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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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 |
조선의 사헌부 대사헌 | |
재임 | 1518년 3월~1519년 1월 |
임금 | 조선 중종 |
이름 | |
자 | 효직( |
호 | 정암( |
시호 | 문정(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82년 8월 23일 |
출생지 | 조선 한성 |
사망일 | 1519년 음력 12월 20일 (향년 37세)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능성현에서 사사(사형) |
국적 | 조선 |
경력 | 문신, 사상가, 도학자, 정치가, 시인, 작가, 저술가 |
당파 | 사림파 후예 세력 |
부모 | 조원강(부) 여흥 민씨 부인(모) |
형제자매 | 조영조(형), 조숭조(아우) |
배우자 | 한산 이씨 부인 |
자녀 | 조정(장남), 조용(차남) |
학문 활동 | |
분야 | 성리학 |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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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조광조는 1482년 한성에서 감찰 원강(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
성리학 수학[편집]
14세 때 성리학자 김굉필(
그는 김종직(
이후 김굉필의 배소가 옮겨지게 되면서 그와 이별,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로 사사된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이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이어 터진 직후라 김굉필의 제자이고 김종직의 말씀과 성리학에 빠진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피하였으며,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
청년기[편집]
청소년기[편집]
조광조는 공자, 주자와 포은 정몽주를 인생의 모델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을 세상의 사표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는 사소한 예의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꾸준히 노력했고, 총명하였으며, 짧은 만남 후 스승 김굉필과 이별한 뒤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가슴속에 새겼다.
모르는 점이 있으면 답을 얻을 때까지 연구·독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서 묻거나 선배 사림인사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남곤과의 인연[편집]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조광조는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남곤도 있었다.[4] 청년기의 남곤은 같은 김종직 학파 사람으로서 조광조와 친분이 있었다. 산책을 하던 길에 조광조는 지나가던 여인의 모습을 보고 계속 뒤돌아봤고 남곤은 옆으로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앞서갔다. 조광조는 지나는 길에 여인들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 조광조는 어머니 여흥 민씨에게 산책시 여인의 모습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자책하였으나, 조광조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된다.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반드시 있다. 남곤은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인가?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내가 너를 어찌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는가?"
이후 조광조의 어머니 민씨는 아들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충고했고, 아들이 남곤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집도 이사하였다 한다.
성균관 수학시절[편집]
19세에 부친을 여의고 3년상을 마쳤다. 부친을 일찍 여의었으나 홀어머니 민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면서 한번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자 김종직의 다른 문하생들과도 찾아다니며 정치와 시국을 논하며, 사물의 이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와 교류하던 선배들 중 한 동리에 살던 남곤의 인물됨됨이를 우려스럽게 본 그의 모친은 집을 멀리 이사하여 남곤을 피하게 한다. 1507년(중종 1년) 윤1월 박경(
1510년(중종 5) 소과인 진사시에 장원 중 2등으로 합격하였다.[5] 그해 성균관에 들어가 경서를 강독할 때 《중용(
과거 급제[편집]
1515년(중종 1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중종이 성균관을 찾아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중종은 '금일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겪으며 이상적인 정치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세상에는 성함과 쇠함이 있으나 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예로서 사람들의 뜻을 이끌고 즐거움으로 사람들의 기운을 순화시킨 다음, 바른 정치로 그것을 행한다면 정치와 교화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천지가 밝아질 것이며 천지의 기와 어울려 하나가 돼 음양의 기운을 뿜어 대니 모든 초목이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7]
성인이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기만 하는 곳의 사람들도 그 덕에 감화되는데 성인이 머무는 곳에서 사람들이 입는 감화는 측량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그 도를 얻으면 기강이란 힘써 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게 되며 애써 법도를 정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듣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해지는 것이다.[7]
성균관의 문묘에서 치러진 알성시의 답안에서 그는 임금을 타이르는 듯한 답을 제시했다. 그의 답에 시험관들은 탄복하였고, 이를 직접 읽어 본 중종은 그를 친히 만나 세상을 구할 방법을 물었다. 그는 임금이 스스로 도와 덕치로서 다스리고, 먼저 솔선수범하여 수기치인할 것을 강조했다.
“ |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서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 마음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3] | ” |
그는 중종에게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세우고 왕도정치와 지치주의 실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관료 생활과 개혁 정치[편집]
관료 생활 초기[편집]
그해 바로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이후 사헌부 감찰을 거쳐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 상소를 올려 화제가 된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그 이튿날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8]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던가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됐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하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8]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후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놓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8] 이후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된다.
