군참모총장 조근해(ちょうかい), 국문학자 조동일(ちょう東一とういち), 역사학자 조동걸(ちょうひがし杰), 통일부 장관 조명균(ちょうあきらひとし), 학교법인 우암학원 설립자 우암 조용기(ちょうりゅう沂), 기업인이면서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조준희(ちょうたかし熙) 등이 있다.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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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かん)은 서울특별시의 옛 지명이다. 371년(백제 근초고왕 26년) 백제가 점령하여 한산이라 하였다. 392년(고구려 광개토대왕 2)에 고구려가 점령했고, 475년(장수왕 63)에는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553년(신라 진흥왕 14) 신주(しんしゅう)로 개칭하였다가 557년(진흥왕 18) 9주 중 한산주(かんやましゅう)에 속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한주(かんしゅう)라 개칭하면서 한양군(かんぐん)으로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양주목(楊州まき)으로 승격되었고, 1067년(문종 21)에는 남경(南京なんきん)이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かん)로 개칭하였다. 1393년(태조 3)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듬해 한성부(かん城府じょうふ)로 개칭하였다. 1910년에는 경성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5년에 서울시로 개편하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

분파(7세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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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풍군파(かんゆたかくん) - 완(琓)
  • 도제공파(せいおおやけ) - 하(かわ)
  • 참판공파(さんばんおおやけ) - 흥(きょう)
  • 고사공파(くら使おおやけ) - 육(いく)
  • 총제공파(摠制おおやけ) - 모(慕)
  • 돈녕공파(あつしやすしおおやけ) - 자(慈)
  • 공안공파(きょうやすおおやけ) - 혜(めぐみ)
  • 병참공파(へいさんこう) - 련(憐)
  • 현령공파(縣令けんれいおおやけ) - 맹발(はじめはつ)
  • 현감공파(けんかんおおやけ) - 중발(なかはつ)
  • 사정공파(つかさただしおおやけ) - 근(瑾)
  • 파서공파(坡西おおやけ) - 순생(じゅんせい)
  • 봉례공파(たてまつれいおおやけ) - 관생(かんせい)
  • 사직공파(司直しちょくおおやけ) - 효생(孝生たかお)
  • 정랑공파(正郞まさおおおやけ) - 덕생(とくせい)
  • 호의공파(おおやけ) - 욱생(あさひせい)
  • 현감공파(けんかんおおやけ) - 서(みず)
  • 참의공파(參議さんぎおおやけ) - 숙생(肅生)
  • 대호군공파(だいまもるぐんおおやけ) - 충서(冲諝)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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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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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항렬 (시조로 1세)
  • 병참공파 중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을 중심으로 세거한 주실 조씨 항렬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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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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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64,881가구 273,408명
  • 2000년 95,206가구 307,746명
  • 2015년 332,580명

호적상 한양 조씨로 등록된 인구는 위와 같다. 다만 이는 조돈의 후손이 아닌 인구를 모두 합한 것이고, 한양조씨정통대종회에서 발간한 족보엔 사망자를 포함하여 167,676명이 등재되어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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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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