사간원 정언 재직 중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단경왕후의 복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김정, 박상 등이 단경왕후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사간원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그는 상소를 올린 사람을 벌주는 것은 언로를 탄압하는 것으로, 국가 존망의 위협이 된다 하여 이행을 파직시켰다.
관료 활동[편집]
1516년(중종 11) 3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바로 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5월 검토관(
1517년(중종 12) 2월 홍문관부교리, 경연 시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황해도 관찰사 윤세호는 그에게 아부하여 대사헌에 제수되기도 한다. 이후 조정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해 12월 직제학(
1518년 1월 시강관을 거쳐 홍문관부제학, 경연 참찬관이 되었다. 그 뒤 월과(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음력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다섯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
정치 활동[편집]
개혁 정치[편집]
조선 정부는 조광조 등의 계청으로 현량과(
그러나 신진의 청년들이라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
정몽주와 성현 문묘 종사 사업[편집]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9]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
성리학 보급[편집]
1518년(중종 13년) 11월에는 대사헌으로 세자부빈객을 겸하면서 한편으로 천거시취제(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도 성리학 이념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판단, 향약(鄕約)을 장려하여 조선의 성리학화에 앞장섰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아 사대와 서인은 물론이고 아녀자와 천인들 조차도 공맹의 의리를 알아야 된다고 확신, 성리학 이론서와 성리학 기본서적을 무료로 인쇄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 배포하였고, 아녀자들 역시 공맹의 도와 주자의 예를 배워야 한다며 이를 손수 한글로 번역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하였다. 이는 순수 조광조 자신의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것이었다. 또한 불교를 미신으로 규정하여 왕실의 소격서 철폐와 함께 불교적인 종교행사 역시 없앨 것을 중종에게 건의하였다.
음서 제도나 인맥으로 관료를 천거하는 방법을 부당하게 여긴 그는 관료들의 학문적 소양과 자질을 시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실력과 능력이 없어도 인맥과 연줄로 관직에 오르는 것은 정당한 인재가 들어설 자리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미신타파를 위해 소격서 혁파와 불교시설 혁파, 불교행사 주장, 무속인 출입과 무속행사의 금지를 주청하였다.
1519년 3월 6일 일시적으로 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 직에서 사직했다가 9일만인 3월 15일에 복귀했으나 그날 말에서 떨어지는 낙마사고를 당해 홍문관부제학으로 전임되었다. 4월 겸 동지성균관사(
위훈 삭제[편집]
그는 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 등 중종 반정공신들에 의해 폐출당한 단경왕후 신씨(
1519년 10월 중종반정의 공신들의 수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공로가 있는지 여부가 의심스러운 거짓 녹훈자(
조광조는 유자광은 패악한 인물이고 심정은 심보가 바르지 못한 인물이며, 그들이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고 규탄했으며 이들을 숙청하고 부패한 반정, 훈구 공신들을 축출해야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때 남곤 역시 소인배라고 비판했는데, 이 말이 남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남곤은 훈구파가 조광조 일파를 공격할 때 도움을 주지 않는다.
개혁 방법 논란[편집]
그러나 개혁의 방안을 놓고 조광조는 남곤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조광조가 '문학은 선비의 일이 못 되며, 경전 공부에 전념토록 하자'고 하면, 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했고, 김숙자가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활쏘기를 가르쳤던 점도 지적했다.
인물 천거제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지자 남곤은 양자를 절충, 과거 제도도 존속시키되 과거제를 보완해 천거로도 일부 관리를 뽑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과거제를 천거제로 대체해나가야 된다고 했다.[13] 남곤의 미온함을 두고 조광조 일파에서 “남곤은 소인이다”라는 비판이 점점 커져 갔다. 조광조 일파의 공격은 그에 대한 남곤의 감정을 악화시킨다.
훈구파들의 비난이 계속된 가운데, 안당과 정광필도 그가 너무 과격하다고 지적하였으나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이를 듣지 않았다.
중종과의 갈등[편집]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후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며 "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8]"고 봤다.
그러나 정암은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8]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한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 때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도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해 벽지로 좌천된 남곤, 심정 등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도가 일조일석에 이뤄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자리를 내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3]
중종은 개혁에 피로를 느꼈고, 훈구파들은 후궁들과 친인척과 인맥을 통해 중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런데 주초위왕 나뭇잎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8] 그에 의하면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8]
위훈 삭제 정책 강행[편집]
1519년(중종 14) 10월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 등과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
위훈 삭제 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조광조에게 기울어졌다고 왕에게 말하게 하고, 심정은 또 경빈 박씨의 궁인을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획책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3]
학문 활동[편집]
관료생활 중에도 그는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성수침, 백인걸, 이연경, 홍섬, 기준, 김명달, 조욱, 양언진, 정환, 나식, 허백기, 홍봉세, 정원, 윤관, 이희민, 이충건, 박세후, 김대유, 윤변, 이기, 안담, 최여주, 홍순복, 민의, 심광언, 박소, 조희윤 등의 문인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 중 이연경은 조광조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잠시 수학했었던 인물이다.
성수침은 후일 성혼의 아버지이자 그에게 학문을 전했고, 백인걸의 문하에서는 성혼 등이 수학했으며 금강산 입산 경력으로 공세를 받은 율곡 이이 역시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손제자가 되었다. 또한 조광조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윤변의 아들은 오음 윤두수와 월정 윤근수였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기호학파와 서인을 형성하였다.
그의 문하생 중 한 명인 윤관은 남인의 논객 백호 윤휴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생애 후기[편집]
기묘사화(己 卯 士 禍 )[편집]
위훈 삭제 사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
그날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드디어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김전·남곤·이장곤(
개혁 실패의 원인[편집]
그는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 승지를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3] 그러나 신진 변혁주체들이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보수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3] 그리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만들어 불만세력을 만들어버렸다. 또한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개혁에 대해 불안을 느껴 조광조를 처단한다.
한 세대 뒤의 유학자 이황이나 그의 손제자 뻘이던 율곡 이이 역시 이러한 점을 들어 그의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유배[편집]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 (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8]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후일 1667년(현종 8년) 그의 적려유허비가 세워졌다. 적려유허비는 후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된다.
최후[편집]
권력을 잡게 된 심정과 남곤 그리고 홍경주는 조광조를 살려두려 하지 않아서 중종은 결국 음력 12월 20일 능주(
그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
그가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음력 12월 20일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 조광조의 절명시(絶命 詩 )[14]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7세였다.
사망 직후[편집]
사사당한 그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그가 유배된지 1개월 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15] 이 추모옥은 후일 죽수서원으로 발전한다. 선조1년(1568)에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을 논의하였고, 이에 따라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15]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3]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3]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리로 관을 옮겨 반장(
그의 영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제작되었으나 대부분 실전되었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 국오(
신사무옥[편집]
참고|신사무옥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 경멸하게 되었다. 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남곤, 김전 등과 교류하던 성희안과 유순정 역시 이미 사망하여 그의 편을 들어주는 인물은 없었다. 도리어 남곤은 조광조 등의 사사가 결정될 때 반대하였지만,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않은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
조광조 등의 개혁파가 중종 기묘년에 사화를 당한 10년 후에 성균관 생원 신백령(
사후[편집]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불렀다.[3]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瀟灑) 양산보(
1543년(중종 38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 하서(
1544년(인종 원년) 인종은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기묘 명현들의 신원을 복원하였으니 이는 평소 존경하던 스승 김인후(
1567년(명종 21년) 선조 즉위 후 기대승에 의해 조광조에 대한 복권과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진 이후, 계속된 사림파들의 상소와 주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의 증직이 내려지고, 시호가 추증되었다. 1582년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
1519년(중종 14년) 학포 양팽손에 의해 건립된 사당에 사액이 내려져 1570년(선조 4년) 능주의 죽수서원(
사상[편집]
국왕의 솔선수범론[편집]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
소학과 도덕윤리 보급[편집]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은 소학(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
동시에 그는 소격서(
거병과 군자론[편집]
도적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해도 정당한 명분을 갖추지 않고, 비밀리에 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논의였다. 중종연간에 함경북도 회령부(
1518년 남도병사(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학맥[편집]
조광조는 사사되었지만 그의 제자인 백인걸과 이연경 등은 명종 때에 정계에 진출하며, 백인걸의 문하에서 한때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수학하였다.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백인걸→이이
→성수침→성혼
→이연경
→김안국→김인후
→김정국
→손중돈→이언적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그러나 이이는 그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가족 관계[편집]
조광조가 등장한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 《풍란》 (MBC, 1985년~1985년, 배우:유인촌)
- 《조광조》 (KBS, 1996년~1996년, 배우:유동근)
- 《임꺽정》 (SBS. 1996년, 배우:태민영)
- 《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배우:차광수)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
37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14]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14]
중의적 평가[편집]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도교·도참비기(
부정적 평가[편집]
민생이나 국방에 관련된 실무적인 능력과 감각이 전혀 없고 급진적이었다는 점이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되고 있다. 소격서 철폐에 관련되어서는 일개 제후인 조선 국왕은 감히 천제를 지내서는 안되며, 세종대왕이 이를 유지한 것이 잘못이라는 모화사상에 매몰된 주장을 하였다.
선조때의 성리학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
퇴계 이황(
또한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14]이라는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기타[편집]
조광조를 제거한 곤쟁이 젓갈[편집]
인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과 심정을 ‘곤쟁이 젓갈’(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둘을 싸잡아 비난한 말. 이후 ‘곤쟁이 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퍼졌다)이라고 두고두고 욕했다.[3] 그가 사사될 당시 그를 제거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로 심정과 남곤이 지목되었다. 김전 역시 조광조의 죽음에 관계되었다 하여 배신자나 변절자로 몰려 후배 사림파로부터 지탄받았다.
지방에 있었던 물질적 기반[편집]
조선 중기 정계에 진출해 '도학 정치'를 주창했던 사림들이 대부분 지방에 물질적 기반이 있었듯이 조광조도 그러하였다.[18] 그 덕분에 생계에 대한 걱정을 덜고 안정적인 학문, 정치 활동이 가능했다.[18]
저서[편집]
《정암집》이 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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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편집]
- 이상성, 한국 도학의 태산북두 조광조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 이종호, 정암 조광조:한국명인의 삶과사상 2 (일지사 펴냄, 1999)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 부남철,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사계절, 1996)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 ↑ 이익, 《성호전집》 권68, 빈소선생전. 이황이 지은 조광조의 행장(이황, 《퇴계집》 권48, 정암 조 선생 행장)에 따르면, 조충남은 조용(
趙 容 : 조광조의 둘째 아들)의 5촌 조카라고 한다. 또 이황, 《퇴계집·속집》(1843년 교정본) 권2, 증조충남(贈 趙 忠男 )의 주석에는 “충남은 정암의 종손(형이나 아우의 손자)이다.”[忠男 靜 庵 從 孫 ]” 라고 되어 있다. - ↑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대립과 분열〉, 조광조.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주초위왕[
走 肖 爲 王 ’ 음모에 꺾인 ‘개혁의 꿈’] 주간동아 2009년 12월 715호 - ↑ 남곤, 김전 등도 김종직의 문하생들이었다.
- ↑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년 p92
- ↑ [네이버 지식백과] 조광조 [
趙 光 祖 ]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 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 紙 署 司 紙 )에 임명되었다. - ↑ 가 나 조광조의 '알성문과 답안'에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남매일 2007. 04.18일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못다 핀 개혁의 꿈, 500년 비문으로 남다, 중앙일보, 2006년 5월 16일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
- ↑ 가 나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
- ↑ [매경포럼] 조광조도 실패한 인재추천 매일경제 2014년3월31일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날개 꺾인 봉황' 조광조가 머문 자리 - 오마이뉴스 2003년 4월 10일
- ↑ 가 나 죽수서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안돈후의 서녀의 아들로 외가를 고발한 공로로 서자에서 면천하여 양반이 되고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
- ↑ 가 나 “"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외부 링크[편집]
- 조광조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백과 미러)
- 조광조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조광조: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조광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조광조
- 수포로 돌아간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중종출처 : 수포로 돌아간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중종 오마이뉴스 2005.10.08일자
- 개혁사상가 조광조, 유배 길에 오르다 - 오마이뉴스 2006년 11월 13일자
- '날개 꺾인 봉황' 조광조가 머문 자리 - 오마이뉴스 2003년 4월 10일자
- 조광조는 왜 중종에게 개개고도 무사했나 오마이뉴스 2011년 5월 30일자
- 역사스페셜 제47편 조광조, 그의 개혁은 실패했나? - KBS 방송
- 조광조, 일편 단심의 리더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조광조, 그의 개혁은 실패했나 KBS 역사스폐셜 2006년 5월 19일자 방송